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25대 충렬왕 = 거 (재위 1274년~1298년, 복위 1299년~1308년)
원종과 순경태후 김씨의 맏아들이다.
원나라의 황제 쿠빌라이의 딸 제국대장공주와 결혼하여 원나라의 부마국이 되었으며,
이후 고려 군주들은 원나라의 황녀나 종실의 딸을 정비 또는 후궁으로 맞이하여
원나라의 부마국이 되었다. 그 결과 고려는 원나라의 속국(제후국)이 되었다.
고려왕조에서 최초로 양위하였다가 복위한 군주이기도 하다.
흔히 몽골에서 내린 시호를 처음 사용한 고려의 군주로 알려졌지만
몽골 제국이 하사한 시호를 최초로 받은 왕은 그의 부왕인 원종이었다.
34대 공양왕의 외고조부이기도 하다.
1260년(원종 1년) 태자로 책봉되었다.
1272년 원나라에 갔으며, 1274년(원종 15년) 음력 5월 제국대장공주와 혼인하고 변발, 호복 등 몽골 풍속에 따랐다.
그 때문에 조정 신하들마저 이 풍습을 따랐고, 후엔 백성들까지 몽골의 풍습을 따른다.
이때 승려 일연은 충렬 11년인 1285년 ‘삼국유사’를 만들어 고려의 자주성을 회복시키는데 공을 세웠다.
혼인한 그해 음력 6월 원종이 죽자 고려에 돌아와 왕위에 올랐다.
원나라 세력을 배경으로 왕권을 강화할 수 있었으나, 제후국이 되었다.
왕위에 즉위한 그해 원나라 세조의 강요로 일본 정벌에 동로군을 파견하였다.
1277년(충렬왕 3년) 원나라의 병마를 사육하기 위해 제주도에 목마장을 설치했다.
1280년(충렬왕 6년) 정동행중서성이 설치되자 일본 정벌을 준비하기도 했다.
1290년(충렬왕 16년) 합단이 내침하여 강화로 천도했으며, 김방경의 활약으로 수차 왜구, 여진의 침입을 격퇴할 수 있었다.
재위 중 자주 원나라에 내왕하면서 풍습과 제반 문물제도를 받아들였고, 경사교수도감을 설치하여 경학과 사학의 진흥에 힘썼다.
또 원나라의 속방에 맞게 관제를 격하하였고, 몽골의 지배를 받았다. 몽골 풍속이 많이 들어왔으며,
또한 왕비와 그 일족이 막대한 토지를 소유함으로써 고려 농민은 유민으로 전락하기도 했다.
* 부 : 24.원종 * 모 : 정순왕후 (=순경태후)
* 왕후 : 제국대장공주 (=원나라의 황제 쿠빌라이의 딸) * 아들 : 26.충선왕
* 궁주 : 정화궁주 왕씨
* 아들 : 강양공(공양왕의 모후인 국대비 왕씨의 조부)
* 딸 : 정녕원비 / 명순원비
* 원비 : 숙창원비 김씨
<김준>
최충헌의 가노였던 김윤성의 아들로 출생했다. 최우에게 추천된 뒤 신임을 얻었으며, 최항(=최우의 서자)을 섬겼다.
1249년 최항이 죽고 그의 아들인 최의가 집권하자 불만을 품었고,
1258년(고종 45년) 임연, 유경, 최온 등과 함께 삼별초를 앞세워 최의를 살해했다.
이로써 최씨 무인정권을 타도하여 왕권을 회복시키고 장군에 위사공신 등이 되었다.
그 후 교정별감이 되어 국가 비위의 규찰과 국사 감독을 담당했다.
이어 시중이 되고 해양후에 봉해져 최충헌에 견줄 만한 권세를 누렸다.
1252년 몽골에 대해서는 강경책을 써서 몽골이 요구한 왕의 입조를 반대하고, 몽골 사신의 살해와 왕의 제거를 기도하였다.
