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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11대 중종 = 휘는 역, 자는 낙천 (재위 1506년~1544년)

성종과 정현왕후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복 형인 연산군은 폐비 윤씨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정현왕후를

친어머니로 여기면서 자라다가 우연한 기회에 폐비 윤씨의 일을 알게 되었다.

정현왕후와의 관계는 소원해졌지만 연산군은 어린 이복동생에게는 친절하였다.

그뒤 진성대군은 신수근의 딸과 가례를 올린다.

신수근의 아버지는 영의정 신승선으로 연산군의 비 신씨의 친정아버지이기도 했다.

친가로는 이복 형제였지만, 처가로는 처고모부와 조카사위의 관계가 되었다.

 

1494년에 진성대군으로 봉해졌다가 1506년에 음력 9월 2일 연산군의 폭정에 반발한

성희안, 박원종, 유순정 등이 일으킨 중종반정이 성공함에 따라 조선의 새 임금으로 추대되었다.

당시 진성대군은 자신을 국왕으로 세우기 위해서 온 반정군을 적으로 여겼을 정도로 정치에 큰 관심이 없었다.

 

반정군에 의해 추대 제의를 여러 번 받을 때부터 그는 신하가 임금을 택한다는 것에 부정적인 시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공신들의 세력은 막강하였고 중종반정으로 추대된 이후 이를 타개할 대안을 마련하는데 절치부심하게 된다.

 

<즉위 초반>

하지만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반정세력의 정치적 의도로 국왕으로 등극한 중종은

혁명을 일으킨 공신들의 세력에 밀려 실질적인 권력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한 나약한 국왕이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연산군의 폭정으로 말미암아 문란해진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고자

연산군이 폐지시켰던 모든 법제를 복귀시켰으며, 국왕의 자문을 담당하는 기관인 홍문관의 기능을

대폭 강화하고 신하들의 월과 춘추과시, 사가독서 등을 시행했다.

또한 왕도정치를 앞세워 공신들의 세력 팽창을 억누르려고 했으나 공신들의 힘이 너무나 막강하여 성공하지 못했다.

박원종, 홍경주 등의 공신 세력의 권력이 강화되고 왕 이상의 권한을 행사하려 하자

그는 사림 세력을 다시 등용하기로 결심한다.

 

<사림의 등용과 개혁 정치>

중종은 조광조 등 갑자사화로 밀려났던 사림파를 중심으로 현량과를 실시하는 등

철저한 유교적 개혁 정치를 행하여 문벌세가를 누르고자 하였다.

그러나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과격한 조광조의 개혁 정책은 보수적인 기득권층인 훈구 세력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켰을 뿐 아니라 그를 절대적으로 신임하고 지지하던 중종마저도 싫증을 내게 된다.

특히 조광조의 반정 공신 명부 정리 작업(공신 명부에 올라온 공신들이 진짜 공을 세웠는지를 확인하는 작업)으로

다수의 공신들이 명단에서 이름이 삭제되는 일이 벌어지자 훈구파들의 위기감은 극에 달한다.

 

※ 훈구파 ; 세조의 왕위 찬탈에 협조하여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귀족적 관료학자.

※ 권신 ; 고려의 개국공신

※ 척신 ; 외척의 별칭

※ 사림파 ; 전원의 산림(山林)에서 유학을 공부하던 문인, 학자로서 15세기 이후 조선 중기 중앙 정계를 주도한 정치집단.

 

<조광조와의 갈등>

중종 반정 이후 비대해진 훈구파 권신들과 척신들의 전횡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중종은

보다 강력한 왕권을 확립할수 있는 왕권강화를 원했다.

그러나 조광조는 도학 정치 실현이 목적으로서 목적이 달랐다.

조광조는 도학정치가 펴지길 꿈꿨고 중종은 힘센 군주가 되길 갈망한 것이다.

중종은 사림파 역시 하나의 비대해진 새로운 기득권층으로 해석하여 강력한 왕권의 걸림돌로 인식한다.

