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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17대 효종 = 휘는 호, 자는 정, 호는 죽오 (재위 1649년~1659년)

인조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인열왕후이다. 비(妃)는 신풍부원군 장유의 딸 인선왕후이다. 1626년(인조 4) 봉림대군에 봉해졌다.

 

1635년(인조 13년) 송시열과 윤선도 등이 대군사부에 임명되어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을 가르쳤다.

그중 송시열은 청나라의 침략을 당한 조선의 현실을 금나라의 침략을 당한 남송과 같이 보았고,

주자의 사상이 이를 극복하는 해답이라 보았다.

송시열이 항상 주자를 언급하자 효종은 '말마다 옳은 이는 오직 주자이며,

일마다 옳은 이가 오직 주자이십니까'라고 반문했다 한다.

 

<세자 책봉과 즉위>

1636년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있다가 1645년 2월에 먼저 귀국했던 소현세자가

그해 4월 갑자기 죽자 5월에 청나라로부터 돌아왔다.

당시 대다수의 중신들은 원손의 세자 책봉을 주장했으나 국유장군론을 내세운 인조의 강한

의지에 따라 윤6월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1649년 5월 인조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북벌계획>

효종은 오랫동안 청나라에 머무르면서 자기의 뜻과는 관계없이 서쪽으로는 몽고,

남쪽으로는 산하이관, 금주위 송산보까지 나아가 명나라가 패망하는 것을 직접 경험하였고,

동쪽으로는 철령위, 개원위 등으로 끌려다니면서 갖은 고생을 하였기 때문에

청나라에 원한을 품은 데다가 조정의 배청 분위기와 함께 북벌계획을 강력히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청나라와 연결된 김자점 등의 친청파를 파직시키고 김상헌, 김집, 송시열, 송준길 등

대청 강경파를 중용하여 은밀히 북벌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김자점 일파와 반역적 역관배인 정명수, 이형장 등이 청나라와 은밀히 연결되어 있어

이들의 밀고로 청나라에 알려졌다.

그 결과 즉위초에는 왜정이 염려된다는 이유로 남방지역에만 소극적인 군비를 펼 뿐 적극적인 군사계획을 펼 수 없었다.

 

그러나 조선에 대하여 강경책을 펴던 청나라의 섭정왕 도르곤이 죽자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태도도 크게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1651년(효종 2) 12월 이른바 조귀인(=인조의 후궁)의 옥사를 계기로 김자점 등의

친청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하고, 청나라에 있던 역관배들도 실세함으로써 이듬해부터

이완, 유혁연, 원두표 등의 무장을 종용하여 북벌을 위한 군비확충을 본격화하였다.

1655년에는 모든 금군을 내삼청에 통합하고 600여명의 군액을 1,000명으로 증액하여 왕권강화에 노력하였다.

 

또한, 남한산성을 근거지로 하는 수어청을 재강화하여 서울 외곽의 방비를 튼튼히 하였다.

중앙군인 어영군을 2만, 훈련도감군을 1만으로 증액하고자 하였으나 재정이 이에 따르지 못하여 실패하였다.

 

<군사훈련, 군비확충>

한편, 1654년 3월에는 지방군의 핵심인 속오군의 훈련을 강화하기 위하여 인조 때 설치되었다가 유명무실화된

영장제도를 강화하는 동시에 1656년에는 남방지대 속오군에 보인을 지급하여 훈련에 전념하도록 하였다.

 

서울 외곽의 방위를 대폭 강화하기 위하여 원두표를 강화도, 이후원을 안흥, 이시방을 남한산성,

홍명하를 자연도(=부천시)로 보내어 성지를 수보하고 군량을 저장하여 강화도 일대의 수비를 강화하였다.

나선정벌 이후에는 남방은 물론 북방지대에도 나선정벌을 핑계로 산성 등을 수선하는 등 군비의 확충을 적극화하였다.

 

또한, 표류해온 네덜란드인 하멜 등을 훈련도감에 수용하여 조총, 화포 등의 신무기를 개량, 수보하고

이에 필요한 화약을 얻기 위하여 염초생산에 극력하였다. 뿐만 아니라 직접 관무재 등에 참가하여 군사훈련 강화에 노력하였다.

