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백제 27대 위덕왕 = (재위 554년~598년)>

554년에 성왕이 전사하자 30살의 나이로 국정을 이어받았다.

그는 태자 시절부터 성왕을 도와 국정에 같이 참여하였고, 신라가 동맹을 어기고 한강 유역을 장악했을 때는, 신라 정벌론을 펼쳤다.

그의 강경론에 따라 성왕이 신라 공격을 결심하자, 554년에 자신이 선봉을 서서 관산성 공략에 나섰다.

이 일은 많은 신하가 반대하였으나, 창은 주장을 굽히지 않고 기어코 관산성을 공격했다.

성왕은 관산성을 공격하고 있던 태자 창을 위로하기 위해 밤길을 달려가다 신라군에게 급습을 당해 죽임을 당하였는데,

창은 그 죄책감에 시달리며 출가하여 승려가 되려고 하였다. 하지만 신하들이 강력하게 만류하자, 창은 뜻을 굽히고 왕위를 승계했다.

그는 성왕의 삼년상을 치르고 557년 정식으로 왕위를 승계했는데, 이는 자기 탓으로 부왕이 죽은 것에 대한 참회의 의미로 보인다.

 

성왕이 전사하여 나라가 불안한 가운데 태자로서 왕의 임무를 수행하던 그는 국정을 맡자마자 고구려의 침입을 받아야 했다.

고구려는 554년 음력 10월에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왔는데, 이는 성왕이 죽은 지 불과 3개월 만이었다.

고구려는 신라가 길을 열어주자, 단숨에 웅진성까지 달려와 백제를 위협하였다. 백제의 옛 도읍이자 군사적 요충지인 웅진성은

사비성에서 불과 한나절 거리도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었다. 말하자면 백제의 폐와 같은 곳인데,

고구려가 한걸음에 달려왔으니, 백제로서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위덕왕은 총력전을 펼쳐 가까스로 고구려군을 패퇴시켰지만, 고구려의 재침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고구려의 침략은 신라가 길을 터준 결과였으므로, 고구려와 신라가 연합하여 공격해올 수도 있었다.

 

때문에 위덕왕은 오랜 동맹국인 가야 쪽에 밀사를 파견하여 신라에 빼앗긴 가야 땅을 되찾아 가야를 재건할 방법을 모색하였고,

그것은 562년 음력 7월에 신라에 대한 공격으로 나타났다. 백제가 신라를 공략하는 사이,

가야는 내부를 수습하고 신라의 뒤를 후리는 양동작전을 구사했던 것이다.

 

그러나 백제군은 신라의 반격에 밀려 1천 명의 사상자를 내고 패주함으로써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백제군을 물리친 신라는 그 여세를 몰아 가야를 공격했다. 가야를 집어삼킬 기회를 엿보며,

침공의 명분을 찾고 있던 신라로서는 이 이상 좋은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이사부가 이끈 신라군은 장군 사다함을 앞세워 순식간에 가야 전역을 휩쓸어버렸고, 그것은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가야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전쟁 위협이 사라지자, 위덕왕은 외교 경로를 통해 고구려를 고립시키는 전략을 구사하였다.

 

수나라가 진나라를 몰락시킬 당시, 수나라의 전함 한 대가 탐라에 표류해왔는데, 위덕왕은 그들의 배를 수리해주고,

선물까지 가득 함께 돌려보냈다. 양견은 이 일로 백제를 매우 신임하고, 굳이 사신을 보내고

조공을 바치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조서를 내리기까지 하였다. 수나라로 하여금 고구려에 대한 공격을

유도한다는 계획은 이런 상황에서 이뤄진 것이다.

 

정황을 살피며 수나라에 그런 의지를 전달할 기회를 엿보고 있던 위덕왕은 596년에 수나라와 고구려가 요동을 놓고 전쟁을 벌이자,

사신을 파견하여 고구려는 예의가 없고 오만한 나라라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만약 수나라가 다시

고구려를 친다면 백제가 도와주겠다는 제의를 했다. 그러나 양견은 아직 고구려를 재침할 여력이 없다고 판단하고,

위덕왕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편, 백제가 수나라로 하여금 고구려를 치도록 충동질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고구려는 즉시 병력을 동원하여

백제 국경을 노략질하며 보복을 감행하고 돌아갔다.