일설에는 주초위왕 나뭇잎 모함 공작이 중종의 지령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개혁의 폐지>

중종 임금에게 한 궁녀가 궁궐의 나뭇잎 하나를 가져다 바친다. 벌레가 갉아먹은 자리를 따라 나뭇잎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주초위왕(走肖爲王)> , 조씨(走+肖=趙)가 왕이 된다는 글이다. "조광조의 역심을 하늘이 알려준 것이옵니다."

반정으로 등극한 중종은 자신 역시 쿠데타로 축출될수 있다는 생각을 하여,

이복 형제들, 성종의 다른 왕자군이나 기타 왕족들을 불신하고 경계했다.

중종은 조광조를 의심하나, 나뭇잎의 글씨는 궁녀가 과일즙을 발라놓은 자리를 개미들이 파먹은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날 밤, 홍경주와 남곤, 심정 등은 은밀히 입궐해 중종을 만나 주청한다.

"조광조가 붕당을 만들어 국정을 어지럽히고 있사오니 이들을 처단해야 합니다."

중종은 조광조, 김식, 김구 등 사림파를 투옥시킨다.

결국 중종은 1519년 남곤 및 심정, 홍경주와 계획해서 조광조를 비롯한 다수의 사림들을 실각시켰고,

의심 많은 왕 중종은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려 죽음을 당하게 된다(기묘사화).

연산군이 갑자사화를 일으켰다는 명분으로 역모를 꾀하여 왕이 된 중종이 기묘사화를 일으켰다.

 

<외척 세력의 등용>

조광조를 비롯한 급진적인 사림파들이 몰락한 뒤 견제 세력이 없어지자 다시 공신들의 세력이 부활할 조짐을 보였다.

중종은 공신들의 권력집중을 차단할 목적으로 외척인 윤여필, 윤여해, 윤지임, 김안로 등을 등용한다.

 

처음에는 이들에게 내섬서와 장악원 등의 제조 직을 제수했다가 훈련대장 등을 제수하여 도성의 숙위를 맡겼고,

이후 이들의 자녀들이자 자신의 처남격인 윤임, 윤원로, 윤원형 등이 출사하게 된다.

그러나 외척 세력은 또다른 세력을 형성하여 정쟁의 소용돌이를 만들게 된다.

 

<외척의 전횡>

그 다음에는 외척 세력이 새로이 등장하여 중종의 치세 중기와 후기에는 외척 세력과 반정 공신들 간의

정권 다툼으로 인해 크고 작은 사건이 연달아 일어나 정국이 편안할 날이 없었다.

1531년에는 기묘사화 후 집권했던 심정, 이항, 김극복 등이 화를 당했고,

1537년에는 심정 일파를 모함한 김안로, 허항, 채무택 등이 주찬되는 등 재위 동안에 화옥이 그치지 않았다.

 

정국이 불안해지자 그 동안 잠잠하던 남쪽의 왜구들이 삼포왜란을 일으켜 경상도 해안 일대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또 북쪽에서는 여진족이 4군 6진 지역을 빈번하게 노략질하는 등 오랑캐들의 약탈이 끊임없이 발생하자

중종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서 비변사를 설치하였다.

그밖에 ‘속삼강행실도’,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다방면에 걸친 책들이 편찬, 간행되었으나

기묘사화 이후로는 문화 발전 정책이 거의 정지되었다.

 

자신의 의견보다는 신하들의 의견을 수용하고, 대간들의 비판에 대해서도 불만을 드러내지 않는 등

평소에는 정국에 대해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권신들에 대한 처분을 내릴 때는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자신이 주도적으로 이끌어나가는 이중적인 면모를 보였다.

자신은 검소하게 생활하였지만, 자식, 종친들이나 신하들의 사치를 막지 못했고,

학풍이 땅에 떨어진 상황을 걱정하면서도 선비들을 죽이는 사화를 주도한 왕이기도 했었다.

중종은 왕조와 자신에게 주어진 왕좌를 신권의 지나친 비대화로부터 지키기 위해 노력하기만 했었던 임금이었다.