 

1655년 8월에는 능마아청을 설치하여 무장들로 하여금 강습권과하도록 하였으며,

이듬해 정월에는 금군의 군복을 협수단의로 바꾸어 행동에 편리하게 하는 등 집념 어린

군비확충에 노력하였으나 재정이 이에 따르지 못하여 때로는 부작용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이와같은 효종의 군비확충에도 불구하고 청나라는 국세가 이미 확고하여져 북벌의 기회를

포착하지 못하였다. 다만, 군비확충의 성과는 두 차례에 걸친 나선정벌에서만 나타났다.

 

<정책과 경제>

효종은 경제재건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 조선사회는 여러 차례에 걸친 전란으로 진전이 증가하고 농업생산력이 급격히 감소하는 한편,

농민들은 파산하여 유리하는 등 국가체제를 유지하기 힘들 정도로 경제질서, 사회질서가 붕괴 위기에 놓여 있었다.

효종은 이러한 위기를 부세제도의 개혁, 농업생산력의 증대, 사회윤리의 강화로 극복하려고 했다.

우선 김육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대동법의 실시지역을 확대해 1652년에는 충청도,

1653년에는 전라도 산군 지역, 1657년에는 전라도 연해안 각 고을에서 대동법을 실시했다.

이와 함께 전세도 1결당 4두로 고정하여 백성의 부담을 크게 경감시켰다.

 

한편 1655년에는 신속이 편찬한 ‘농가집성’을 간행·보급하여 농업생산에 이용하도록 했다.

한때 군비확충에 필요한 동철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동전의 유통에 반대하기도 했으나

김육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상평통보 주조, 유통시키도록 했다.

 

문화면에서는 1653년 역법을 개정, 24절기의 시각과 1일간의 시간을 계산하여 제작한 시헌력을 사용하게 했다.

1654년 ‘인조실록’을, 이듬해 ‘국조보감’을 편찬·간행했으며, 1656년에는 소혜왕후가 편찬한 ‘내훈’과

김정국이 지은 ‘경민편’을 간행, 보급하여 전란으로 흐트러진 사회윤리의 재정립을 시도하기도 했다.

1657년에는 ‘선조실’을 ‘선조수정실록’으로 개편·간행했다.

 

* 부 : 16대 인조      * 모 : 인렬왕후 한씨

   * 왕비 : 인선왕후 장씨      * 딸 : 숙신공주 / 숙안공주 / 숙명공주

   * 아들 : 18대 현종 연     * 딸 : 숙휘공주 / 숙정공주 / 숙경공주      * 양녀 : 의순공주(금림군의 딸)

   * 후궁 : 안빈 이씨      * 딸 : 숙녕옹주

   * 후궁 : 숙의 김씨 / 숙원 정씨

 

 

조선 18대 현종 = 이름은 연, 자는 경직 (재위 1659~1674년)

봉림대군(=효종)이 볼모가 되어 심양에 끌려가 있을 때 심관에서 태어났다.

1649년 인조 27년 왕세손에 책봉되었다가 효종이 즉위한 후 왕세자로 책봉되고 1659년 효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즉위 직후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의 복제문제를 놓고 예송이 일어났다.

효종은 인조의 둘째 아들로서 왕위에 올랐고, 인조의 맏아들인 소현세자가 죽었을 때

자의대비가 맏아들에 대한 예로 3년상의 상복을 입었기 때문에 효종의 상에는

어떠한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가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기해예송)

 

서인측에서는 송시열, 송준길 등이 주축이 되어 왕가의 예도 원칙적으로 사서인의 예와

다를 바 없다는 입장에서 기년복(만1년복)을 주장한 반면, 남인측에서는 윤휴, 허목을 중심으로

출생순서보다는 대통의 계승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입장에서 효종을 적장자로 간주하여 3년상을 주장했다.

결국 정태화가 국제기년복을 건의하고 현종이 이를 지지함으로써 1차 예송에서는 서인들이 승리하게 되었다.

 

그러나 1674년 왕대비가 죽자 자의대비가 입을 상복을 둘러싸고 다시 예송이 일어났다.

당초 예조에서는 국제에 의거하여 기년복으로 정했다가 대공복(9개월복)으로 수정했다.

