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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23대 순조 = 휘는 공, 자는 공, 호는 순재 (재위 1800년-1834년)

순조는 정조의 둘째아들로, 어머니는 박준원의 딸 수빈이다.

비는 영안부원군) 김조순의 딸 순원왕후이다.

 

1800년(정조 24) 1월 세자에 책봉되었으며, 6월 정조가 죽자 11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1803년까지는 나이가 어려 영조의 계비인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했다.

정순왕후는 영조 때에 사도세자의 폐위를 주장했던 오빠 김귀주를 비롯한 벽파와 뜻을

같이하고 있었으므로, 수렴청정 기간 동안 정조 때 집권세력이었던 시파의 숙청에 주력했다.

 

또한 무너져가는 조선왕조의 사회질서를 지탱하기 위해 1801년 1월 오가작통법을 시행했으며 사교금압이라는

명분으로 신유사옥을 일으켜 천주교도뿐만 아니라 남인과 시파의 주요 인물들을 처형하거나 유배보냈다.

이때 이가환, 이승훈, 정약종 등을 처형하고, 정약용, 채제공 등의 관직을 빼앗고 귀양을 보내

남인과 시파는 대거 몰락했다.

천주교 탄압은 그 뒤에도 계속되어 1815년(을해박해)과 1827년에도 많은 교인들이 검거되어 처형당했다.

한편 수렴청정기에 공노비를 없애고 서얼허통을 시행하는 등 조선 후기의 신분질서

변화를 추인하는 정책이 나오기도 했다.

 

<세도 정치와 봉건왕조의 모순 심화>

순조는 1803년 12월부터 직접 국정을 관장했으나 권력의 핵심은 김조순을 비롯한 안동 김씨 일문이 장악했다.

김이익, 김이도, 김이교, 김조순, 김문순, 김희순, 김명순, 김달순 등이 주요인물로,

이들은 정부의 요직을 거의 독점하면서 중앙과 지방의 인사권을 장악했다.

 

이러한 세도 정치로 뇌물수수 등 부정과 부패가 극에 달했으며, 관직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안동 김씨 일족에 줄을 대는 것이 지름길이 되었다.

이에 과거 제도가 문란해지는 등 양반관료체제가 안정을 잃었을 뿐 아니라,

중간수탈의 가중으로 말미암아 국가의 조세체계도 크게 흔들렸다.

탐관오리의 중간수탈이나 토호의 세금 전가는 주로 일반 농민층에 집중되어 그렇지 않아도

지주제의 압박에 시달리던 농민층의 몰락을 촉진했다.

이른바 '삼정의 문란'이 그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홍경래 등이 부농, 사상을 규합하여 봉건체제의 수탈에 시달리던 농민들과

더불어 1811년 중앙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홍경래의 난은 무력에 의해 이듬해 진압되었으나, 정부는 사회경제적인 근본 수습책을

마련하지 않았으므로 이후에도 크고 작은 농민봉기나 모반사건이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세도 정치 견제 시도>

안동김씨 세도 정권이 정국을 주도하는 가운데 순조는 이를 견제하기 위한 여러가지 방책을 강구했다.

1819년 조만영의 딸을 세자빈을 삼은 것을 계기로 풍양 조씨 일문을 중용했으며,

1827년에는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겼다.

세자는 조만영을 비롯한 풍양 조씨의 세력을 끌어들여 김노, 홍기섭 등 새로운 정치세력을

결집하고, 김조순을 평안도관찰사로 내보내는 등 안동 김씨를 멀리하고자 했다.

 

그러나 1830년 세자가 젊은 나이로 죽으면서 안동 김씨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대리청정기에 정국을 장악했던 인물들은 유배되었으며,

순조의 안동 김씨 견제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뒤 안동 김씨 일문은 풍양 조씨의 협력을 얻으면서 정치적 기반을 더욱 굳건히 다져나갔다.

순조는 재위 34년 만에 45세의 나이로 죽었다.

 

<대외에 관한 이야기>조선은 후기에 와서 일부 이양선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순조 실록에 기록된 이양선 출현은 총 3번이 있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영길리국(영국)의 배였다.

이양선이 출현했을 때는 대부분 최대한 빨리 바다로 내보내고, 이들에 대한 기록을

청나라 조정에게 보고하는 것이 조선의 이양선에 대한 기본 대처방안이었다.