1268년 아우 김충과의 의견에 틈이 생겨 최의를 제거하는데 협력을 했었던, 임연 등에게 살해되었다.
김준의 아비 김윤성은 본래 천예로서 그 상전을 배반하고 최충헌에게로 투신하여 종노릇하는 사이에 김준과 김승준을 낳았다.
김준은 풍골이 늠름했으며 천성이 관후하고 아랫사람에게 공손하였다.
또 궁술에 능했으며 남에게 베풀어 주기를 좋아해서 여러 사람들의 인심을 얻었고
날마다 호협스러운 청년 자제들과 교유하고 모여서 술을 마시었으므로 제 집에는 재산이라곤 없었다.
하루는 어떤 술수를 하는 중이 그를 보고 말하기를“이 사람이 뒷날에 반드시 국권을 쥘 것이다”라고 하였다.
<최항>
<서자와 승려>
최우의 서자로 창기 서련방의 소생이며 처음 이름은 만전이라고 불렀다.
처음 송광사에서 승려가 되어 쌍봉사 주지로 있다가 1248년 고종 35년에 아버지 최우가 병이 들자 속세에 돌아와 항으로 개명하였다.
임익에게 글을 배우고 권위에게 예를 익혔으며, 음서로 관직에 올랐다.
<관료 생활과 집권>
아버지 생전에 좌우위상호군 호부상서를 지냈다. 추밀원 지주사가 되어 아버지 최우로부터 가병 5백 명을 분양받았다.
1249년 최우가 죽은 뒤에 정권을 인수하여 은청광록대부로 승진 추밀원부사가 되었다가, 이어 동서북면을 총괄하는
교정별감까지 취임한다.
<살상과 권력 강화>
시기심이 많아 50년 전추밀원부사 주숙 등을 죽였으며, 무고를 듣고도 사람을 시켜 조사하지 않고 이를 맹신하였다.
이어서 민희, 김경손, 김안 등을 해도에 귀양 보냈으며, 각 주현의 세금을 감하는 한편 여러 도(道)의 구실아치를 감원하여
인건비를 절약하여 인망을 얻었다.
아버지의 식읍, 진양후의 봉작, 대장경의 판각과 강도의 축성과 대묘 창건 등의 공을 표창하는 모든 것을 다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처음 아내 최온의 딸을 버리고 조계전의 딸을 취하였으며, 조부 최충헌의 초상화를 창복사에, 아버지 최우의 초상화를
선원사에 옮기는 데 성대한 의식을 베풀었다.
다른 사람을 헐뜯는 말을 잘 믿어 사사로운 감정으로 무고하는 자에게도 상을 주고 무고를 받은 자는 가차없이 추국하여
엄벌에 처하였다.
그리하여 1250년 음력 3월에는 주숙, 장군 김효정 등을 귀양 보내는 도중에 죽였으며, 장군 최종필, 나주 부사 이균 등을 귀양 보냈다. 51년 아버지 최우의 본부인 대씨를 독살하였다.
<몽골과의 외교전>
1252년 몽골의 사신 다가 등이 들어오는데, 고종이 강화도에서 나와 육지로 올라와 친히 사신을 맞으라고 요구하자
모든 신하들이 다 그대로 시행하기를 결의하였으나, 최항이 홀로 이를 거부하고 대리로 신안공 전을 보내 맞이하게 하였다.
1253년 몽골은 이를 빌미로 야굴과 대군을 보내 고려를 침입 하였고, 고종에게 강화에서 환도하기를 독촉하여 침입하자
영녕공 준 등이 태자를 보내어 몽골군을 무마시키자고 건의하였으나 끝까지 거절하였다.
몽골에서 강화 출륙을 요구하자 승천부에 신궐을 짓고 응하는 것처럼 위장하였으나, 비밀리에 원종에게 주청하여
사신 접견을 강력히 반대했으며, 52년에는 몽골에서 파견된 사신 다가 등이 왕의 출륙 친영을 요구해 오자
왕이 몸이 불편하다는 핑계로 종실인 신안공 왕전을 보내어 대신 몽골 사신들을 대면하게 하는 등
아버지 최우의 항몽 정책을 계승, 강경책을 썼다.