이에 남인은 대공복의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기년복을 주장했다. 이때 현종은 서인의 주장을

물리치고 기년복을 채택함으로써 서인정권이 무너지고 남인이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갑인예송).

 

<업적>

현종은 재위 기간중 양란을 겪으면서 흔들렸던 조선왕조 지배질서의 확립을 위해 노력했다.

선왕인 효종이 추진해오던 명분론적 북벌은 중단했으나 군비강화에 힘써 1665년 통제영에서

불랑기 50정, 정찰자포 200문을 만들어 강화도에 배치했으며, 1669년에는 어영병제에 의한 훈련별대를 창설했다.

 

재정구조의 재건을 위해서는 호구수의 증가와 농업의 발전, 조세징수체계의 확립에 노력했다.

우선 호구의 증가를 위해 1660년 양민의 삭발과 입승을 금했으며, 이듬해 도성 내의

자수, 인수의 두 사찰을 폐지하고 어린 승려는 환속하게 했다.

1670년 산간지방의 유민을 단속하여 호적에 편성하고, 1672년 국경지대의 범월인을

처벌하는 법을 정했으며, 호구 장악을 위해 오가작통사목을 제정했다.

 

농업의 발전을 위해 1662년 전주, 익산 등지에 관개시설을 만들어 수리면적을 늘렸고,

이듬해에는 양관을 각 도에 보내 관개시설을 점검하게 했다.

아울러 조세체계의 정비를 위해 1660년 호남의 산군에 대동법을 실시하고,

1663년에는 호남대동청을 설치했으며, 1662년 경기도에 균전사를 임명하여 양전을 실시했다.

1669년에는 조운선의 파선사고를 막기 위해 충청도 안흥에 남창과 북창을 설치하고

이 구간은 육로로 운반하게 했다.

1660년 재정부족을 메우기 위해 영직첩과 공명첩을 대량으로 발급했는데,

이것은 이후 정부의 재정 보충책으로 보편화되어 신분제의 해체에 크게 기여하게 된다.

1669년에는 양인확보책의 일환으로 공사천인(公私賤人)으로서 양처(良妻)의 소생은 모역(母役)을

따르게 하여 합법적으로 양인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그밖에 1660년 강화도의 정족산성에 새로이 사고(史庫)를 마련해 1665년에 등서한 역대 실록을 보관하게 했으며,

1668년 교서관에서 활자를 주조하게 하여 1672년 대자(大字) 6만 6,000여 자,

소자(小字) 4만 6,000여 자에 이르는 동활자의 주조를 완성했다.

 

1669년에는 송시열의 건의를 받아들여 성이 같으면 본관이 다르더라도 혼인을 못하게 했으며,

문묘 안에 계성묘를 세웠다. 시호는 소휴이며, 능은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숭릉이다.

 

* 부왕 : 효종      * 모후 : 인선왕후 장씨

   * 왕비 : 명성왕후 김씨      * 아들 : 19대 숙종 순     * 딸 : 명선공주 / 명혜공주 / 명안공주

 

 

조선 19대 숙종 = 휘는 순, 자는 명보 (재위1674~1720)

1661년(현종 2년) 음력 8월 15일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숙종은 어려서부터 병약하였는데, 모후 김씨는 형제도 없는데다가 병약한 체구를 타고난 그가 일찍 죽지 않을까 늘 염려하였다.

1667년(현종 8년)에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나, 13세의 어린 나이에 부왕 현종이 급서하면서 즉위하게 된다.

 

<즉위>

1674년 음력 8월에 13살의 나이로 임금으로 즉위하였으나, 속깊은 그는 수렴청정을 받지 않고 직접 나라를 통치하였다.

즉위한 그해에 제2차 예송으로 남인 허목 등의 대공설(9개월설)을 지지하고

기년설(만 1년설)을 주장하는 서인을 배척하여 남인 정권을 수립했다.

 

숙종이 조선을 다스렸던 기간은 조선이 개국된 이래 당파 싸움이 가장 심했던 때였다.

