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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23대 고종 = 철, 천우 (재위 1213년~1259년)

강종과 원덕태후 유씨의 맏아들이다. 비는 희종의 딸 안혜태후 유씨이다. 몽골에서 내린 시호는 충헌왕이다.

최충헌의 적(嫡)매형이자 사돈간이기도 하다.

최충헌은 부왕 강종의 서녀와 재혼하였는데, 아들 원종의 장인 김약선은 최충헌의 아들 최우의 사위였다.

 

1212년(강종 1년)에 태자에 책봉되고, 이듬해 강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최씨 일가의 무단정치로 실권을 잡지 못하다가, 1258년 최의가 살해되자 정권을 되찾았다.

재위 기간에 몽골족 등 북방 민족의 침입으로 고통을 받았다.

 

1218년 거란의 침공을 받고 이를 격퇴하면서 몽골의 침입에 대하여는 협약을 맺었다(=강동성 전투).

1225년 몽골 사신 제구유가 귀국 도중 도적에게 피살된 것을 구실로 하여 재침하자 강화조약을 체결하였다.

각지에 몽골의 다루가치(행정 감독관) 72인을 두게 하고, 또 약간의 수비군을 주둔케 했다.

 

특히 1231년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몽골의 침입을 받고 1232년 강화도에 천도하여(=강화천도), 28년간 몽골에 항쟁하였다.

왕의 친조와 태자 왕전의 볼모를 조건으로 강화가 성립되어, 이후 고려는 사실상 원나라의 속국으로서 공민왕 때까지 굴욕을 겪었다.

1235년 제3차 침입을 받고, 1238년 경주 황룡사 9층목탑을 소각당한 외에도 귀중한 문화재를 많이 잃었다.

1252년 제6차의 침입을 받았을 때는 남녀 무려 약 2십만 6천 8백 명의 포로를 내고, 태자의 입조를 약속하였다.

이로써 고려는 사실상 몽골에 굴복했다.

1258년 동북 지방에 쳐들어 온 몽고군에게 조휘와 탁청이 투항하면서 철령 이북 지역이 몽고의 쌍성총관부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문화 발전에 힘써, 팔만대장경을 간행케 하고, 유학을 장려하는 등 문화적 업적을 남겼다.

특히 팔만대장경은 원나라의 침략을 부처의 힘으로 격퇴하기 위하여 간행하였다.

능은 강화의 홍릉이다.

 

* 부 : 22.강종      * 모 : 원덕왕후

   * 왕후 : 안혜왕후 유씨(희종의 딸)      * 자녀 : 24.원종 식 / 안경공 창 / 수흥궁주

 

 

<최충헌>

고려시대 무신이자 군인, 정치인이다. 최씨 정권의 첫 번째 독재자이다.

최충헌은 개성 우봉에서 상장군 최원호의 아들로 태어났다. 처음 이름을 난이라 했다가 뒤에 충헌으로 고쳤다.

아래로 동생 최충수와 여동생 1인이 태어난다.

 

그는 일찍이 음보로 양온령이 되고, 1174년(고려 명종 4년) 무인 집권에 반발한 조위총의 난이 벌어지자,

조위총의 난을 진압하는 데 출정하여 큰 공로를 세웠다.

1196년(명종 26) 음력 4월 8일, 아우 최충수와 이지영과의 사감이 동기가 되어,

최충수의 권유로 먼저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이의민을 미타산에 있는 그의 별장을 습격하여 죽이고

명종을 움직여 이의민의 삼족과 그 일당을 모조리 잡아 죽였다.

 

그를 제거하려던 승려들의 반란이 있자 평장사 권절평 등 36명이 딴 뜻을 품고 있다 하여 모두 잡아 인은관에 유폐한 뒤 죽였고,

또 이의민 시기의 무인 실력자였던 두경승을 숙청한 뒤 판위위사 최광원 등을 귀양 보냈다.

 

1197년 9월 최충헌은 왕을 폐하려 저잣거리에 병사를 다스려 정돈하며 의논할 일을 맡긴다며

류삼백을 시켜 두경승을 유인하여 체포, 두경승은 자연도에 유배했고, 류삼백을 스스로 목찔러

죽게 했으며, 류삼백의 부친 류득의는 남쪽 변방에 류배했다.

고려사에 의하면 두경승은 섬에 있으며 근심하고 분해 피 토하고 졸했는데 혹 이르길 두경승은

금이 있어 그 종이 훔치려 몰래 독살했다.

 

그의 정적들을 제거한 뒤에 명종에게 10조목의 봉사를 올려(봉사십조), 그릇된 정치의 시정과 함께 임금의 반성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왕이 봉사십조를 이행하지 않고 최충헌의 신변을 위협하게 되자 창락궁에 유폐시키고, 평량공 민(=신종)을 옹립했다.