 

순조 16년 7월 19일에 충청 수사 이재홍의 장계가 올라왔는데, 충청 마량진 갈곶 밑에서

영길리국의 이양선이 출몰하였다고 했다.

첨사 조대복과 지방관 비인 현감 이승렬은 이양선에 있던 낯선 사람들과 언문이나 한자로

대화를 시도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장계에서는 "그들이 스스로 붓을 들고 썼지만 전자와 같으면서 전자가 아니고 언문과 같으면서

언문이 아니었으므로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했다. "이들의 배에 들어가보니 내부는 무척

컸고, 대장간에서 무기를 만들었습니다. 이들의 배는 무척 빠른 속도로 바다를 빠져나갔습니다."

라고도 했다. 이들이 영국인임을 알게 된 것은 그들이 준 한 폭의 서전에서

영길리국이라는 국명이 나왔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고 한다.

 

또 순조 32년 7월에도 홍주의 고대도 뒷바다에서 이양선이 나타났는데,

이들과는 한자로 대화를 하였다고 했다.

이들은 영길리국의 배이며, 청나라와 국력이 대등하여 조공을 바치치도 않는다고 했다.

영길리국의 정보에 대해 이야기하였고, 조선에게 교역을 하고 싶다는 청을 여러번 했으나,

조선 측에서는 이에 대해 강력히 거부하며, 이들이 원하는 물품들을 제공하고 보냈다고 했다.

 

* 부 : 정조선황제 (22대 정조)      * 모 : 효의선황후 김씨      * 사친 : 현목수비 박씨

   * 왕비 : 순원숙황후 김씨      * 아들 : 문조 익황제 / 대군(조졸)

      * 딸 : 장녀 : (조졸) / 명온공주 / 복온공주 / 덕온공주

      * 양자 : 25대 철종 장황제

   * 후궁: 숙의 박씨      * 딸 : 영온옹주

 

 

조선 24대 헌종 = 휘는 환, 자는 문응, 호는 원헌 (재위 1834년~1849년)

헌종은 1827년 효명세자(익종)와 신정왕후 조씨의 아들로 태어나 왕세손에 책봉되었다.

그가 태어날때 어머니 신정왕후 조씨는 익종이 옥을 아로새긴 나무를 담은 갑을 주는 꿈을 꾸고 나서 잉태하셨고,

탄생하신 날에는 한 무리의 학이 전상에서 날아 오래 돌다가 갔으므로, 궁중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한다.

 

어려서부터 외모가 준수하고 명랑하며 큰 목소리가 마치 금석에서 나오는 것 같으며

백일이 되기 전에 능히 일어섰다 한다.

유아기 때에 주흥사의 '천자문' 중에서 1백여 자를 통하셨는데, 아버지 효명세자는 여러번 봐서 눈에 익혀진 것

이리라고 생각하여 다른 글에서 시험하시면 문득 그 전부터 알던 것을 가리키며 이것은 아무자입니다. 하니,

효명세자가 이를 매우 기특히 여겨 ‘학문을 좋아하는 것이 앞으로 나보다 낫겠다.’ 하셨다.

 

<동궁 책봉과 즉위>

1830년(순조 30년)에 효명세자가 세상을 떠나자 동궁에 책봉되어 왕위계승자가 되었고,

1834년에 순조가 승하하자 8살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나이가 어려서 대왕대비인 순원왕후가 7년 동안 수렴청정을 했으나 15살이 되던 해에 직접 정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실권은 할머니인 순원왕후에게 있었고, 순원왕후의 친정인 안동 김씨와

그의 외가인 풍양 조씨간에 암투가 벌어졌다.

 

<정치>

헌종이 나라를 다스리던 시기는 조선 사회를 지탱해 왔던 신분 질서와 봉건 제도의 붕괴가 여기저기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때였다.

또 수재와 전염병 때문에 삶이 점차 어려워져 집을 버리고 떠돌아다니는 유민들이 급격하게 늘어났다.

 

이처럼 사회가 불안하다 보니 임금을 배반하여 군사를 일으킨 모반 사건이 2번에 걸쳐 일어났다.

