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 4대 대원의 = (793년)>
그는 대조영의 종손이자 문왕의 족제(=친척동생)이며 재위 중에 쫓겨났기 때문에 시호가 없다.
대원의는 문왕의 태자인 대굉림이 일찍 죽자 문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지만 시기심이 많고 성질이 포악해서
신하들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 종조부 : 고왕
* 족형(=친척형) : 문왕 족질(=친척조카) : 대굉림
<발해 5대 성왕 = 대화여 (재위 793년~794년)>
할아버지는 문왕이며, 아버지는 대굉림이다.
793년에 포학한 행동을 한 대원의가 왕위에서 쫓겨나자 그 뒤를 계승했다.
연호를 중흥으로 고치고 수도를 동경용원부에서 이전의 도읍지였던 상경용천부로 천도하였다.
발해 멸망까지의 수도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왕위를 계승한 지 몇 달 만에 사망한다.
그 재위 기간은 반년에도 못 미쳤다.
* 조부 : 3.문왕
* 아버지 : 대굉림 * 어머니 : ?
* 숙부 : 6.강왕
* 족숙 : 4.대원의
<발해 6대 강왕 = 대숭린 (재위 794년~809년)>
794년에 즉위한 제5대왕 대화여가 그해에 죽자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며 ‘정력’이라는 연호를 썼다.
당나라는 내시 은지첨을 파견해 책봉 했지만, 대흠무가 발해 국왕에 봉해진 것에 대해, 그 하위 작위인
발해군왕만이 제수 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에 대해 발해측은 발해 국왕의 서수를 요구 당에 사절을 보내
797년에 간신히 은청광록대부 검교사공 발해국왕에 봉해지기 이르렀다.
재위 중에 당나라에 대해 빈번히 사자를 파견해 교류해, 또 일본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경제, 문화 교류를 진행시켰다.
발해에서는 2대 계속 되어 단명의 왕이 재위 한 것에 의해 국내에 혼란이 발생했지만, 대숭린의 치세하에서 안정을 회복해,
더욱 국력의 발전을 보았다.
* 부왕 : 3.대흠무 * 모후 : ? 미상
* 황후 : ? 미상 * 아들: 7.정왕 / 8.희왕 / 9.간왕
<발해 7대 정왕 = 대원유 (재위: 809년~812년)>
강왕이 죽자, 그 아들 대원유가 즉위 해, 영덕으로 개원했다.
당나라는 중궁 원문성을 파견해 선왕을 조문함과 동시에, 대원유를 발해국왕에 책봉 하였다.
정책면에서는 문왕 대흠무 이래의 정책을 계승해, 당이나 일본과 밀접한 관계를 구축했다.
그러나 즉위 후 불과 3년으로 해 병사해 버린다.
* 부왕 : 강왕 * 모후 : ?
* 황후 : ? * 딸 : 연녕공주
* 동생 : 8.희왕 / 9.간왕 * 여동생 : 화속공주
<발해 8대 희왕 = 대언의 (재위 812년~817년)>
정왕이 병으로 죽자, 그 남동생인 대언의가 국무를 담당해, 당나라에 사자를 파견해 선왕의 죽음을 알렸다.
그 후 즉위 한 희왕은 연호를 주작으로 정하고, 다음 해 당나라의 내시인 이중민이 와서 그를 발해 국왕에 봉해주었다.
재위 동안, 당나라에 자주 사신을 보냈다. 또 이 시대의 교류의 특징으로서는 불교의 융성이 있다.
813년에는 고예진등 37명을 당에 입조시켜, 발해의 금은의 불상 각 1체를 헌상 하였다.
이것은 왕실의 불교에의 귀의했다는 방증이며, 사실 발해의 유적에서는 대량의 동, 도제의 불상이 출토되었다.
또 일본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사신 파견을 실시해, 경제적인 면 이외에도 문화 교류도 활발히 행해졌다.
발해사정사의 왕효렴등의 한시 등은 「문화수려집」에 수록되어 현재에 전해지고 있다.
* 부왕 : 강왕 * 모후 : ? * 형 : 7.정왕 * 동생 : 9.간왕
* 황후 : ?
<발해 9대 간왕 = 대명충 (재위 817년~818년)>
발해 제6대 왕 강왕의 아들이며 정왕과 희왕의 동생이다. 연호는 태시를 사용하였다.
황후는 순목황후 태씨로 룽터우산 고분군 M3 묘지의 비문에 기록되어 있다.
희왕이 병사하자, 그 남동생인 대명충이 즉위 해 연호는 태시로 개원했다.
그러나 머지않아 병사해, 대조영 왕계는 여기에 단절하게 되었다.
왕위는 대조영의 남동생 대야발의 자손인 대인수에 의해서 계승되게 되었다.
* 부왕 : 강왕 * 형 : 7.정왕 / 8.희왕
* 황후 : 순목황후 태씨 * 자녀 : ?
<발해 10대 선왕 = 대인수 (재위 818∼830년)>
대조영, 즉 고왕의 아우인 대야발의 4세손으로 알려지고 있다.
건흥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발해국을 중흥시킨 군주이다.
발해국은 제6대 강왕 대숭린이 809년에 죽은 뒤 그를 이은 정왕 대원유부터 희왕, 간왕에 이르는 3대왕의 재위기간이 너무 짧아
정치적 불안을 나타내며 국세는 도리어 위축된 느낌마저 보였는데, 818년(선왕 1) 선왕대에 이르러 침체된 국세를 회복하였다.
‘신당서‘에는 선왕이 “해북의 여러 부족을 쳐서 크게 영토을 넓혔다.”고 기록되어 있다. 발해국과는 예로부터 대립적인
태도를 보여왔던 송화강하류에서 흑룡강유역에 걸쳐 살고 있던 흑수말갈이 815년(희왕 3)에 다시 당나라에 조공하는 등의
독자적 움직임을 보이다가, 선왕대 이후 당나라와의 조공관계가 단절되었던 사실은 그러한 면을 반증해 주고 있다.
선왕에 의하여 넓혀진 영토의 구체적인 지역은 밝힐만한 자료가 없으나 발해 전국의 행정구역을 가리켜 5경 15부 62주라 하고
또 그 번영을 ‘해동성국’이라 표현하리만큼 대내외적인 치적을 남겼다.
당나라와의 관계를 보면 819∼820년의 2년간에 무려 16회의 조공사를 보내고 있을 뿐 아니라 그 뒤에도 매년 사신을 파견하고 있다.
한편, 일본과의 사신교환도 매우 활발하여 마치 종주국이나 된 기분으로 들떠 있는 일본에서도 이들을 맞이하는 데
막대한 비용이 들기에 827년에 이르러는 12년마다 한번씩 사신을 받기로 제한할 정도였다.
이것은 발해가 일본과의 외교적 교섭을 이용하여 관, 사무역으로 경제적 이익을 도모함에 따른 것이었다.
* 고조부: 대야발
* 아들 : 대신덕 * 손자 : 11.대이진 / 12.대건황
'역사 > 우리나라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후백제] 견훤, 아자개, 양길 (0) | 2011.12.18 |
---|---|
[발해] 대이진, 대건황, 대현석, 대위해, 대인선 (0) | 2011.12.17 |
[발해] 고왕, 무왕, 문왕 (0) | 2011.12.17 |
[백제] 위덕왕, 혜왕, 법왕, 무왕, 서동요, 의자왕, 부여풍 (0) | 2011.12.16 |
[백제] 동성왕, 곤지, 비지, 사법명, 백가, 무령왕(무녕왕), 성왕 (0) | 2011.12.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