 

위덕왕은 그런 상황에서 74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 부왕 : 26.성왕      * 모후 : 양화부인

   * 제 1왕후 : 소씨

   * 제 2왕후 : 연씨      * 아들 : 아좌태자 / 30.무왕      * 공주 : 부여예란

   * 동생 : 28.혜왕      * 조카 : 29.법왕

   * 동생 : 임성태자

 

 

<백제 28대 혜왕 = 부여계, 헌왕 (재위 598년 ~ 599)>

위덕왕 초기에 왜로 가서 군사 5000명을 데려오는 역할을 하였다.

후일 위덕왕이 붕어하자 아좌태자 대신에 왕위에 올랐지만 고령으로 사망하고 아들 부여선이 법왕으로 등극한다.

 

국세가 극도로 약화되고 사회 내부의 모순이 심화되고 있던 때로 보인다.

전 시대에 귀족들의 활동무대이자 경제적인 원천을 이루었던 황해 연안의 무역기지들은 고구려의 진출로 일차적인

큰 타격을 받았고, 그뒤 진흥왕 당시의 신라가 한강유역을 점령하여 황해로 진출하게 되면서는 해상활동은

신라에도 미치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드디어는 중국대륙이 수나라에 의하여 통일되자 중국본토에 잔존하여 있던 기지들마저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한편, 남쪽 일본열도 역시 왜의 국가체제 성립으로 백제의 영향권에서 떨어져 나갔다.

 

이렇게 밖의 활동무대를 상실한 귀족들은 백제 내부의 한정된 경제적 원천을 차지하려고 심한 내분상태에 빠져들게 되었다.

혜왕의 재위기간이 1년에 불과하고, 다음 왕인 법왕의 재위기간도 1년에 불과하다.

이처럼 왕의 단명한 상태가 거듭되는 것은 당시 백제의 정세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 부왕 : 26.성왕      * 모후 : 양화부인

   * 왕후 : 해모연      * 아들 : 29.법왕 선

   * 딸 : 우영공주      * 손자 : 무왕 장

 

 

<백제 29대 법왕 = 선, 효순 (재위 599년~600년)>

법왕은 불교를 매우 숭상하여 왕흥사와 미륵사지를 건설하였다.

그러나 불교를 너무 숭상한 탓에 백성들에게 물고기를 잡는 그물과 도구들을 태워버리고,

산에 있는 매를 풀어주라는 다소 황당한 명을 내렸다. 그는 왕위에 오른 지 2년 만에 죽었다.

 

그 당시 백제는 이미 한강유역 전부와 지금의 남양만일대의 대중국 무역기지를 신라에게 빼앗겨

커다란 경제적 타격을 받았고 안으로는 귀족의 내분으로 곤경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불교계율을 민간에까지 강행하는 등 구복적인 신앙에 의존하려는 법왕의 정치가

그러한 문제의 실제적인 해결책이 될 수는 없었다.

 

* 부왕 : 28.혜왕      * 모후 : 해모연

  * 왕후 : 해씨      * 아들 : 진이왕 / 30.무왕

 

 

<백제 30대 무왕 = 부여장, 서동 (재위 600년 ~ 641년)>

‘삼국사기‘에 따르면, 무왕은 법왕의 아들이라고 나오지만, 삼국유사의 무왕열전에서는 강가에 사는 여인의 자식이라고 나온다.

 무왕의 어머니는 강가에 사는 과부였는데 어느 날 강에서 검은 용이 나타나 과부와 통정해서 아들을 낳았다고 전한다.

그 아들이 자라서 재주가 뛰어나고 용기가 있었는데 그가 백제의 왕위에 올라 무왕이 되었다고 한다.

한편, 전라북도 익산에는 무왕이 연못에서 사는 용의 아들이라는 탄생 설화도 전해 내려온다.

 

600년 법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는데 신라와 자주 충돌하였다.

재위기간 중 신라의 아막산성, 가잠성, 모산성, 늑노현, 주제성과 신라 북서쪽의 두 성과 서곡성, 독산성 등을 공격하였다.