1836년에는 충청도에 있던 남응중이 정조의 동생인 은언군의 손자를 임금으로 추대하고자 했으며

1844년에는 민진용이 역시 은언군의 손자를 임금으로 추대하려 했으나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2번의 모반 사건 모두 별다른 정치적 세력도 없는 중인과 몰락한 양반이 일으킨 것으로

 이 시기에는 누구나 왕권에 도전할 수 있었을 만큼 임금이 우습게 여겨지고 있었다.

 

<대외 관계>

1845년에는 영국 군함 사마랑호가 조정의 허락 없이 제주도와 서해안을 측정하고

돌아가는 일이 있었으며 1846년에는 프랑스 제독 세실이 로마 가톨릭 탄압을

구실로 삼아 군함 3척을 몰고 와 임금에게 국서를 전하고 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리고 1848년에는 외국의 배들이 경상도와 전라도, 황해도 등지에 빈번하게 출몰하여

백성들이 크게 동요했다.

바로 이때부터 조선은 서구 열강들의 통상 위협과 문호 개방 요구를 맞게 되었지만,

조선은 국제 정세에 어두웠던 탓에 별다른 대책도 세우지 않고 각 당의 권력 장악에만 신경썼다.

 

<천주교 박해>

1831년(순조 31년) 천주교 조선대교구(현재 천주교 서울대교구)가 승인되고,

서양인 천주교 신부로서는 처음으로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피에르 모방(1836년), 자끄 샤스탕(1836년),

 로랑마리조제프 앵베르(1837년) 등이 들어와서 천주교의 교세가 회복되고 신도는 증가되어 갔다.

 

조정에서는 천주교에 우호적인 안동 김씨에 대항해 보수적인 풍양 조씨가 집권하자

다시 박해 의논이 일어났다.

성리학적 가르침을 받고 자라난 헌종도 천주교에 대한 배격 논리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아직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던, 1839년(헌종 5년), 피에르 모방 신부 등의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천주교 선교사들과 유진길, 정하상 등의 평신도들이 새남터에서 대거 처형(→기해박해)되었고,

1846년에는 한국교회사 최초의 한국인 천주교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순교(→병오박해)하는 된서리를 맞았다.

 

<사망>

서화도 그렸으며 특히 서예에 능하여 몇편의 서한과 서예작이 전한다.

9년 동안의 친정 기간 동안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의 권력 투쟁에 휘말렸던 헌종은

국내는 물론, 조선 주변의 상황이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으며,

다가오는 열강 세력에 대한 대응책도 마련하지 못한 채 병환이 더욱 위독하여 자리에 누웠다.

1849년 6월 6일, 23살의 나이로 창덕궁의 중희당(에서 사망하였다.

 

* 조부 : 순조숙황제      * 조모 : 순원숙황후 김씨

   * 부 : 문조익황제(익종)      * 모 : 신정익황후 조씨

      * 원비 : 효현성황후 김씨

      * 계비 : 효정성황후 홍씨

      * 후궁 : 순화궁 경빈 김씨

      * 후궁 : 숙의 김씨      * 딸 : 옹주

 

 

조선 25대 철종 = 초명은 원범, 휘는 변, 자는 도승, 별칭은 강화도령, 호는 대용재 (재위 재위 1849년~1863년)

사도세자의 서자였던 은언군은 홍국영이 상계군을 정조의 후사로 추대하려던 사건과,

정조 사후 부인 송씨와 며느리인 신씨가 천주교를 비밀리에 신봉하던 것이 적발되어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사사당한다.

이후 순조는 이복동생 은언군을 살리려고 노력한 아버지 정조의 유지를 받아들여

은언군의 자녀들을 석방시키려 노력한다.

1817년 순조는 강화도 안에서 은언군 아들들의 집을 지어주는데 노론 대신들의 반발에도

순조는 석방이 아니니 번거롭게 굴지 말라면서 넘어간다.

 

1822년에는 위리안치형에서 형을 감형하여 은언군의 자식들의 집 주위의 가시울타리를 거두고,

혼인도 하게 해주어 일반 백성들처럼 살 수 있게 하는 조치를 내린다.

언제나 그렇듯 이번에도 반대 상소가 올라왔지만, 순조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830년 은언군의 자손들을 강화도에서 방면, 철종은 1831년 한성 경행방 사제에서 출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1836년 민진용의 옥사로 인해 그의 일족은 다시 강화도로 유배당하게 된다.