 

최충수가 그의 딸을 태자(=희종)의 비로 삼으려 임금에게 강요하고 태자의 본비를 내보내므로 그는 이에 반대하여,

드디어 무력 충돌에까지 이르러 최충수를 살해하였다.

이는 신종이 옹립된 다음 달의 일인데, 이로써 본래는 그의 아우 충수와 나누어 가졌던 군국의 대권을 독점하기에 이르렀다.

 

1198년(신종 1) 자신의 가노인 만적 등이 반란을 모의하였으나, 한충유의 종이 거사 계획을 누설하면서 사전에

이 계획을 알고 만적 등 백여 명을 붙잡아 강에 던져 죽였다.

1200년(신종 3년) 그를 처치하려는 음모가 자주 발생하자 경대승이 두었던 도방을 다시 설치하여 신변을 보호하였다.

 

1204년 신종에게 강제로 양위를 강요하여 태자(=희종)에게 왕위를 양위케 하였다.

희종은 그를 신하의 예로서 대하지 않고, 은문상국이라 하였다.

 

1209년 학자 이규보를 발탁하여 무신정권으로 피폐해진 문화를 중흥시키려고 힘썼다.

그해 4월 청교역의 관리들의 최씨 부자 살해 미수 사건이 생기자 영은관에 교정도감을 설치하여

혐의자를 색출하기도 하였는데, 실질적인 무인정권의 중앙기관으로서 국정 전반을 감독케 했다.

이 도감은 뒤에 최씨 일문이 무단정치를 함에 한동안 일본의 막부와 같은 구실을 하였다.

 

1211년 희종이 그의 권세에 눌려 항상 불안한 생활을 하자 내시 왕준명이 중심이 되어 그를 꾀어 죽이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그 뒤, 희종과 태자를 폐하고, 명종의 아들인 한남공 정(=강종)을 옹립하여 즉위시켰다.

1213년 강종이 왕위에 즉위한 지 3년 만에 죽자, 태자 진을 세우니 이가 곧 고종이다.

1217년 다시 자신을 암살하려는 흥왕사 승려들의 음모를 적발, 처형하였다.

그는 이와 같이 일생중에 신종, 희종, 강종, 고종의 네 임금을 자기 마음대로 행함으로써 최씨 집권의 기반을 확고히 하였다.

 

만년에 병석에 누운 최충헌은 형제간에 권력 다툼이 일어날 것을 염려하여 아들 최이(최우)를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였다.

최이(최우) 역시 이후 병을 핑계로 아버지를 찾지 않았다가 정권을 이어받았다.

고려멸망 후 조선에서 편찬한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반역열전에 실렸다.

그는 고려 475년 역사상 가장 강력한 무인 정치자로, 생전에 왕을 능가하는 권력을 누렸다.

 

 

<최우>

처음 이름은 우 였으나, 집권 이후에 이(怡)로 개명한다.

1219년(고종 6) 아버지가 죽자, 처음에는 인심을 얻기에 힘써 아버지 최충헌이 모은 재산을 왕에게 바치고,

일찍이 아버지가 탈취한 공사의 전민과 재산들을 모두 각각 원래의 주인에게 되돌려주어

민심을 얻었다.

이어 한사를 등용했으며, 동생 최향 및 아버지에게 아부하여 백성을 괴롭히던 관리를 유배 혹은 파면하였다.

무신정권의 전복을 꾀하려는 시도를 발각, 모두 제거, 숙청하면서 명실공히 집정자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

이 무렵 몽골의 사신이 자주 와서 많은 금품을 요구하자 이를 냉정히 대접하고는

항몽을 선언하고 북변의 여러 성과 개경의 황라성을 수축하여 몽골의 침입에 대비했다.

 

그러나 아버지 최충헌 사후 문신들과 왕실이 인사권을 장악해 나가자 1225년(고종 12) 정방을 자택에 설치하여

문신과 왕실로부터 관료의 인사권을 탈취하여 장악했고, 1227년 자택에 서방을 두어 문객 중의 이름난 선비를 포섭하여

정치에 이용하는 한편 삼번제로 도방과 함께 숙위를 담당케 하고, 아버지 때의 도방을 외도방,

자기의 가병을 내도방으로 하여 저택 내외의 경비를 담당하게 했다.

 

이어 도방의 병력을 확장, 증원하여 사병을 증강했다.

1229년 격구장을 만들어 격구를 장려하였다.

그러나 이웃집 수백 호를 강제로 철거하여 격구장을 만들어서 원성을 샀으나 왕실은 그를 처벌하지 못했다.

