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19대 구이신왕 = (재위 420∼427년)>
전지왕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팔수부인이다. 제20대 비유왕은 그의 아들이다.
아버지인 부여영이 해충을 만나 부여설례의 반란 소식을 듣고, 서해의 섬에서 잠시 머물렀을 때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구이신왕은 중국대륙의 세력과 연결하여 백제가 장악한 황해연안의 해상무역권을 유지하고, 또한 팽창하는
고구려세력에 대처하려 하였다.
그것은 그전부터 형성된 백제와 남조의 송나라와의 외교관계를 일층 강화하는 것으로 전개되었다.
구이신왕은 423년과 425년에 송나라에 사신을 파견했고, 송나라로부터 진동대장군의 칭호를 받았다.
425년 이후는 매년 사신의 파견이 있었는데, 이는 송나라와의 관계가 보다 긴밀해졌음을 뜻한다.
이같은 백제와 송나라와의 결탁은 북조와 고구려가 결탁한 세력권과 동맹관계를 통해 치열하게 각축하고 있었던 결과이다.
* 부왕 : 18.전지왕 * 모후 : 팔수부인
* 왕후 : ? * 장남 혹은 이복 동생 : 20.비유왕
<백제 20대 비유왕 = 여비 (재위 427∼455년)>
구이신왕의 맏아들이다. (전지왕의 서자라는 설도 있으나 분명치 않다)
용모가 아름답고 언변이 좋았다고 한다.
429년 상좌평 부여신이 죽자 전지왕 때의 외척이었던 해씨 가문의 해수를 새로운 상좌평으로 임명했다.
같은해 (비유왕 3)에 중국 남조의 송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였고, 다음해에는 송나라으로부터 선왕이 받았던
‘사지절 도독 백제제군사 진동장군 백제왕’이라는 작호를 다시 받았다. 이는 송과의 동맹정책이 비유왕대에도 계속되었음을 뜻한다.
또한, 왜와의 동맹관계도 그대로 유지되어 사신이 오가고 있었다.
433년(비유왕 7) 신라에 사자를 보내 화친을 요청해, 선물의 교환을 통해서 양국의 수호가 성립하여,
120년 뒤인 553년(성왕 31)년 신라의 진흥왕에게 배신당하기 전까지 동맹 관계가 이어지게 되었다.
이와 같이 중국 남조 송나라, 신라, 왜국의 협조 체제를 가지고, 북조, 북위와 연결한 고구려에 대항하는 태세로 만들었지만,
455년 9월에 사망했다. 비유왕의 사인은 반란으로 추정되는데, 왕이 죽기 직전 흑룡이 나타났다는 기사가 있는 등
왕의 죽음을 암시하는 부분들이 있다.
왕이 죽은 직후(455년 10월)에 고구려가 백제에 침입했을 때에는, 신라에서는 백제를 구원하는 군이 파견되어
비유왕이 목표로 하고 있던 대 고구려 압박 외교는 성공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 부왕 : 19.구이신왕 혹은 18.전지왕 * 모후 : ?
* 왕후 : ?
* 아들 : 21.개로왕 경사
* 아들 혹은 손자 : 22.문주왕 모도
* 아들 혹은 손자 : 부여곤지
<백제 21대 개로왕 = 경사, 여경, 근개루왕 (재위 455∼475년)>
비유왕의 맏아들로서 왕위를 계승하였고, 22대왕인 문주왕의 아버지이다. 바둑을 잘 두기로 유명하였다.
고구려 장수왕의 간첩으로 파견된 승려 도림은 개로왕이 바둑을 좋아하는 점을 이용하여 왕의 신임을 얻은 뒤,
개로왕으로 하여금 고구려의 침공에 대비할 생각을 못하게 하는 한편, 화려한 궁궐의 축조 등 대대적인
토목역사를 일으키게 함으로써 국력을 피폐화시켰다고 하였다.