 

한편 무왕은 고구려의 남진을 견제하기 위해 수나라에 조공을 바치고 여러 번 고구려 공격을 청하였다.

수나라가 멸망하고 당나라가 건국한 뒤에도 친선 정책을 전개하였다.

624년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당 고조로부터 ‘대방군왕 백제왕’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627년 군사를 동원하여 신라 침공을 시도하였으나, 당 태종이 백제와 신라의 화친을 권유했으므로 이를 중지하였다.

629년 미륵사를 완공하였다.

 

무왕 3년 관륵을 일본에 파견하여 천문, 지리, 역법 등에 대한 서적과 불교를 전달하였다.

 630년 사비 왕궁을 수리하였으나 가뭄으로 인해 중지하였다. 634년 왕흥사를 창건하고 궁남지를 건설하였으며,

미륵사를 건설하는 등 토목공사를 자주 벌이고 신라와의 전쟁이 잦아 국력을 소모하는 등 치세에 흠을 남기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탁월한 정치역량을 바탕으로 한 외교력으로 국가의 위상을 높였고 군사력을 크게 신장시킨

치적을 남긴 무왕은 무령왕, 성왕과 함께 근초고왕과 근구수왕의 전성기 이후로 무너져가는 백제를 되살린 왕으로 평가받는다.

 

* 부왕 : 29.법왕      * 모후 : 해씨

   * 왕후 : 선화공주      * 아들 : 31.의자왕

   * 왕후 : 사택왕후

      * 조카 : 부여교기

 

 

<서동요>

백제 제30대 무왕의 이름은 장이다. 어미가 과부가 되어 서울 남쪽 못 가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못의 용과 정을 통해 그를 낳았다.

어릴 때 이름은 서동으로, 재기와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 어려웠다. 평상시에 마를 캐서 파는 것을 생업으로 삼았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것으로 이름을 삼았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공주가 아름답고 고운 것이

짝할 사람이 없다는 말을 듣고 머리를 깎고 신라의 서울로 가서 마를 마을의 여러 아이들에게 먹이니,

여러 아이들이 그를 친하게 따랐다. 곧 노래를 지어 여러 아이들에게 가르쳐 부르게 했는데, 그 노래는 이러하다.

 

선화 공주니믄  (선화공주님은)

남 그즈지 얼어 두고  (남 몰래 시집가 두고)

맛둥방을  (맛둥 서방을)

바매 몰 안고 가다.  (밤에 몰래 안고 간다.)

 

동요가 서울에 가득 퍼져서 궁중에 이르자, 백관이 극간하여 공주를 먼 곳으로 귀양을 보내게 했다.

공주가 떠나려 할 때에 왕후는 순금 한 말을 주어 보냈다. 공주가 귀양소에 이를 무렵,

서동이 도중에 나와 절을 하며 모시고 가겠다고 했다. 공주는 비록 그 따라온 사람을 알지 못했으나

뜻하지 않게 그를 믿고 좋아했다. 이 때문에 그를 따라 가 몰래 정을 통했다. 그 뒤 서동의 이름을 알고서 동요의 징험을 믿게 되었다.

 

함께 백제에 이르러 왕후가 준 금을 내다 팔아 생활을 꾸리고자했다. 서동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

“이것이 무슨 물건입니까?”

“이것이 바로 황금입니다. 한 평생 부를 이룰 수 있습니다.”

“내가 어려서부터 마를 캐던 땅에 이것이 진흙처럼 흩어져 쌓여 있습니다.”

공주는 그 말을 듣고 크게 놀라 말했다.

“이것은 바로 천하의 지극한 보물입니다. 서방님께서 지금 금이 있는 곳은 아신다면, 이 보배를 부모님이

계신 궁전에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서동이 말했다.

“좋습니다.”

이에 금을 채취해서 쌓으니 구릉과 같았다.

용화산 사자사의 지명법사가 계신 곳에 이르러 황금을 수송할 계책을 물었다. 법사가 말했다.

“저는 신력으로 수송할 수 있으니 황금을 가져오십시오.”

 

공주는 편지를 써서 황금과 함께 사자사 앞에 갖다 두었다. 법사는 신통력으로 황금과 편지를 하룻밤에 신라 궁중에 옮겨 두었다.