 

* 조부 : 추존왕 덕종(의경세자)      * 조모 : 소혜왕후 한씨(인수대비)

   * 부 : 조선 제 9대 성종      * 모 : 정현왕후 윤씨

      * 원비 : 단경왕후 신씨

      * 계비 : 장경왕후 윤씨      * 딸 : 효혜공주      * 아들 : 왕세자 호(=12대 인종)

      * 계비 : 문정왕후 윤씨      * 딸 : 의혜공주 / 효순공주 / 경현공주 / 인순공주 (요절)

         * 아들 : 경원대군 환(=13대 명종)

      * 후궁 : 경빈 박씨      * 아들 : 복성군 미      * 딸 : 혜순옹주 / 혜정옹주

      * 후궁 : 희빈 홍씨      * 아들 : 금원군 영 / 봉성군 완

      * 후궁 : 창빈 안씨      * 아들 : 영양군 거 / 덕흥대원군 초      * 딸 : 정신옹주

      * 후궁 : 귀인 한씨      * 아들 : 왕자 (요절)

      * 후궁 : 숙의 홍씨      * 아들 : 해안군 희

      * 후궁 : 숙의 이씨      * 아들 : 덕양군 기

      * 후궁 : 숙의 나씨

      * 후궁 : 숙원 이씨      * 딸 : 정순옹주 / 효정옹주

      * 후궁 : 숙원 김씨      * 딸 : 숙정옹주

 

 

조선 12대 인종 = 휘는 호, 자는 천윤 (재위 재위 1544년~1545년)

인종은 1520년(중종 15년) 세자로 책봉되었다.

1522년에 성균관에 들어가 유신들과 옛 글을 강론했다.

형제간의 우애가 두터웠으며, 중종이 병이 들자 침식을 잊고 간병에 정성을 다했다.

1544년 11월에 즉위했으나 병으로 제대로 정사를 살피지 못했다.

1545년 기묘사화 때 희생된 조광조, 김정, 기준 등을 신원하고 현량과를 다시 설치했다.

왕위에 오른 지 8개월 만에 승하했다.

능은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효릉이다.

 

* 부 : 11대 중종      * 모 : 장경왕후

   * 왕비 : 인성왕후 박씨

   * 후궁 : 숙빈 윤씨 : 윤원량의 딸, 윤원형, 윤원로, 문정왕후의 조카

   * 후궁 : 혜빈 정씨 : 정온의 딸

   * 후궁 : 귀인 정씨 : 정유침의 딸, 정철의 누이

   * 후궁 : 양제 윤씨 : 윤개의 딸

 

 

조선 13대 명종 = 휘는 환, 자는 대양 (재위1545~1567 )

<즉위와 을사사화>

명종은 중종의 둘째 아들이며, 인종의 이복 동생이다. 어머니는 중종의 2번째 비(妃)인 문정왕후이고,

비는 청릉부원군 심강의 딸인 인순왕후이다.

 

성종 때 싹튼 훈구파와 사림파 사이의 대립은 연산군 대의 무오사화, 갑자사화,

중종대의 기묘사화로 나타나면서 단순한 훈구파와 사림파 사이의 대립 차원을 넘어

양반관료층의 분열과 권력투쟁으로 발전해가고 있었다.

명종의 즉위는 이러한 정치적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다.

 

중종의 첫 번째 비인 장경왕후 윤씨 소생의 세자 호(=인종)를 왕위에 앉히려는

외척 윤임 일파의 대윤과, 문정왕후 소생의 세자 환을 즉위시키려는 윤원형 일파의

소윤 사이에서 왕위계승을 둘러싼 암투는 중종 말년부터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1544년 인종의 즉위를 계기로 윤임 일파가 권력을 장악하자 이언적 등 사림들이 정권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1545년 인종이 병으로 죽고, 명종이 12세의 나이로 즉위하여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윤원형 일파의 소윤이 권력을 장악하여 대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했다.

숙청은 윤임이 중종의 여덟째 아들인 봉성군을 왕으로 삼으려 한다는 윤원형의 탄핵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문정왕후는 윤임, 유관 등을 사사케 하고 봉성군, 이언적, 노수신 등을 유배시켰다.

그뒤에도 반대파에 대한 숙청이 계속되어 을사사화 이래 6년 동안 100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죽었다.

