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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14대 선조 = 연 (재위 1567년~1608년)

<잠저 시절>

선조는 1552년 음력 11월 11일 중종의 서자 덕흥대원군 초와 하동부대부인의 셋째 아들로 한성 인달방 도정궁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이균에서 이연으로 바꾸었다. 하성군에 봉해졌다가 순회세자 요절 후 명종의 총애를 받았고, 곧 후사로 낙점된다.

 

1567년 명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명종이 1565년(명종 20년)에 병석에서 밝힌 바에 따라 16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여기에 따라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는데, 하성군이 왕이 된 이유가 담겨있다.

어느날, 명종이 덕흥대원군의 아들들을 불러 익선관을 써보라 하였다.

두 형(하원군, 하릉군)들은 별 말 없이 익선관을 썼지만, 하성군은 현직 왕이 쓰는 것을

함부로 쓸 수 없다하여 명종의 마음에 들었다 전해진다.

선조의 즉위는 후궁에게서 태어난 서자 출신이 즉위한 첫 사례다.

그러나 아버지 덕흥대원군이 서자라는 점은 평생 그를 따라다니며 일종의 콤플렉스로 작용하게 된다.

 

<친정>

선조는 생부와 생모를 1569년(선조 2)에 송나라 영종의 생부 복왕을 추존하는 고사를 따라

생부 덕흥군을 추숭하여 덕흥대원군으로 하고, 생모 하동군부인은 하동부대부인으로 추존하였다.

그러나 즉위 초반 그는 아버지 덕흥대원군을 다시 왕으로 추존하려 하였으나, 중국 송나라의

복안의왕과 안희수왕, 중국 전한의 정도공왕에 대한 고사를 들어 반대에 부딪혀 성사시키지 못했다.

 

즉위 직후부터 인순왕후의 수렴청정이 있었으나, 그는 사림 인사들을 대대적으로 등용하고

그들을 통해 친정을 유도하게 했고, 인순왕후는 곧 일선에서 물러난다.

인순왕후의 퇴진 직후 이이 등이 부패한 재상 심통원을 탄핵하자 바로 숙청했다.

이는 심통원이 자신의 즉위를 반대한데 대한 감정도 작용했다.

이어 김효원 일파가 심의겸을 공격하자 심의겸을 외직으로 축출해버린다.

대비의 친정 일족을 제거한 소년왕의 면모에, 즉위 초 어린 왕이라고 무시하던 신하들은 경악한다.

 

<사림정치의 확립>

선조가 즉위할 무렵은 성종 때부터 중앙정치에 진출하기 시작한 사림이 정계를 주도할 수 있을 만큼 성장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선조는 주자학을 장려하고 사림을 널리 등용했으며,

스스로 학문에 힘써 강연에서 이황, 이이, 성혼 등 대유학자들과 경사를 토론했다.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한 조광조를 비롯한 여러 사림을 신원하고 을사사화로 귀양가 있던

노수신, 유희춘 등을 석방하여 기용하는 한편, 훈신세력인 남곤, ·윤원 등의 관작을 추탈하거나 삭훈했다.

또한 현량과를 다시 설치하고, 유일을 천거하도록 하여 조식, 성운 등을 등용했다.

이황에 대한 신뢰와 함께 그가 죽자 이이를 신임하였는데, 이이에 대한 신임은 그가 죽을때까지 계속된다.

 

또한 어린시절부터 학문적 소양이 있었던 그는 유교사상 확립을 위해 명유들의 저술과 경서의 간행에 힘써

1575년 ‘주자대전’의 교정본을 간행하고 1585년에는 교정청을 설치해 경서의 훈해를 교정하게 했다.

1588년 사서삼경의 음석언해를 완성하고 ‘소학언해’를 간행했다.

 

한편 조선초부터 명나라와의 외교문제가 되고 있던, 즉 명나라의 ‘태조실록’, ‘대명회전’ 등에 이성계가

고려의 권신 이인임의 아들과 함께 4명의 왕을 살해했다고 되어 있는 것을 고치기 위해 주청사를 거듭 파견했다.