 

아버지 이광은 본부인 최씨에게서 아들 회평군으로 추봉된 원경과 영평군 경응을 낳고,

후실 부인인 용담 염씨에게서 원범을 얻었다.

1844년(헌종 10) 이복형 회평군 이명의 옥사로 인해 일가가 교동도로 유배되었다가

곧 강화도로 옮겨졌으며, 기본적인 왕족의 지위를 누리지 못하고 살았다.

 

<강화도 생활>

이후 이주한 철종의 가족은 강화도에 살았는데, 원래는 초가였으나, 철종 4년(1853)에

강화유수 정기세가 현재와 같은 기와집을 세우고 용흥궁이라 하였다.

아버지 이광은 은언군의 서자인데다가 은언군의 아들 상계군이 역모로 사사되었으므로

작위조차 없었다.

아버지 이광은 아들 철종이 왕위계승자로 내정된 뒤에야 전계군으로 추증되고,

다시 대원군으로 가증되는 형식으로 작위를 받았다.

 

강화도에서 농민과 행상으로 살던 그는 양순이라는 천민 처녀를 만나게 된다.

시골도령으로 자라다가 얼떨결에 왕위에 오른 철종은 강화에서 살 때 양순과 혼약을 맺은 사이였다.

하지만 천민은 궁녀조차 될 수 없는 엄격한 규범 때문에 양순을 궁궐로 데리고 갈 수 없었다.

양순을 잊지 못한 철종은 상사병을 앓는다. 그러자 왕가의 사람들은 양순을 은밀하게 죽여버린다.

일설에는 그의 방탕한 생활과 죽음의 원인을 양순의 죽음에서 찾기도 한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철종은 비탄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하다 젊은 나이에 죽고 만다.

 

<즉위>

1849년(헌종 15년) 헌종이 23세의 젊은 나이에 후사 없이 죽자 순조비 순원왕후의 명으로

궁중에 들어가 덕완군에 봉해지고 곧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이는 조선 왕조 왕위 계승의 기본적인 관례조차 무시한 행위였다.

철종이 항렬상 선왕인 헌종의 후사는 될수 없어도, 헌종의 부친인 익종의 후사가 될 수는 있었다.

그러나 그가 서출인데다가 강화도에서 나뭇꾼으로 있다가 왕이 되었다 하여 그의 재위기간 중

사대부가에서는 그를 강화도령이라 조롱하였고 이는 곧 그의 별명이 되기도 한다.

 

<즉위 초반과 섭정>

철종은 순조의 양자 자격으로 왕위에 올랐는데 즉위 직후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했으나

사실상 실권은 안동 김씨에게 있었다.

1851년(철종 2년) 김조순의 7촌 조카인 김문근의 딸을 왕비(철인왕후)로 맞아들였다.

이로 인해 김문근을 위시한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가 계속되었다.

 

학문적인 소양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정무는 세도가들에 의해 처리되었고,

철종 자신도 스스로 이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일가가 사사로운 인맥으로 관직에 오르게 된 어느 시골의 관리가 한성에 입경한 뒤에도

왕을 알아보지 못하고 자신이 군수에 임명되었다고 그의 앞에서 자랑하기도 한다.

 

<친정>

철종은 1852년부터 친정을 시작하였으나 사실상 실권은 안동 김씨에게 있었다.

그러나 그는 1859년 관리들의 부정 비리를 지적하는 등 비교적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였다.

1861년에는 중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훈련도감 소속의 마보군과 별기군의 군사를 이용하여

궁궐 숙위 강화를 시도하였다.

그럼에도 안동 김씨의 세도가 강하여 그는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펼칠 수 없었다.

 

그러나 세도정치의 폐단으로 인해 기존의 통치기강이 무너지고 삼정의 문란은 더욱 심해져

민중의 생활은 피폐해져 갔으며, 결국 1862년 진주 민란을 시발점으로 하여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곳곳에서 농민항쟁이 일어났는데 이를 임술 농민 봉기라 총칭한다.

철종은 봉기 발생 지역의 수령과 관속을 처벌하여 흐트러진 기강을 확립하고,

농민의 요구 조건을 일부 수용함으로써 민심을 수습하려고 하였다.