그의 재위 기간 중에 남인과 서인의 당파 대립 관계가 치열해지고,

1680년대에는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리되어 이들도 서로 당파 싸움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 한 당파가 다른 당파를 완전히 몰아내고 1당 정치를 하는 환국 정치가 주된 현상이 되었다.

 

<환국 정치>

숙종의 치세는 크고 작은 정치 논쟁으로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갑인예송에 이어 남인들이 서인의 처벌 문제로 강온파로 분열되자 허적 등 탁남을 지지하였다가,

1680년에 허견 등이 복선군을 추대하려던 음모가 발각되자 남인들을 축출하고 서인들을 등용시켰다.

당시 서인의 김석주가 떳떳하지 못한 수법으로 남인의 박멸을 기도하자, 그 방법이 졸렬하다 하여

같은 서인의 소장파에서 이를 비난을 받았으며, 1683년에 서인이 노소론으로 분열하게 되었다.

 

인현왕후를 중심으로 하는 서인과 희빈 장씨를 중심으로 하는 남인이 대립하였다.

숙종은 용모가 출중한 숙원 장씨를 총애하여, 1688년 소의로 승격시켰다.

이때 아이가 없는 인현왕후가 후궁인 희빈이 낳은 왕자 균의 원자 책봉 문제로 남인과 서인이 심하게 대립하였다(1689년).

결국 서인들이 유배되거나 죽임을 당하고, 인현왕후는 폐위되는 기사환국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희빈은 정비가 되고 그녀의 아들은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며 남인이 정권을 독점하게 되었다.

그러나 남인의 집권 기간도 오래 가지 않고, 후일 1694년 갑술환국이 일어나 정권이 다시 서인에게로 돌아갔다.

갑술환국으로 조정으로 돌아온 서인들은 폐비 민씨에 대한 대우개선을 요구했고,

숙중은 이를 받아들여 폐비 민씨를 창덕궁 경복당으로 맞아들인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돌연 민씨의 왕비 복위가 선포되고 당시 중궁이었던 장씨는

다시 희빈으로 강등되어 처소도 후궁 시절에 쓰던 창경궁 취선당으로 옮기게 된다.

이후 인현왕후는 1701년, 복위된 지 7년여 만에 숨을 거두었다.

인현왕후는 사망 직전 장씨가 다시 중궁에 복위되는 것에 경계심을 나타냈는데, 실제로 인현왕후 사망 이후

숙종은 장씨가 궁중에 무당을 불러들여 왕비인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이유로 그녀를 사사시킨다.

 

이후 차츰 정계는 안정되어 소론이 우세한 집권 체제로 확정되었으나 1717년 유계의 ‘가례원류’가 간행될 때

정호가 소론 윤증을 공격한 내용의 발문으로 노론·소론 간의 당쟁이 격화되자

그가 노론을 지지함으로써 이후 노론이 중용되었다.

 

이와 같이 숙종은 크고 작은 당파 싸움으로 약해진 왕권을 회복하고 세력이 강한 붕당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집권 정당을 수시로 교체시키는 환국을 실행하였다.

그 때문에 흔히 숙종의 치세를 일컬어 “환국정치”라고 일컫는다.

그도 그럴 것이 숙종의 재위 기간에서만 정계가 한없이 치열하여 무려 3번의 환국이 있었기 때문이다.

숙종은 환국으로 정권을 교체하는 방법으로 붕당 내의 대립을 촉발시켜

신하들 간의 정쟁이 격화될수록 그와 동시에 왕권을 강화시켜 임금에 대한 충성심을 유도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환국정치를 통해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민생 안정과 경제 발전에 상당한 업적을 남겼다.

 

숙종은 우선 광해군 이후 꾸준히 확대되어 오던 대동법을 평안도,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에서 실시하게 되었으며, 토지개혁을 추진하여 종결시켰다.

그리고 이때부터 상업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상평통보를 만들어 널리 사용하도록 장려했다.

그리하여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혼란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사회를 전반적으로 수습하고

정비를 하여 안정기를 구가하는 치적을 남겼다.

 

<외교>

또 청나라와 국경 분쟁이 일어나자 청나라와 협상하여 1712년 함경감사 이선부로 하여금

백두산 정상에 정계비를 세워 영토의 경계선을 확정하기도 했으며,

폐한지로 버려 둔 압록강변에 무창, 자성의 2진을 신설하였다.