그리하여 1584년 황정욱이 중찬된 ‘대명회전’의 수정된 조선관계 기록의 등본을 가져옴으로써 종계변무의 목적을 달성했고,

1589년 성절사 윤근수가 ‘대명회전’ 전질을 받아옴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했다.

 

<동서분당과 붕당정치의 성립>

선조의 즉위를 계기로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한 사림은 척신정치하에서 성장한

구세력의 제거를 둘러싸고 전배와 후배가 대립하게 되었다.

전배는 소윤세력이 우세하던 상황에서 심의겸의 도움으로 정계에 진출한 인물들로서

심의겸을 척신이지만 사림의 동조자로 받아들인 데 반해, 소윤세력의 몰락 이후에 정계에 진출한

후배들은 심의겸을 포함한 구세력의 제거를 주장했다.

 

1575년 전배는 심의겸을 중심으로 하는 서인이, 후배는 김효원을 중심으로 하는 동인이 되었다.

서인의 주요인물은 박순, 정철, 윤두수 등이고 동인의 주요인물은 류성룡, 이산해 등이었으며,

각각 이이와 이황의 학문에 영향을 받고 있었으므로 학풍, 학연을 배경으로 한 대립의 양상도 띠었다.

 

1589년 정여립의 역모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기축옥사를 통해 서인세력은 동인세력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1591년에는 건저 문제로 정철이 파면되면서 동인이 집권하게 되었으나, 정철의 처벌을 둘러싸고

온건파는 남인으로, 강경파는 북인으로 다시 나누어졌다.

 

이발, 정인홍 등이 우성전의 축첩을 문제 삼은 것 역시 동인 강경파들의 온건파에 대한 의심과 불신의 한 원인이 되었다.

우성전은 여러 명의 첩을 두었는데 이 점이 일부 동인 소장파들에 의해 의혹으로 제기되었다.

 

동인의 분당에는 우성전의 기생에 대한 파격적인 총애 역시 작용했다.

우성전이 문제가 되었을 때도 동인들은 이이를 의심했다. 우성전은 당시 동인들이 떠받들던 인물이었다.

그는 학문적 소양도 폭넓었고 지략이 남달랐으며, 경세에 대한 관점이 뚜렷하였다.

동인들이 평소 "우성전이 대신이 된다면 만백성이 잘살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동인들이 떠받드는 새로운 지도자였다.

이런 우성전에게도 한 가지 흠이 있었는데, 기생 한 명을 지나치게 좋아한 것이었다.

심지어 우성전의 부모상 때에도 이 기생이 상례에 어긋나게 머리를 풀고 우성전의 집에 출입할 정도였다.

선조는 우성전의 상중에 기생이 출입한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드러내지 않았다.

 

<환국의 시초>

상중에 기생이 우성전의 집에 출입하는 것을 보고 해괴하게 여긴 인물은 동인 이발이었다.

이발은 장령으로 있던 정인홍에게 우성전의 부모상에 기생이 출입하더라고는 사실을 이야기하였다.

훗날 대북의 영수가 되는 정인홍은 재야에 오래 있던 사람으로서 자신의 깨끗한 처신을 자랑삼아 온 인물이었다.

그는 예에 어긋난 이러한 일을 두고 볼 수 없다면서 앞장서서 우성전을 공격했다.

 

정인홍이 우성전을 탄핵한 것은 이처럼 동인인 이발의 토로에 의한 것이었는데,

동인들은 이 것 역시 이이가 뒤에서 조종한 것이라고 이이를 의심하였다.

 

동인의 내분이 강화되자 선조는 남인의 손을 들어준다.

그뒤 선조 집권 후반의 정국은 류성룡을 중심으로 한 남인세력이 주도권을 행사하면서

이항복 등의 중도적인 서인세력을 포섭하는 가운데 전개되었다.

그러나 북인계열에서 곽재우, 정인홍 등의 의병장들이 쏟아져나옴으로서 전란 직후

북인에게 정권을 넘긴다.

선조대에는 집권당이 서인-동인-남인-서인-북인으로 집권세력을 교체하면서

왕권의 강화를 꾀했는데, 이는 후일 환국정치의 모범이 된다.