 

<을묘왜변과 비변사의 상설기구화>

1555년 세견선(歲遣船)의 감소로 곤란을 겪어온 왜인들이 전라도 지방을 침입한 을묘왜변이 일어났다.

이에 1510년(중종 10) 삼포왜란 때 설치되어 임시기구로 존속해오던 군사기관인 비변사가

상설기구로 되어, 청사가 새로 마련되고 관제상으로도 정1품 아문의 정식아문이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비변사는 군사문제를 총괄하는 관청으로서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비변사 기능의 강화는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전쟁수행을 위한 최고기관으로서 정치, 경제, 군사,

외교 등 군국사무 전반을 처리하면서 이루어졌으며, 이러한 최고권력기관으로서의 역할은 조선 후기까지 지속되었다.

 

<왕권강화의 시도>

1553년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두고 친정을 하게 된 명종은 문정왕후와 윤원형을 견제하고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이량을 이조판서, 그 아들 이정빈을 이조전랑으로 기용했다.

그러나 이량 등은 왕의 신임을 믿고 파벌을 형성하여 횡렴을 일삼았으며 사림 출신의 관료들을 외직으로 추방했다.

이에 사림들이 반발하자 이량은 사화를 꾀했으나 심의겸에게 탄핵당하여 1563년 숙청되었다.

 

결국 1565년 문정왕후가 죽기까지 20년 동안 명종은 자신의 세력기반을 지니지 못한 채

문정왕후와 윤원형의 전횡 속에서 왕위를 지킬 수밖에 없었다.

문정왕후가 죽은 뒤 윤원형과 보우를 내쫓고 인재를 고루 등용하여 정치를 하려고 노력했으나,

1567년 34세의 나이로 죽었다.

인순왕후와의 사이에 낳은 순회세자가 일찍 죽어, 왕위는 중종의 9번째 아들인 덕흥부원군 셋째 아들 선조가 계승했다.

 

<최후>

병약한 명종은 후사도 없이 임종을 목전에 두었는데, 이준경은 덕흥군의 셋째 아들인 하성군 균을 왕재로 보았다.

그러나 외척인 좌의정 심통원은 다른 뜻을 품고 있어 동의할 낌새가 없었다.

그러자 이준경이 심통원에게 일렀다.

"태의가 전하를 진맥해 본 결과 아무 약이 효험이 있다고 하니 좌상께서 내의원 별당으로 가서

그 약을 좀 가져오시지요." 심통원은 수하에게 영상의 명을 대행하게 했다.

그러자 이준경은 눈을 부릅뜨고 심통원을 꾸짖었다. "전하의 환우가 심히 불안한 지경인데

상감께 올릴 약을 어찌 아랫사람에게 시킨단 말이오!"

심통원은 얼른 사과하고는 손수 내의원 별당 다락으로 올라가 약을 찾았다.

그때 이준경은 다락으로 통하는 문을 잠궈버렸다.

그리고 다급히 명종을 배알하고는 후사를 지명할 것을 주청했다.

"아직 나라의 근본이 정해지지 않았으니 하교해 주시기 바랍니다." 숨이 턱에 받친 명종이 간신히

입을 열어 "덕흥군 제삼자"라고 말하니 이준경이 뒤를 돌아보고는 큰 소리로 따라 외쳤다.

주서 황대수가 큰 글자로 받아 적어 등에 지고 나갔고, 이로서 하성군이 왕업을 물려받으니

그가 바로 선조였다.

이를 듣게 된 선조는 대비인 인순왕후의 일족에게 감정을 품게 된다.

 

* 부 : 11대 중종      * 모 : 문정왕후 윤씨

   * 왕비 : 인순왕후 심씨

      * 아들 : 순회세자 부      * 며느리 : 공회빈 윤씨

      * 양자 : 14대 선조 연

   * 후궁 : 경빈 이씨 / 순빈 이씨 / 숙의 한씨 / 숙의 이씨 / 숙의 신씨

   * 후궁 : 숙의 정씨(정귀붕의 딸) / 숙의 정씨(정수의 딸) / 숙의 신씨(신언숙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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