475년에 백제는 그 발상지이자 중심부인 한강유역 일대를 고구려에 빼앗기고 개로왕은 포로가 되어
백제 사람으로서 고구려에 망명하여 고구려군의 선봉장이 된 재증걸루와 고이만년에게 잡혀 살해되었다.
이 기록의 설명과는 달리 개로왕은 475년 이전부터 고구려의 침공에 대비하는 조치를 취했고,
469년에는 고구려의 남부지역을 선제공격하는 한편, 고구려와의 사이에 요충지인 청목령(개성부근)에 대책을 설치,
방어태세를 보강하였다.
472년에는 북위에 구원병파견을 요청하는 국서를 보내, 북위가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협공할 필요성과
그의 성공 가능성을 설득하려 했다.
이는 북위의 세력을 이용하여 고구려의 남침세력을 분산, 약화시키려는 개로왕의 외교적인 시도였으나 실패로 끝났다.
당시 남조의 송과 대치하고 있던 북위로서는 요동까지 아우르며 동북아시아의 대제국으로 발전하고 있는
고구려와 적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개로왕은 전대부터 결성된 제라동맹의 유지, 강화에도 힘썼던 것으로 보인다.
475년에 개로왕이 왕자(문주왕)를 보내 구원을 요청하자, 신라가 군대 1만명을 파견해준 것은 동맹관계에 의함이었다.
개로왕이 이처럼 고구려의 남침위협에 고심했음에도 불구하고 고구려의 침공을 받자 백제는 힘없이 무너졌다.
백제를 공격한 고구려의 병력은 3만이었는데, 백제는 불과 7일 만에 방어전선이 무너지고 도성이 공격을 받아
개로왕은 탈출하다가 잡혀 참수되고 말았다.
고구려의 3만 병력에 백제가 이토록 무참히 짓밟히게 된 중요한 원인의 하나는 개로왕의 내정의 실패였다.
개로왕은 왕권강화를 시도하여 왕족중심의 집권체제를 만들고 있었다.
개로왕이 458년에 송나라에 관작제수를 요청한 11명 가운데는 그의 두 아들 여도(문주왕)와 여곤(곤지)을 위시한 8
명이 왕족인 여씨이고, 당시 백제의 대세력이었던 해씨나 진씨는 없었다. 또한, 문주왕은 왕자로서
백제의 최고관직인 상좌평을 지냈다.
이러한 사실들은 개로왕이 구래의 대귀족들을 배제시키면서 왕족중심의 집권체제를 추구했음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왕권강화를 위한 시도이기도 했다.
개로왕이 왕궁을 장려하게 짓는 등의 큰 토목공사를 일으킨 것도 왕의 권위를 높이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구래의 대귀족세력들이 그대로 존속하는 속에서 그들을 배제시킨 왕족중심의 집권체제를 추구함은
백제 내부의 정치적 결속을 와해시키고, 백제왕실의 영도력 자체도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개로왕이 죽고 문주왕이 즉위하자 구래의 대귀족인 해구의 반란이 있었다.
이는 개로왕의 왕족중심 정권운영이 백제 지배층내에 왕실에 대한 적대세력을 만들고 있었고,
그로 인한 지배층의 내분이 심화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무리한 왕궁건축 등의 강행은 하층민을 위시하여 널리 국민들의 왕실에 대한 원망을 가져왔을 것이다.
도성이 함락되기 직전에 개로왕이 자신의 과오를 후회하며, “백성은 쇠잔하고 군대는 약하니,
비록 위급한 일이 있어도 누가 나를 위해 기꺼이 싸우려 하겠는가.”하고 탄식했다 함도,
개로왕이 널리 국민들의 신망을 잃고 있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장지는 미상이다.
* 부왕 : 20.비유왕 * 모후 : ?
* 왕후 : ?