 

<임진왜란 초기>

1583년 니탕개를 중심으로 회령지방에 살던 여진족이 반란을 일으켜 경원부가 함락되자,

경기감사 정언신을 도순찰사로 하여 군대를 출동시켜 이를 진압했다.

또한 1587년에도 니응개가 이끄는 여진족이 대거 침입하자 조산만호 이순신과 경흥부사 이경록이 이를 격퇴했으며,

이듬해 북병사 이일을 시켜 두만강 건너에 있는 여진족 근거지를 소탕했다.

 

한편 선조는 1590년 황윤길, 김성일, 허성 등을 통신사로 파견하여 일본의 동태를 파악하도록 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전국 시대를 통일하고 자신의 천하 야욕을 이루기 위해

대륙침략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서인인 황윤길은 일본이 많은 병선을 준비하고 있어

멀지 않아 병화가 있을 것이라고 보고한 반면, 동인인 김성일은 침입할 조짐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보고했다.

대신들은 김성일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통신사와 함께 온 일본사신이 "1년 후에 조선의 길을 빌려서 명나라를 칠 것"이라고 통고하자

조선 정부는 크게 놀라 뒤늦게 경상도, 전라도 연안의 여러 성을 수축하고

각 진영의 무기를 정비하는 등 대비책을 마련했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어가 몽진>

1592년 4월 13일 일본군이 부산포에 상륙, 파죽지세로 북진해오자 조정은 보름 만에

한성을 버리고 개성으로 피난했으며, 이어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퇴각했다.

이곳에서 선조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평양에서 세자로 책봉한 광해군으로 하여금

분조를 설치하게 하는 한편, 명나라에 구원병 파견을 요청했다.

이에 명나라는 그해 12월 4만 5,000명의 군대를 파견했다.

 

이 사이 이순신, 권율 등이 이끄는 관군이 일본군과 싸워 승리를 거두고,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여 일본군을 격퇴했다.

이때 선조는 공사천무과와 참급무과를 실시하여 천인의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등 전국민적인 전쟁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힘썼다.

일본군이 1593년 4월 남쪽으로 퇴각하자 그해 10월 선조는 서울로 돌아왔다.

 

<이순신과 원균에 대한 관점>

1594년(선조 27년) 8월 선조는 유성룡과 왜란의 진행 상황을 논의하던 중, "이순신이 혹시 일에 게으른게 아닌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유성룡이 "이때까지 지탱한 것도 이순신의 공이고, 수륙의 모든 장수들 중 가장 우수합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선조는 유성룡이 이순신과 개인적으로 친하지 않느냐며 그의 답변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많은 학자들은 선조가 이후 이순신을 크게 의심하면서 원균을 특출한 용장으로 보기 시작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실제로 선조는 두 사람의 체직에 관한 전교를 내리면서 "군율을 범한 것은 이순신도 (역시) 같고,

오히려 그 죄가 원균보다 심하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개전 초기에 이순신은 기근과 전염병 등으로 병력이 고갈되자 그 대책으로 둔전 경영과

병력 징발 등에 주의를 기울여 일본 수군의 북상을 저지하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그러나 전쟁 초기부터 원균의 지원군 요청을 거절하다가 그와 갈등하게 된다.

 

하지만 이순신은 조선 수군의 총지휘자인데도 동료인 원균과의 갈등을 밖으로 드러냄으로써 선조의 의심을 샀다.

선조가 원균보다 이순신의 죄가 더 크다고 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동인이 집권하고 있던 당시의 상황을 감안할 때, 이순신은 여러 면에서 원균보다 유리한 입장이었다.

실제로 우의정 이원익은 체찰사로 있으면서 이순신과 수시로 만나 대책을 의논했다.

선조가 이원익이 이순신을 아주 호의적으로 평가했는데도 원균을 더 신임하는 듯한 발언을 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한편 선조는 원균이 동인 강경파 일부와 서인의 지지를 받는다는 점도 인식했다.