진평왕은 그 신변을 이상하게 여기고, 서동을 더욱 존경하여, 항상 글을 보내 안부를 물었다.

서동은 이로 말미암아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올랐다. 하루는 왕과 부인이 사자사에 행차했는데, 용화산 아래 큰 못 가에 이르렀다.

그러자 미륵삼존이 못 가운데서 출현하였는데, 수레를 멈추고 치경을 드렸다.

부인이 왕에게 말했다. “이 땅에 대가람을 짓는 것이 제 소원입니다.” 왕은 허락하고는, 지명 법사가 있는 곳에 이르러

못을 메울 일을 물었다. 그러자 법사는 신통력으로 하룻밤에 산을 허물고 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었다.

곧 미륵삼존 불상과 전과 탑, 낭무(행랑)를 각 세 곳에다 만들고, 이름을 미륵사(전북 익산군 금마면 용화산에 있던 절)라 했다.

진평왕은 여러 공인을 보내 도왔는데, 지금도 그 절이 남아 있다.

 

 

 

<백제 31대 의자왕 (재위 641년~660년)>

무왕의 아들로 태어나 동왕 33년(632년) 정월에 태자로 책봉되었다.

용맹하고 결단력도 있다는 평가와 함께, 총명하고 우애가 깊어서 '해동증자 또는 '해동증민'이라는 찬사도 따라다녔다.

641년 3월에 아버지 무왕이 승하하자 그 뒤를 이었고, 당으로부터 '주국 대방군왕 백제왕'으로 책봉되었다.

즉위와 함께 사신을 보내어 당에 조공하는 한편, 몸소 주, 군을 돌며 죄수들을 재심하여 사형죄 이외에는 모두 사면하였다.

 

2년(642년)에는 친히 군사를 이끌고 신라의 미후성을 비롯한 40여 성을 빼앗았다.

이어 장군 윤충이 신라의 옛 가야 지역에 두었던 최대 거점인 대야성을 함락시키고 주민 1천여 명을 사로잡아

백제의 서부 지역 고을에 나누어 살도록 했다. 윤충은 이 공으로 말 스무 필과 곡식 1천 섬을 하사받았으며,

의자왕은 대야성을 함락시킨 그 달에 다시 한 번, 신라의 대당 교통로였던 당항성을 공격하여 당이 신라에 개입하는 것을

원천봉쇄하려 했지만, 신라의 구원요청을 받은 당의 항의를 받고 철수, 당에 사죄문을 보냈다.

 

한편 백제를 칠 원병을 청하려 고구려로 향했던 김춘추는 그곳에서 고구려가 신라를 도울 마음이

없다는 것만 확인한 채 돌아와야 했다. 이후 의자왕은 3년(643년)에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하였는데,

이후 고구려와 백제는 서로 연합 내지는 각자의 군사작전으로 신라를 압박하였다.

신라는 백제에 대한 반격을 단행해 백제의 7개 성을 공취했지만, 이듬해(645년)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치고자

신라에서 3만의 원군을 징발한 틈을 노려 의자왕은 다시 신라의 7성을 빼앗았다.

647년에는 장군 의직이 지휘하는 3천의 정예 보기가 무산성 아래에 주둔하면서 감물성, 동잠성을 비롯한

지금의 김천, 구미 등지를 습격했고, 이듬해에는 다시 신라의 서쪽 변경인 요거성을 비롯한 10여 성을 빼앗기도 했다.

그리고 좌장 은상이 정병 7천으로 신라의 석토산성을 비롯한 7성을 쳐서 차지했다.

 

한편 그 해 겨울에 신라의 김춘추는 당으로 건너가 태종의 신임을 얻고, 649년 당 고종이 즉위했을 때

진덕여왕이 태평송을 써서 보내는 등 당과의 외교를 긴밀히 하였다.

백제도 조공 사절을 보내 관계개선을 시도했으나, 당이 신라로부터 빼앗은 땅을 반환하라고 하자

12년(652년)부터는 당과의 교섭을 중단했다.