1231년 그의 처가 죽자 왕은 온갖 비단 70필을 하사하여 왕후의 예로 장사케 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최우는 최충헌 못지 않은 난신적자이며 만고의 역적이다.

북변에 침범했던 몽골의 대군이 곧 침범하리라는 소식이 전해지자 1232년 왕에게 강화 천도를 청하고

녹전차 1백여 대로써 자기 재산을 강화에 옮긴 뒤 드디어 왕으로 하여금 천도를 단행케 했다.(강화도 천도)

이듬해 필현보, 홍복원이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가병을 이끌고 이를 토벌하고,

1234년(고종 21) 강화 천도의 공으로 진양후에 봉해지고, 강화 연변에 성을 쌓아 몽골군의 침입에 대비했다.

 

1243년(고종 30) 문인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무신전란을 겪는 가운데 파괴된 국자감을 수축하고

양현고에 쌀 3백 곡을 양현고에 내놓는 등 장학에 힘쓰는 한편, 강화에서의 대장경판을 만드는 데

개인의 재산을 희사하여 대장경판 재조를 완성하게 하였다.

이후에 차츰 전횡을 자행, 횡포가 심해져서 백성의 원망을 샀다.

한반도 본토에서 백성들이 몽골군의 침입으로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강화도에서 어용문신들과 더불어

연회를 즐기고 사치를 부리는 등 횡포가 끊이지 않았다.

1249년초 최우는 몽골과의 전쟁을 준비하였으나 그해에 갑자기 사망했다.

 

신품사현의 한 명으로 글씨에도 능하여 해서, 행서, 초서 등을 잘 썼다.

후일 원종은 최씨 정권 몰락 후 최우를 부관참시하였다는 설이 있다.

 

고려 원종의 비 순경태후의 외할아버지로, 전주 김씨 김약선(이 그의 맏사위였다.

충렬왕은 그의 외외증손이었다.

 

 

고려 24대 원종 = 정, 일신 (재위 1259년~1274년)

고종과 안혜태후 유씨의 맏아들이다.

비는 김약선의 딸인 정순왕후인데, 이후 충렬왕이 순경태후로 추존했다.

1235년(고종 22년)에 태자가 되었으며, 1259년 강화를 청하기 위해 몽골에 갔다가 그해 고종이 죽자 이듬해 귀국하여 즉위했다.

원나라에서 내린 시호는 충경왕이다.

 

최충헌은 그의 고모부이자 처외증조부였다. 그의 비 정순왕후는 최충헌의 외증손녀이자 최우의 외손녀였다.

 

고려 역대 국왕 중 묘호에 조(祖)나 종(宗)자를 사용한 마지막 왕이며,

이후에는 원나라의 지배로 조나 종이 아닌 왕자를 붙여야 했고,

앞에 글자는 원나라의 충성을 맹세하는 증거인 "충 (忠)"자를 넣어야 했다.

그리고 이때 이후로 "짐"은 "고" 또는 "과인"으로, "폐하"는 "전하"로, "태자"는 "세자"로,

"선지"는 "왕지"로 명칭이 격하되었을 뿐만 아니라, 각종 관직 용어들의 명칭들도 모두 격하되었다.

 

1269년 임연에 의해 잠시 폐위되었으나, 원나라의 도움으로 다시 왕위에 올랐다.

같은 해 최탄 등이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몽골에 투항하자, 몽골은 서경에 동녕부를 두었다.

 

1270년 개경 환도를 주장하였으나 임연의 아들 임유무가 크케 반대하였다.

원종은 삼별초를 시켜 임유무를 제거하였다. 임유무가 죽음으로써 무신 정권 또한 끝이 났다.

개경으로 환도한 후 삼별초의 해산을 명령하자 배중손을 중심으로 삼별초의 항쟁이 일어났다.

 

1273년 원종 14년에 이들의 반란은 제주 삼별초를 끝으로 여, 몽 연합군에 의하여 평정되었다.

탐라에 다루가치 총관부를 둔 원나라로부터 일본 원정을 위한 전함 300척을 만들라는 요청을 받았다.

원나라에서 매빙사가 오자 결혼도감을 설치하여 백성들로부터 원성을 샀다. 능은 소릉이다.

 

* 부 : 23.고종      * 모 : 안혜태후

   * 왕후 : 정순왕후 (경주 김약선의 딸)      * 아들 : 25.충렬왕

   * 궁주 : 경창궁주 유씨 (종실 신안공 전의 딸)

      * 아들 : 시양후 태 / 순양공 종

      * 딸 : 경안궁주 (종실 제안공 숙과 혼인) / 함녕궁주 (종실 광평공 혜와 혼인)

* 장인 : 김약선 * 장모 : 우봉 최씨

* 처외조부 : 최우, 최충헌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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