 

<원균 총애와 이순신에 대한 불신>

선조는 이순신과 원균 간 갈등에 관한 보고를 받고 곧 이순신을 수군통제사에 유임시킨 채

원균을 전라병사로 교체해 임명할 뜻을 밝혔다.

이는 그간 이순신이 세운 공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신료들 중에는 원균을 더 뛰어난 용장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정탁이 원균을 적극 옹호하면서 수사의 자리에서 체직시키지 말 것을 청했다.

결국 원균은 충청병사로 전임되었다.

 

그러나 충청병사로 부임한 원균은 1595년(선조 28년) 8월 사헌부에서 탐욕스럽고 포악하다는 등의 죄목으로 탄핵을 받았다.

이때 원균을 적극 옹호하고 나선 사람이 선조였다.

선조는 "원균은 분수를 알아 넘치지 않는다. 이런 때 명장을 이처럼 해서는 안된다."라며 반박했다.

심지어 선조는 사헌부가 계속 원균의 파직을 건의하고 나서자 크게 노해 "오늘날 장수로 원균이 으뜸이다.

설사 정도에 지나친 일이 있더라도 어찌 가벼이 탄핵해 그의 마음을 헤이하게 만들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신하들의 계속된 원균 탄핵을 두고 선조는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이해했다.

 

시간이 갈수록 선조는 원균을 더욱 높이 평가했다.

이는 동인이 원균을 배척하며 이순신만을 높이 평가하는 데 따른 반발로 볼 수 있다.

동인 중에서는 이산해 등 소수만이 원균의 편을 들었다.

반면 선조는 시간이 지날수록 이순신에 대해 좋지 않은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는 이순신이 명령을 거부한 것과 무관하지 않았다.

당시 이순신은 광해군이 무군사에서 이순신을 불렀을 때 응하지 않았다.

이는 곧 선조의 명령에 대한 불복을 의미한다.

이순신을 불신한 선조는 "이순신은 처음에는 힘껏 싸웠으나 이후 성실하지 않았다."라고 평가했다.

 

원균과 이순신이 결정적으로 틀어진 것은 이순신의 보고 때문이었다.

그는 원균의 측실 소생인 원사웅이 12살 밖에 되지 않는데,

전쟁에 공이 있는 것처럼 장계를 올렸다고 조정에 보고했던 것이다.

이런 개인적인 문제는 적을 앞둔 마당에 장수끼리 자중지란이 일어날 위기로 조정에 비쳐진 선조는

"수군 여러 장수들이 서로 화목하지 못하다고 하니 그런 습관을 모두 버리라"는 교시까지 내리게 된다.

 

그러나 이 사건은 진상을 조사하러 간 이덕형에 의해 그 내용이 완전히 밝혀진다.

원균의 외동아들 원사웅은 원균의 측실 소생이 아니라 정실 소생으로 당시 18세였다.

그는 아버지를 따라 전쟁터를 쫓아다니며 적을 여러 명 베기도 하는 등 공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실은 이순신이 확인도 하지 않은 채 원균을 모함한 결정적인 요인이 되어 이순신이 하옥될 때 거론되기도 하며

조정에서는 이순신이 원균을 제함했다고 실록에도 기록되어 있다.

이후 선조는 이순신에 대한 인간적 불신을 키우게 된다.

 

그러나 위에 적힌 원균의 10살 아들의 모함에 관한 내용은 사실관계가 완전히 틀린 잘못된 내용이다.

먼저 이덕형이 이순신과 원균에 대해 조사한 1차 보고내용이다.

이덕형이 아뢰기를 “이순신이 당초 원균을 모함하면서 말하기를 ‘원균은 조정을 속였다.

열두 살짜리 아이를 멋대로 군공에올렸다.’라고 했는데, 원균은 말하기를 ‘나의 자식은

나이가 이미 18세로 활쏘고 말타는 재주가 있다.’고 했습니다.

두 사람이서로 대질했는데, 원균은 바르고 이순신의 이야기는 군색하였습니다.”