이후 당 고종이 즉위한 649년에 다시 사신을 보내지만 당의 태도가 변함이 없는 것을 깨닫고,

당과의 외교를 일체 중단한 채 독자노선을 걷기 시작하였다. 이후 백제와 당의 외교관계는 멸망시까지 단절되었다.

당과의 관계가 악화된 대신 고구려나 왜국과의 관계는 상대적으로 완화되어,

동왕 16년(656년)과 17년(657년)에는 왜국에 앵무새, 낙타, 당나귀 등의 희귀품을 선물하고 있다.

 

신라에 대한 백제의 공세는 계속되어 동왕 15년(655년)에는 고구려, 말갈과 연합해 신라의 북쪽 변경지대의 33성을 빼앗고,

19년(659년) 4월에는 다시 신라의 독산성과 동잠성을 쳐들어오는 등 맹렬하게 밀어붙였다.

신라는 대야성 함락 이후 옛 가야 지역을 대부분 잃어, 방어 거점을 낙동강 동쪽의 압량주(경산)로 옮길 정도로

줄곧 백제에게 밀리는 형국이었고, 빈번한 백제의 침공을 견디지 못한 신라는 마침내 당에 사신을 보내어 군사를 청할 생각을 굳힌다.

 

의자왕의 정치는 재위 15년(655년)을 기점으로 조금씩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태자궁을 화려하고 사치스럽게 지은 것을 시작으로, 16년(656년) 3월에는 궁인과 더불어

밤낮으로 사치스러운 잔치를 매일 열면서, 이에 대해 간하는 좌평 성충을 옥에 가둬버리기까지 한다.

옥사하면서 성충은 앞으로 반드시 큰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며 “육로는 탄현에서,

수로는 기벌포에서”막으라는 말을 왕에게 올렸지만 왕은 듣지 않았다고 한다.

17년(657년)에는 서자 41명을 모두 좌평으로 임명하고 식읍을 내린다.

 

기록에 따르면 19년(659년)부터 백제에는 온갖 괴변이 잇따라 일어났다고 한다.

거듭된 당의 경고를 무시하고 신라를 압박하자 마침내 당과 신라는 밀계하여 동왕 20년(660년) 마침내

수륙 18만 연합군으로 백제를 협공하였다. 이때 왕은 대신들을 불러 모아 작전회의를 열었지만,

대신들은 멀리서 와서 백제의 지리를 잘 모르는 당병을 먼저 치자는 쪽과 오랫동안 백제와의 전쟁에서 치른 패배로

백제에 대해 은연중 두려움을 품은 신라군부터 먼저 치자는 쪽으로 나뉘어 팽팽하게 맞섰다.

고마미지현에서 귀양살이하고 있던 흥수에게 사신을 보내 계책을 묻자 흥수는 성충과 같은 계책을 일러주었고,

이 계책은 흥수를 시기하던 간신들에 의해 결국 채택되지 못하고 끝내 백제는 멸망하고 말았다고 한다.

황산벌에는 계백에게 5천의 군사를 주어 막게 했지만, 백제군의 열 배나 되는 신라군의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계백과 그의 군사는 전멸하였다. 백강 어귀에서 당군의 상륙을 저지하려던 백제군은 대패하였고,

마침내 7월 11일에 신라군과 합류한 당병은 백제의 수도 사비성을 향해 육박해왔다.

 

 

사비성 부근에서도 결전이 벌어졌으나 백제군 1만이 전사하며 대패하고 수도인 사비성이 포위되자,

백제는 군사작전을 포기하고 대신 제사에 쓰는 소와 많은 음식들을 당군 진영에 보내기도 하고,

백제 태자가 직접 소정방에게 나아가 철군해줄 것을 요청하는 등의 외교전으로 선회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결국 왕은 태자 융과 함께 7월 13일에 웅진성으로 피난했으며, 사비에는 둘째 아들 태가 남아 왕을 자처하며 항전하다가 곧 항복했다.

그 후 7월 18일에 의자왕도 항복했다.

 

당은 이후 부여융을 웅진도독, 신라왕을 계림주대도독으로 삼아 동맹을 맺게 하는 의식을 웅진의 취리산에서 행한 바 있다.