1257년 사후에 ‘진평공’에 추증하였으며, 적자가 없었으므로 송서의 종이 낳은 최의로 후사를 삼았고,
원종 때에 그의 고택을 철거하였으며 그 땅을 집이 없는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임연>
처음에 몽골병을 격퇴한 공으로 대정이 되고, 1258년(고종 45년) 유경, 김준 등과 함께
최의를 죽이고 왕권을 회복시킨 공으로 위사공신이 되었다.
뒤에 김준을 죽였으며, 원종을 폐하여 안경공 창을 옹립하는 한편 교정별감이 되어 모든 실권을 장악했다.
원종 폐립 사건으로 원나라 세조인 쿠빌라이 칸과 충돌하여 원종을 복위시켰으나, 원나라의 친조 요구를 거부했다.
원종이 몽골에서 귀국하기 전에 출륙환도와 권신의 제거를 약속했다.
원종이 몽골병과 함께 귀국하려 하자, 임연은 야별초를 각 지방에 보내어 백성의 해도입거를 명하고,
몽골에 항전할 태세를 갖추었으나 죽었다.
고려 26대 충선왕 = 원, 장, 중앙 (재위 1298년, 복위 1308년~1313년)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의 아들이다. 정비는 원나라 진왕 카말라의 딸 계국대장공주이다.
원나라에 공녀로 끌려갈 뻔한 왕족 서원후 영의 딸 왕씨를 구출하여 자신의 비로 삼았다.
고려에서 처음으로 즉위하였다가 폐위된 후 다시 복귀한 군주이기도 하다.
1277년(충렬왕 3) 세자로 책봉되고, 다음 해 원나라에 가서 몽골 이름을 받았다.
1296년(충렬왕 22)에 몽골 황실의 진왕 감마라의 딸 보탑실린 공주를 정비로 맞아 원도(=북경)에서 혼사를 올렸는데
앞서 서원후 영, 홍문계, 조인규의 딸을 비(妃)로 맞아들인 바 있다.
1287년(충렬왕 13) 종실 서원후 영의 딸이 공녀로 선발되었으나 사정을 들은 세자(=충선왕)의 요청으로 공녀 차출을 면하였으며,
1289년 세자의 후궁으로 들이게 되었으니, 그가 바로 뒤에 정비가 되었다.
1297년 어머니가 갑자기 병으로 죽자 원나라에서 귀국하여 어머니가 병을 얻게 된 것이 내총(內寵)을
투기하는 자들의 소치라 하여 당시 부왕(=충렬왕)의 총애를 믿고 날뛰던 후궁 무비를 살해하고,
그와 관련된 여러 사람을 귀양 보내거나 죽이고 가두었다.
이 지나친 처사와 왕비의 죽음에서 크게 충격을 받았는지 충렬왕은 왕위를 넘겨줄 뜻을 원나라에 알렸다.
<즉위>
그리하여 1298년(충렬왕 24) 충선왕이 왕위에 오르고, 부왕은 태상왕이라 했다.
젊은 왕은 구폐를 개혁하고 새로운 정치를 실행하려 하였으나 권문세가의 비방을 많이 받았다.
정국의 쇄신을 꾀하고 먼저 관제를 개혁하던 무렵에 조비를 질투해 오던 왕비 계국공주와 왕의 반대파가 음모 사건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충선왕 즉위 7개월 만에 다시 충렬왕이 복위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왕실의 치정 문제도 관계되지만,
충렬, 충선 두 왕을 둘러싼 정치적 모략과 중상의 결과로 보인다.