하지만 3년 전의 김수의 사료를 보면 이순신이 원균이 10살 된 첩의 아들의 공을 올린 거 때문에

불만을 가졌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이덕형의 말에 나온 원균의 아들은 정실부인의 아들인 원사웅이다.

즉, 이순신은 서자를 문제 삼았는데 적자를 내세우며 되려 이순신을 몰아붙인 것입니다.

또한 이 증언은 이덕형 자신의 입으로 다시 한번 부정된다.

자신은 이순신과 대질한 적이 없으며 오로지 원균의 말만 들었는데 나중에 다시 한번 조사해보니

원균의 말이 틀리고 원균이 이순신을 모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사료이다.

 

<이몽학의 난>

임진왜란 직후 정유재란이 발발하기 직전까지 조선과 일본은 잠시 휴전 상태가 되었다.

이때를 노리고 왕족 서얼인 이몽학은 의병을 모집한다는 핑계로 장정들을

끌어 모으기 시작하여 결국 반란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김덕령 등이 하옥되는 등 전라도 지역이 불안해지자, 선조는 이를 빨리 수습하기 위해

원균을 다시 전라병사로 임명했다. 이 반란은 결국 진압되긴 했으나 선조는 이몽학의 난으로 인하여

자신의 정치에 대한 자신감을 잃었다.

 

<정유재란>

선조는 전쟁의 와중에도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싸우는 것을 개탄했고, 동인이

다시 정철의 처벌 문제로 동료끼리 헐뜯고 규탄하자 동인을 불신하고 서인 정철 등을 등용한다.

명나라에 뇌물을 바쳐 지원군을 더 파견하자는 조정 중신들의 의견과 달리, 정직과 성실로서

상대해야 된다며 뇌물 제공 거부의사를 명백히 밝힌 역관 홍순언을 신뢰, 총애하기도 하였으나,

홍순언은 중인 출신의 역관이라는 이유로 조신들의 반발에 부딪히게 된다.

 

이후 1594년 훈련도감을 설치하고 조총과 탄환을 만드는 기술을 배우도록 했다.

1597년 일본은 명과 진행되던 강화회담이 깨지자 다시 침입하였다(정유재란).

그러나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의 승리로 전세는 다시 역전되었고,

때마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여 일본군이 총퇴각함으로써 7년에 걸친 전쟁은 끝났다.

 

<임진왜란 후의 사회변동과 전후 수습책>

임진왜란 직후 조총과 화승총 기술이 발달했고, 선조는 왜군과 명나라가 남기고 간 군사 무기를

수집을 명하여, 병장기를 개선시켰다.

그러나 7년간에 걸친 전쟁으로 국토가 황폐화되어 경작지가 크게 줄어들었다.

이를 회복하고 전쟁으로 소실된 토지대장을 재정비하기 위해 1601년과 1603년에

어사를 파견해 전국적으로 양전을 실시했다.

 

또한 전쟁 중에 명군의 식량 조달을 위해 실시했던 납속을 더욱 확대했다.

납속책의 실시는 부유한 상민, 천민의 신분상승을 가능하게 해 조선 후기 신분제 변동의 한 계기가 되었다.

각 궁방의 경제적 토대를 마련해주기 위해 임시변통으로 왕자, 옹주 23명에게

예빈사에 소속되었던 어전, 염분, 시전을 획급했는데, 이후 궁방전의 시초가 되었다.

 

1604년 호성, 선무, 정난 공신 등을 녹훈함으로써 전쟁 중에 공을 세운 사람들을 표창했다.

그리고 유정을 일본에 보내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강화를 맺었으며, 왜관을 열어

개시하는 것을 허락하고 포로로 잡혀가 있던 사람들을 데리고 오게 했다.

 

<생애 후반>

서자의 후손으로, 아버지 덕흥대원군이 서자라는 점과 방계 승통이라는 점이라는 두가지 콤플렉스에

시달렸던 선조는 계비 인목왕후에게서 얻은 아들 영창대군을 세자로 삼으려 했다.

그러자 소북의 유영경은 선조의 뜻이 옳다하며 영창대군을 추대하고 인목왕후의 섭정을 계획하였으나,

5세부터 18세까지 13년간 섭정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소화불량으로 고생하던 선조는 임진왜란 때에도 분조를 경영한 적이 있던 광해군을 세자로 승인한다.