당은 이후 의자왕에게 전승축하연에서 술을 치게 하기도 하고, 군사를 풀어 사비도성을 크게 약탈하여

젊고 건장한 백제인들을 살륙하면서 백제 땅에 설치한 웅진도독부를 통해 백제 땅을 당의 치하에 두고 직접 지배하려 했다.

이것은 백제인들을 자극해 3년에 걸친 백제흥복운동의 불길을 지핀 계기가 되었다.

 

그 후 왕자들과 대신 88명을 포함하여 백성 1만 2천 명과 함께 당의 낙양으로 압송되었고,

11월 1일에 낙양의 조당에 포로로서 바쳐져 당 고종 앞에서 문책을 들어야 했다.

(측천문루 앞에서 이루어진 이 자리에서 고종은 의자왕과 태자, 백제의 여러 신료들을 꾸짖은 뒤 용서했는데,

이것은 그들의 죄를 사함으로서 당의 신민으로 받아들이는 의례 절차이기도 했다.)

의자왕은 그 해에 병으로 죽었고, 금자광록대부, 위위경의 벼슬을 추증받고 낙양의 북망산에 손호, 진숙보 옆에 묻혔다.

이때 당 고종은 그의 장례에 백제에서 끌려온 옛 신하들이 참석하는 것을 허락했다고 전한다.

 

* 부왕 : 무왕      * 모후 : ?

   * 동생 : 부여교기

   * 왕후 : 군대부인 은고      * 아들 : 부여효      * 손자 : 부여문사

                                       * 아들 : 부여태

                                       * 아들 : 부여융      * 손자 : 부여문선 / 부여덕장

                                       * 아들 : 부여연 / 부여풍 / 부여용

   * 사촌동생 : 귀실복신

 

 

<백제부흥군 1대 부여풍 = 풍장, 풍장왕 (재위 661년~663년)>

부여풍은 인질로 왜국에 31년간 거주하고 있었는데, 서기 660년 사비성이 함락되고, 의자왕을 비롯한 2천 명의 왕족과 귀족,

백성이 당나라로 끌려가자, 무왕의 조카인 좌평 복신과 흑치상지, 도침 등을 중심으로 일어난 백제 부흥군에 의해

백제의 새로운 왕으로 추대되어 왜국의 원병과 함께 백제로 왔다.

 

그러나 복신이 도침을 살해하고 전권을 장악하게 되자 부여풍은 제사만을 맡게 되었다.

663년 복신과의 알력으로 복신을 죽이고, 고구려와 왜의 군사들을 동원하여 나ㆍ당 연합군에 맞섰으나

9월에 백강 전투에서 대패하고, 몇 사람의 근신만을 거느린 채 배 한 척에 의지해 고구려로 도주하였다.

 

고구려로 망명한 뒤 왜국에 남아있던 아우 부여용과 몰래 내응하기도 했으나, 668년에 고구려가 신라-당나라 연합군에게 멸망한 후,

당나라에 끌려가 중국 남부 지방으로 유형되었다고 한다. 이후의 생애는 알려지지 않았다.

 

기존의 한국의 역사 기록에서는 백제의 마지막 왕을 31대 의자왕으로 보고, 중앙정부가 붕괴된 상태에서

복신이나 도침 같은 부흥군 지도부에 의해 추대된 부여풍은 정식 백제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조선 시대 국학의 발전과 함께, 대의명분을 밝히고 정통과 비정통을 엄격하게 구별하는 성리학적 관점에서

백제 부흥군의 활동을 백제 역사의 연장선으로 보는 시각이 대두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안정복의 《동사강목》으로, 백제 부흥군이 나ㆍ당 연합군에 맞서 항쟁한

660년부터 663년까지의 3년간을 부여풍의 재위기간으로 보고 백제의 멸망을 663년으로 기록하였다.

 

* 부왕 : 의자왕 부여의자      * 모후 : 은고부인

 

   * 형 : 부여효      * 조카 : 부여문사

   * 형 : 부여태

   * 형 : 부여융      * 조카 : 부여덕장

   * 형 : 부여연

   * 동생 : 부여용      * 부인 : ?      * 아들 : 부여충승 / 부여충지

* 종숙부 : 귀실복신

 

 

 

728x90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