그리고 일본에 파견한 통신사로 하여금 에도 막부 정권과 협상하여 일본인들의 독도 출입 금지를 보장받았다.

또한 조선 통신사를 세 차례나 파견(하여 왜은 사용 조례를 확정함으로써 왜관 무역을 정비시켰다.

 

<붕당과 왕권 강화>

숙종 즉위 초에 집권한 남인은 허적, 윤휴 등 이른바 온건한 탁남이 주동이 되어 북벌론을 다시 제기하였다.

이를 위해서 ‘도체찰사’라는 새로운 군정기관을 부활시키고, 그 본진으로서 개성 부근의 대흥산성(1676년)을 축조했으며,

한꺼번에 1만8천여 명의 무과 합격자를 뽑아 군사훈련을 강화하는 등 군비 확장에 박차를 가했다.

평안도 용강의 황룡산성과 강화도의 48개 돈대(망루)도 이 무렵에 축조되었다.

이 같은 북벌 계획의 재등장은 마침 1674년(숙종 원년) 청나라에서 오삼계의 반란이 일어나

청나라가 어려운 처지에 빠진 것이 계기가 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남인 정권의 권력기반을 안정시키려는 뜻도 있었다.

 

그러나 수세에 몰렸던 서인은 1680년(숙종 6년) 남인 영수 허적이 대흥산성의 군인을 동원해

역모를 꾸몄다고 고발하여, 허적, 윤휴 등을 사형시키고 나머지 남인들도 축출했다.

이 사건을 ‘경신환국’이라 한다.

이 무렵 서인은 자체 분열을 일으켜 송시열을 영수로 하는 노론과 윤증을 중심으로 하는 소론으로 갈라졌다(1683년).

노론은 대의명분을 존중하고, 내수외양, 즉 민생안정과 자치자강을 강조하였으며,

소론은 실리를 중시하고 적극적인 북방개척을 주장한 점에서 정책적 차이가 있었다.

왕은 양파를 연립시켰으나 권력의 핵심을 장악한 것은 노론으로서,

송시열과 삼척으로 불리던 왕실의 외척, 즉 김석주, 김만기, 민정중이 연합하여 정치를 주도했다.

 

<통상 정책>

서인 정권은 남인이 장악했던 훈련별대를 정초군과 통합하여 금위영으로 발족시켜(1682년) 5군영제를 완성시켰다.

병권은 대체로 왕이 신임하는 종척들이 장악하여 실제로는 왕이 군대 통수권을 장악한 셈이었다.

정부는 민생 향상과 산업 진흥을 위해 양인의 군포를 감해 주고(1703년),

화폐 주조(상평통보)와 화폐 유통을 장려하여 상업을 진흥시켰다.

각 부대도 화폐를 주조하고 상업 행위를 하여 점차 영리기관으로 변질되었다.

이 시기에 농촌에서는 미륵신앙을 가진 하층민들의 반란이 일어나고,

도시에서는 노비들이 주축이 된 검계, 살주계 등 비밀결사의 저항운동이 일어났으며,

자연재해까지 겹쳐 사회가 매우 불안했다.

 

9년간 집권한 노론은 1689년(숙종 15년)에 남인계 출신의 후궁인 장희빈이 낳은 왕자(=경종)가

세자로 책봉되는 과정에서 몰락하고 남인이 다시 집권했다.

그동안 노론의 핵심인물이었던 송시열, 김수항 등이 보복을 받아 처형당하였다.

이 사건을 ‘기사환국’이라 한다.

 

남인 집권기에는 청나라의 내란과 관련하여 강화도에 성을 쌓고, 맞은편의 통진에도

문수산성을 쌓는 등(1694년) 수도방위를 강화하였다.

‘기사환국’으로 집권한 남인도 1694년(숙종 20년)에 왕이 마음을 바꾸어 폐위된 민비(인현왕후)를 복위시키고,

남인과 연결된 장희빈을 사사하게 되자 5년 만에 다시 밀려나게 되고 노론과 소론이 재집권했다.

이 사건을 ‘갑술환국’이라 하는데, 이때부터 남인은 거의 재기불능의 상태로까지 전락하고 말았다.