그러나 1608년 상궁 김개시가 수라상에 올린 떡을 먹다 체하여 갑자기 사망한다.

이후 선조의 독살설이 의혹으로 제기되기도 한다.

 

* 조부 : 11대 중종      * 조모 : 창빈 안씨

   * 부 : 명종      * 모 : 인순왕후 심씨

   * 사친 부 : 덕흥대원군      * 사친 모 : 하동부대부인 정씨

      * 원비 : 의인왕후 박씨      * 양자 : 15대 광해군 혼

      * 계비 : 인목왕후 김씨      * 아들 : 영창대군 의      * 딸 : 정명공주 / 공주 (조졸)

      * 후궁 : 폐 공성왕후 공빈 김씨      * 아들 : 임해군 진 / 15대 광해군 혼

      * 후궁 : 경혜 인빈 김씨

         * 아들 : 의안군 성 / 신성군 후 / 정원군 부(16대 인조의 아버지) / 의창군 광

         * 딸 : 정신옹주 / 정혜옹주 / 정숙옹주 / 정안옹주 / 정휘옹주

      * 후궁 : 순빈 김씨      * 아들 : 순화군 보

      * 후궁 : 정빈 민씨      * 아들 : 인성군 공 / 인흥군 영

         * 딸 : 정인옹주 / 정선옹주 / 정근옹주

      * 후궁 : 정빈 홍씨      * 아들 : 경창군 주      * 딸 : 정정옹주

      * 후궁 : 온빈 한씨      * 아들 : 흥안군 제 / 경평군 늑 / 영성군 계      * 딸 : 정화옹주

      * 후궁 : 귀인 정씨 / 숙의 정씨 / 소원 윤씨

 

 

조선 15대 광해군 = (재위 1608~1623)

선조의 둘째아들. 어머니는 공빈김씨. 비(妃)는 판윤 유자신의 딸이다.

의인왕후 박씨에게서 소생이 없자, 공빈 김씨 소생의 제1왕자 임해군 이진을 세자로 삼으려 하였으나 광패하여 보류하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피난지 평양에서 서둘러 세자에 책봉되었다.

선조와 함께 의주로 가는 길에 영변에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분조를 위한 국사권섭의 권한을 위임받았다.

 

그뒤 7개월 동안 강원, 함경도 등지에서 의병모집 등 분조활동을 하다가 돌아와 행재소에 합류하였다.

서울이 수복되고 명나라의 요청에 따라 조선의 방위체계를 위해 군무사가 설치되자 이에 관한 업무를 주관하였고,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전라도에서 모병, 군량조달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594년 윤근수를 파견하여 세자책봉을 명나라에 주청하였으나, 장자인 임해군이 있음을 이유로 거절당하였다.

1608년 선조가 죽자 왕위에 오르고 이듬해 왕으로 책봉되었다.

 

<영창대군 살해>

이에 앞서 1606년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 김씨에게서 영창대군이 탄생하자, 서자이며 둘째 아들이라는 이유로

 영창대군을 후사로 삼을 것을 주장하는 소북과 그를 지지하는 대북사이에 붕쟁이 확대되었다.

1608년 선조가 병이 위독하자 그에게 선위하는 교서를 내렸으나 소북파의 유영경이 이를 감추었다가

대북파의 정인홍 등에 의해 음모가 밝혀져 왕위에 즉위하자 임해군을 교동에 유배하고 유영경을 사사하였다.

 

그는 당쟁의 폐해를 막기 위해 이원익을 등용하고 초당파적으로 정국을 운영하려 하였으나

대북파의 계략에 빠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611년(광해군 3) 이언적, 이황의 문묘종사를 반대한 정인홍이 성균관 유생들에 의하여

청금록에서 삭제당하자 유생들을 모조리 퇴관시켰다.