* 아들 혹은 동생 : 22.문주왕 모도 * 손자 혹은 조카 : 23.삼근왕(문주왕의 아들)
* 아들 혹은 동생 : 곤지(문주의 동생)
* 손자 혹은 조카 : 24.동성왕 모대
* 증손 혹은 조카 : 25.무령왕 사마
<백제 22대 문주왕 = 문원왕, 문연왕, 모도, 여도 (재위 475∼477)>
제21대 개로왕의 아들이고, 제23대 삼근왕의 아버지이다.
한강유역일대를 빼앗긴 직후에 즉위하여 웅진으로 천도한 왕이다.
왕자로 있을 때는 부왕을 보좌하여, 최고관직인 상좌평을 역임하였다.
475년(개로왕 21) 9월 고구려에게 서울 한성이 포위되는 위기를 맞아, 동맹국인 신라에 구원을 청하러 파견되었다.
그러나 구원병 1만인을 얻어 돌아왔을 때는 이미 도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은 살해된 뒤였다.
문주왕은 이러한 상황에서 즉위하였다.
그해 10월 피난지인 웅진을 새 도성으로 정하고, 참담한 패전 뒤의 수습에 임하였다.
건국 이래의 중심지를 상실한 백제사회는 큰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한강유역에서 온 난민들을 정착시켜야 하였고,
본거지를 잃은 왕족 부여씨나 해씨, 진씨 등 부여족계통 구귀족들의 지배권력은 남부에 토착하고 있던
사택씨, 연씨 등 마한계 세력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
또한, 개로왕 때의 왕권강화 및 왕족위주의 집권체제에 억눌렸던 구귀족들의 반발로, 부여족계통 구귀족들 내부에 갈등이 있었다.
참담한 패전으로 왕실의 권위가 떨어졌으며, 난립된 귀족파벌들을 조정해야 하는 상황에서
성품이 부드러워 결단력이 부족하였으나 백성을 사랑하였고 백성 또한 그를 사랑했다고하는 그는
정치적 판단은 내리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귀족들의 통제에 실패한 문주왕은 재위 3년 만에 당시 정권을 장악한 병관좌평 해구의 자객에 의하여 피살되었다.
* 부왕 혹은 형 : 21.개로왕 * 모후 : ?
* 왕후 : 왕후 곽씨 * 장남 : 23.삼근왕
* 동생 : 곤지, 동성왕의 아버지
<백제 23대 삼근왕 = 삼걸왕, 임걸왕 (재위 477∼479년)>
477년 9월 부왕 문주왕이 피살된 상태에서 13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으므로 좌평 해구에게 국정을 위임하였다.
당시 백제는 고구려에게 쫓겨 웅진으로 천도한 475년(문주왕 1)이래로 왕실의 권위가 떨어지고,
귀족들이 발호하여 통제하기 어려웠다.
또한, 마한계 세력들이 새로운 집권층으로 등장하며, 구래의 부여계 귀족들이 주도하던 권력체계를 무너뜨림에 따라
정국은 더욱 어지러웠다. 이러한 와중에서 문주왕은 권력을 장악한 병관좌평 해구에 의하여 살해되고, 삼근왕이 즉위하였다.
해구의 권력은 이미 문주왕으로서도 제어하지 못하였으니, 어린 나이로 즉위한 삼근왕도 모든 정사를 그에게 일임할 수밖에 없었다.
478년 봄에 좌평 해구가 은솔 연신과 함께 대두성을 근거지로 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왕은 좌평 진남에게 군사 2,000를 주어 대두성을 공격하고 덕솔 진로에게 군사 500명을 주어 해구를 추격해 죽이게 했다.
그리고 공모자 연신이 고구려로 도주하자 그의 3족을 멸해 거리에 매달았다.
해구의 반란을 토벌한 것은 한성시대 이래의 또 다른 귀족세력 출신인 진씨 세력이었는데,
해구의 반란이 평정된 다음해 재위 3년인 479년 봄과 여름에는 가뭄이 매우 심했고
11월에 의문의 죽임을 당했다.
* 부왕 : 문주왕 * 모후 : 곽씨
* 왕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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