노론과 소론은 서얼, 역관, 무인, 상인 그리고 노비층과도 연결하여 남인 측을 몰아내는 데 필요한 거사 자금과 힘을 빌렸다.

 

1694년(숙종 20년)부터 26년간은 전 세계적으로도 소빙기로 불리는 냉해가 계속되었는데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리하여 잇단 흉년과 홍수, 질병으로 인구는 오히려 감소되어 1693년에서 6년사이에 약 142만 명의 인구 감소했다.

더욱이 1697년(숙종 23년)에는 10여 년 전부터 황해도 구월산을 무대로 활약해 오던

장길산 농민군의 세력이 더욱 커져서 서북지방이 매우 어수선했고,

서울에서는 중인 및 서얼들이 장길산 부대와 연결하여 새 왕조를 세우려다 발각되는 일까지 일어났다.

 

한편, 수군 출신의 안용복이 울릉도와 우산도(독도)에 출몰하는 왜인을 쫓아내고

일본 당국과 담판하여 우리의 영토임을 천명하고, 일본은 이를 인정했다.(숙종 22년).

안용복 사건을 계기로 조선 정부는 일본 막부와 울릉도 귀속문제를 확정하고,

적극적으로 해방정책을 강화하면서 울릉도 경영에 나섰다.

울릉도 지도가 활발하게 제작된 것도 이 무렵이다.

 

한편, 숙종 31년에는 노론의 주장에 따라 임진왜란 때 우리를 도와 준 명나라의 은혜를 잊지 않고,

또 우리가 명의 유교문화를 계승한 유일한 문명국가임을 확인하기 위하여 명의 태조와 임진왜란 때

우리를 도와 준 신종을 제사하는 대보단을 창덕궁 안에 설치하였다.

그리고 이순신 사당에 ‘현충’이라는 호를 내리고(1707년), 의주에 강감찬 사당을

건립하여(1709년) 국민의 애국심을 고취시켰다.

또한 숙종 말년에는 남구만의 노력에 의해 세종 때 설치했다가 폐지한 ‘폐사군’의 일부를

복설하여 압록강 연안이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강화도의 농지를 대대적으로 개간하고, 강화도 내성, 북한산성, 평양성, 안주성 등이

잇따라 축조되어 방위체제가 훨씬 강화되었다.

 

숙종 말년에는 삼남지방에서 양전 사업이 완료되어 총 66만 7,800결을 얻고, 전국의 인구는 680만 명으로 늘어났다.

숙종 때에는 문화 사업 면에서도 중요한 성과가 나타났다.

'대전속록', '열조수교' 등을 비롯하여 각종 국가 통치 질서를 강화하기 위한 편찬 사업이 활기를 띠었다.

 

숙종 시대는 조선 왕조가 전란의 피해 복구와 국가 재정비 사업이 일단 마무리되어 중흥의 기틀이 다져진 시기로 볼 수 있다.

 

<장희빈 사사 전후>

한편 인현왕후는 장희빈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숙종실록' 27년 9월 23일자는 왕비 민씨가 친정붙이 민진후 형제에게 “지금 나의 병 증세가 지극히 이상한데,

사람들이 모두 ‘반드시 빌미가 있다’고 한다”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

‘빌미’란 장씨의 저주로 병에 걸렸다는 뜻이었다.

'숙종실록'은 또 “숙빈 최씨(영조의 생모)가 임금에게 몰래 장씨의 저주를 고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숙종은 장씨의 오빠 장희재와 장씨의 친신 궁녀 영숙을 처형시킴으로써 저주설에 손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인현왕후가 34세의 나이로 죽자 그는 장희빈의 사사를 결심한다.

숙빈 최씨가, 희빈 장씨가 자신을 투기, 괴롭힌다는 호소 역시 장희빈 사사의 마음을 더욱 굳히게 했다.

 

장씨가 죽던 날 열네 살의 세자(=경종)가 대신들에게 어머니를 살려달라고 빌자

소론 영의정 최석정은 “신이 감히 죽기로 저하의 은혜를 갚지 않으리까”라고 답했으나

노론 좌의정 이세백은 옷자락을 붙잡고 매달리는 세자를 외면했다는 기록은

장씨 사사가 세자를 위한 것이란 명분이 근거 없음을 말해준다.