 

이듬해에는 김직재의 무옥으로 1백여인의 소북파를 처단하였으며, 1613년 조령에서 잡힌 강도 박응서등이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제남과 역모를 꾀하려 하였다는 허위진술에 따라 김제남을 사사하고

영창대군을 서인으로 삼아 강화에 위리안치하였다가 이듬해 살해하였다.

 

<인목대비 폐비, 창덕궁 중건>

1615년 대북파의 무고로 능창군 이전의 추대사건에 연루된 신경희 등 반대세력을 제거하고,

1618년 이이첨 등의 폐모론에 따라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시켰다.

이와같은 실정은 대북파의 당론에 의한 책동에 의하여 나타난 것이었으나,

한편 그는 전란으로 인한 전화를 복구하는 데 과단성 있는 정책을 펴기도 하였다.

 

1608년 선혜청을 두어 경기도에 대동법을 실시하고, 1611년 양전을 실시하여 경작지를 넓혀

재원을 확보하였으며, 선조 말에 시역한 창덕궁을 그 원년에 준공하고 1619년에 경덕궁, 1621년에 인경궁을 중건하였다.

 

<외교정책>

이무렵 만주에서 여진족의 세력이 커져 마침내 1616년 후금을 건국하자 그 강성에 대비하여 대포를 주조하고,

평안감사에 박엽, 만포첨사에 정충신을 임명하여 국방을 강화하는 한편, 명나라의 원병요청에 따라

강홍립에게 1만여명을 주어 명나라와 연합하였으나, 부차 싸움에서 패한 뒤 후금에 투항하게 하여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 능란한 양면외교 솜씨를 보였다.

 

또한, 1609년에는 일본과 일본송사약조를 체결하고 임진왜란 후 중단되었던 외교를 재개하였으며,

1617년 오윤겸 등을 회답사로 일본에 파견하였다.

 

또, 병화로 소실된 서적의 간행에 노력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 ‘용비어천가’, ‘동국신속삼강행실’ 등을

다시 간행하고, ‘국조보감’, ‘선조실록’을 편찬하였으며, 적상산성에 사고를 설치하였다.

한편, 허균의 ‘홍길동전’, 허준의 ‘동의보감’ 등의 저술도 이때 나왔다.

외래문물로는 담배가 1616년에 류큐(琉球)로부터 들어와 크게 보급되었다.

 

<인조반정>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광해군은 폐위되어 강화도로 유배된 후

다시 제주도로 유배되어 살다가 1641년 67살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서인 이귀, 김류, 최명길, 김자점 등은 정원군의 장남 능양군 종을 받들어 인조반정을 단행하고 궁궐을 장악했다.

이들은 광해군을 인목대비 앞으로 끌고가 정죄한 뒤 유폐하였다.

인목 대비는 광해군과 폐세자에 대한 처형을 주장하였으나, 인조와 반정 세력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유배를 보내는 선에서 반정을 마무리짓게 된다.

 

세자로 있을 무렵부터 폐위될 때까지 성실하고 과단성 있게 정사를 처리했지만,

그의 주위를 에워싸고 있던 대북파의 장막에 의하여 판단이 흐려졌고, 인재를 기용함에 있어

파당성이 두드러져 반대파의 질시와 보복심을 자극하게 되었다.

뒷날 인조반정을 정당화하기 위한 책략과 명분에 의하여 패륜적인 혼군으로 규정되었지만,

실은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희생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같은 반정에 의하여 희생된 연산군과는 성격을 달리해야 할 것이다.

 

* 부 : 14대 선조      * 모 : 의인왕후

* 사친 : 폐 공성왕후 공빈 김씨      * 친형 : 임해군

   * 왕비 : 폐비 유씨 : 문성군부인      * 아들 : 폐세자 지 * 페세자빈 밀양 박씨

   * 후궁 : 소의 윤씨 * 옹주

   * 후궁 : 소의 홍씨 / 숙의 허씨 / 숙의 권씨 / 숙의 원씨 / 숙의 변씨 / 소용 임씨

   * 후궁 : 소용 정씨 / 숙원 심씨 / 숙원 신씨 / 궁인 조씨 / 상궁 이씨 / 상궁 김씨 / 상궁 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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