충선왕이 왕위를 아버지 충렬왕에게 반환한 뒤 원나라로 간 뒤에도 그에게 원한을 품은 왕유소, 송린, 석천보 등이
그를 모함하여 충렬, 충선왕 부자지간을 이간시켰으며, 계국공주의 재가 문제를 제기하였으나 오히려 처형되었다.
충선왕은 다시 즉위할 때까지 10년간 계국공주와 원나라 서울에 머물면서 후에 무종이 된 회령왕 해이샨 및
인종이 된 태자 아유르발리파드라의 형제와 친하게 지냈다.
1307년 원나라의 성종이 죽자 왕위 계승이 실력 문제로 비화되었을 때 충선왕은 무종을 옹립하여 공을 세웠다.
이로써 원 황실과의 친분이 두텁게 되어 심양왕(=고려왕이 원나라 황제로부터 받은 봉작)에 즉위하였으며,
1308년 아버지 충렬왕이 죽자 고려왕에 복귀하여 다시 정치의 쇄신에 열의를 보였으나 오래 고려에 머무르지 않고
원나라 생활을 즐기며 전지를 통하여 국정을 행하였다. 왕이 해마다 많은 물품을 원나라로 가져가고
계속 원나라에 머물길 원하자, 왕의 귀국 운동이 있었으나 귀환을 꺼렸다. 이 와중에 세자 감을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있자
그를 살해한다.
아들 강릉대군 도에게 왕위를 물려주고(세자 감은 충선왕이 죽였다), 조카를 심양왕의 세자로 삼았으며
나중에 그에게 전위하면서 끝내 귀국을 피하였다. 이는 본국에 대한 애착 결여, 원황실의 우대 등에도 이유도 있고,
충선왕의 본성이 담박하여 불교를 좋아하고 글을 즐기며 그림도 잘 그리는 등 정치와 권력에는 애착이 적었던 까닭도 있다.
그 무렵 원나라 연경에 만권당을 설립하여 내외 서적을 모으고, 고려에서 이제현 등과 원나라의 조맹부 등의 학자를 초빙하여
학문을 연구하며 고려 문화 수입에 힘을 썼다.
한편 충선왕의 개혁정치로 말미암아 홍중희, 홍중경, 홍복원 등이 기득권을 잃게 되자, 이들 홍씨들은 고려왕이
심양왕을 겸하는 일은 부당하다고 주장하면서 입성론을 펼쳤다.
입성론은 고려를 원나라의 행성(=행중서성)으로 삼아달라는 주장을 가리킨다.
그 결과로 충선왕의 개혁정치는 시작하자마자 좌초하게 되며, 또한 충선왕은 강제 폐위되었고,
고려 왕위는 충선왕의 장자 강릉대군에게, 심양 왕위는 당시 충선왕의 조카이며 태자였던 연안군 왕고에게 물려주게 된다.
그 뒤 고려왕과 심양왕은 서로에게 정통성을 주장하며 다투게 되며, 특히 고려 말에 한때 고려의 태자였던
심양왕이 고려 왕위를 요구한 횟수가 잦았다. 뒷날 심양왕은 줄곧 고려 왕족에게 이어졌으며,
고려 왕족의 후예였던 마지막 심양왕 툭타부카가 후계자 없이 죽자 요동 정벌론이 고려에서 일어나며,
이를 위해 진군하던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함으로써 고려는 멸망한다.
원나라의 인종이 죽자 몽골 신하의 참소로 토번(=티베트) 땅에 유배되었다가 태정제가 즉위하자 유배가 풀려
원나라 대도에 돌아와 2년 후에 객사하였다.
* 부 : 25대 충렬왕 * 모 : 제국대장공주
* 정비 : 계국대장공주
* 왕비 : 왕비 조씨
* 의비 : 의비 야속진, 몽골 여성 * 세자 : 감 / 27대 충숙왕
* 정비 왕씨, 종실 서원후의 딸, 신종 4대손녀, 공양왕의 증대고모
* 조비
* 순화원비 홍씨(홍규의 딸, 충숙왕의 정비 명덕태후의 자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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