장희빈의 사사는 곧바로 세자를 정쟁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노론은 세자가 즉위할 경우 연산군처럼 모친의 복수에 나설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인은 완전히 몰락한 가운데 소론은 세자를 지지하고, 노론은 세자 대신 숙빈 최씨의 아들 연잉군을 지지했다.

누가 승리하느냐의 관건은 그간 각 당파를 분열시켜 서로 살육하게 함으로써 왕권을 강화시킨 숙종이 쥐고 있었다.

 

재위 39년(1713)년 노론은 즉위 40주년을 기념해 존호를 올리겠다고 주청하고 숙종은 사양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영의정 이유는 백관을 거느리고 연일 대궐 뜰에 모여 정청을 열었다. 이 문제로 국정이 거의 마비된 후

숙종은 못 이기는 척 수락했고, 그해 3월 장엄한 의식을 거쳐 ‘현의, 광륜, 예성, 영렬’이란 존호를 받았다.

노론이 숙종에게 이르는것은 장희빈 소생의 세자를 최씨 소생의 연잉군으로 대체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이이명과 독대>

1717년 숙종은 사관, 승지를 배제한 채 노론 영수인 좌의정 이이명과 '정유독대'를 실시했다.

이때 숙종은 이이명에게 연잉군과 연령군을 부탁한다는 청을 하였는데,

사관을 들이지 못하게 한 이 독대 사건은 후일 신임옥사 때 이이명의 발목을 잡는다.

독대 직후 숙종은 느닷없이 세자의 대리청정을 명령했는데, 당의통략은 “(노론이) 세자의

대리청정을 찬성한 것은 장차 이를 구실로 넘어뜨리려고 하는 것”이라고 적고 있다.

와병 중이었던 소론 영중추부사 윤지완은 82세의 노구였으나 관을 들고 상경해 군신 독대를 격렬하게 비난했다.

“독대는 상하가 서로 잘못한 일입니다. 전하께서는 어찌 상국(정승)을 사인으로 삼을 수 있으며

대신 또한 어떻게 여러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지위로서 임금의 사신(私臣)이 될 수 있습니까?”

숙종의 연잉군 추대 기도는 소론과 남인의 강경한 반대로 무산된다.

 

그밖에, 숙종은 외롭게 죽은 단종과 정순왕후를 복위시키고, 사육신의 명예도 회복시켜 주었으며,

폐서인되었던 인조 적장남 소현세자의 아내인 소현세자빈 강씨를 민회빈으로 복위시켰다.

종래 4영이던 군제에 금위영을 만들어 5영을 완성하였고, ‘선원록’, ‘대명집례’ 등의 간행과 ‘대전속록’,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귀중한 책이 편찬되었다. 또 쟁쟁한 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어 조선 후기 성리학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1718년 왕세자에게 대리청정케 했다.

불안한 세자 대리청정이 유지되는 가운데 1720년 병환이 위독해지자 이이명을 불러

사관의 입회 없이 연잉군 금을 경종의 후계자로 삼도록 하라는 유언을 남긴 뒤 사망했다.

이 유언은 신임사화의 화근이 되었다.

능은 서오릉 중 하나인 명릉으로 인현왕후 민씨의 무덤 언덕 옆에 함께 잠들어 있다.

 

* 부 : 제 18대 현종      * 모 : 명성왕후 김씨

   * 원비 : 인경왕후 김씨      * 딸 : 공주<조졸> / 공주<조졸>

   * 1계비 : 인현왕후 민씨     * 양자 : 20대 경종 윤

   * 2계비 : 인원왕후 김씨      * 양자 : 21대 영조 (연잉군 금)

   * 후궁 : 옥산부대빈 장씨(=장희빈)      * 장남 : 20대 경종 윤

   * 후궁 : 화경숙빈 최씨      * 아들 : 영수(조졸)/ 21대 영조 (연잉군 금) / 왕자(조졸)

   * 후궁 : 명빈 박씨      * 아들 : 연령군 훤

   * 후궁 : 영빈 안동김씨 / 귀인 경주김씨 / 소의 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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