 

농민 봉기가 잠시 가라앉은 1862년 5월 이후에는 삼정이정청을 설치하여 삼정의 개혁을

공포하고 재야 유생층과 관료들에게 개혁책을 모집하였다.

삼정이정책은 주로 삼정의 문란을 개선하는 것에 초점을 두었으며, 각종 부가세를 혁파하고 도결이나

방결을 폐지하였으며, 환곡의 경우 토지세로 전환시키는 등 조세개혁의 원칙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나 구체적인 후속조치가 취해지지 않는 가운데 지배층의 이해관계가 얽혀 삼정이정책은 시행되지 못했다.

 

한편 1860년 경주 지방의 잔반인 최제우가 만든 신흥 종교인 동학이 창시되어 새로운 세력으로

확대되자 조정에서는 이를 탄압하고 교주인 최제우를 '혹세무민의 죄목으로 처형하였다.

천주교 또한 민중 속에서 계속 유행하고 있었으며, 조정에서는 이 또한 탄압하였다.

 

철종 조에는 안동 김씨가 세도정치를 행하고 있었으므로, 조선의 조정은 천주교에 대해 관대하였다.

 

<동학과 삼남지역의 민란>

최제우의 처형 이후 동학에서는 상소와 연판장을 올려 교주가 역적이 아니라며 신원을 요구하였다.

1862년 1월에는 향리, 아전들의 착취에 견디지 못하고 경상도 진주에서 난이 발생한다.

진주민란은 육지로 확산되었지만 곧 관군에 의해 제압된다.

 

62년 9월 진주민란의 자극을 받아 제주도에서 대정현 사람 강제검과 제주 봉개리 사람

김흥채 등을 중심으로 민란이 발생한다.

이들은 농민들의 지지를 받아 거병, 민란을 일으켜 9,10,11월에 걸쳐 3차례나 봉기하였고

3차 봉기에는 제주관아를 점령하여 1월까지 제주목 전체를 장악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조세를 지나치게 많이 거두는 것, 부역을 불공평하게 매기는 것, 또 환곡에서

부정이 많이 저질러지는 것 등의 이유로 발생하였다.

진주민란과 제주민란 당시 공격 대상은 주로 세금을 실질적으로 거두는 향리와 아전들에게 집중되었다.

그러나 제주관아를 점령했던 봉기는 1863년 1월에 진압되고 제주민란의 주동자인 장두인, 강제검,

김흥채는 체포후 압송되어 처형된다.

 

<사망>

1862년부터 철종은 줄곧 병석에 누워 있었고, 누워있거나 의관의 진맥을 보면서 겨우 정무를 결재하였다.

철종은 자신의 권력을 지지해줄 남인들이 집권층인 노론 벽파의 천주교 탄압으로 숙청당하고,

그 자신도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 속에서 자신의 뜻을 마음대로 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주색을 가까이 하여 건강이 점점 나빠지다가 1861년 이후로는 거의 병석에 눕다시피 했다.

1863년 음력 12월 8일에 재위 14년, 창덕궁의 대조전에서 병으로 승하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33살이었다.

 

1862년 이후 자주 약방의 입진을 받던 철종은 후계자를 지명하지 못하고 사망한다.

이에 안동 김씨 세력과 풍양 조씨 세력은 서로 옥새를 손에 넣으려 했고,

흥선대원군은 이미 신정왕후와 미리 밀계를 맺은 상태였다.

왕의 임종을 지켜본 신정왕후는 재빨리 어보를 챙겨 후계자를 선포한다.

그는 흥선군의 적실 제2자 명복을 익종대왕에 입승 대통한다고 선언하였고 이로서

고종이 즉위하게 된다.

이후 철종의 시신은 빈전에 안치되었다가 경기도 고양에 장지가 정해졌다.

 

* 부 : 순조숙황제      * 모 : 순원숙황후 김씨

* 사친 부 : 전계대원군(은언군의 서자)      * 사친 모 : 용성부대부인 염씨

   * 왕비 : 철인장황후 김씨      * 아들 : 원자

   * 후궁 : 귀인 박씨 / 귀인 조씨 / 숙의 방씨 / 숙의 범씨 / 숙의 김씨 / 궁인 이씨 / 궁인 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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