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48대 경문왕 = 응렴, 김의렴 (재위 861년 ~ 875년)>
제43대 왕인 희강왕의 손자로 아버지는 김계명이고, 어머니는 광화부인이다.
전왕인 헌안왕에게 아들이 없자 헌안왕의 딸인 영화부인 김씨와 결혼하여 왕위에 올랐다.
신라가 혼란하여 중앙 귀족들이 음모와 반란을 일삼았으므로 수습에 힘썼고, 황룡사를 개수하였다.
또, 뒤에 헌안왕의 작은 딸도 왕비로 삼았다. 아들은 김황(49.정강왕), 김정(50. 헌강왕), 김윤이고,
딸은 김만(51.진성여왕)이며, 동생으로 김위홍이 있었다.
왕위에 오르기 전에 일찍이 국선이 되었는데, 헌안왕이 불러 나라 안을 돌아다니면서 본 일을 묻자
선행을 행한 세 사람을 말하였는데, 첫째는 남의 윗자리에 있을 만하나 겸손하여 남의 밑에 있는 사람이요,
둘째는 부호이면서 검소하게 옷을 입은 사람이요, 셋째는 고귀한 세력가이면서 그 위엄을 보이지 아니한 사람이라 하였다.
이 말을 들은 헌안왕이 어짐을 알고 사위로 삼고자 하여 왕의 두 딸 가운데 한 사람을 택하게 하였다.
이에 낭도인 범교사의 조언을 받아들여 왕의 큰 딸과 결혼하여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경문왕은 불교에 비교적 많은 관심을 나타내었으므로, 낭도 중에는 승려가 많았다.
864년에 감은사에 행차하였고, 866년에는 황룡사에 행차하여 연등을 구경하기도 했다.
871년에는 황룡사구층탑을 개조하였다.
경문왕은 불교와 아울러 국학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었다.
864년에는 국학에 행차하여 박사로 하여금 경전의 뜻을 강론하게 하였다.
이러한 경문왕의 관심은 즉위한 직후 나라를 잘 다스려보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때 왕의 정치를 도운 사람들 중에는 국선출신이 많았는데, 곧 요원랑, 예흔랑 등이다.
이들은 국토를 유람하면서 은근히 왕을 위하여 치국의 뜻을 노래로 짓고, 이를 다시 사지인 심필을 시켜
대구화상에게 보내어 ‘현금포곡’, ‘대도곡’, ‘문상곡’ 등 3수의 노래를 짓게 하였는데,
경문왕이 이를 보고 크게 기뻐하여 칭찬하였다고 하는데 가사는 현재 전하지 않는다.
즉위 초 861년에 대사면을 실시하고 862년 이찬 김정을 상대등으로, 아찬 위진을 시중에 임명하였으며
866년에는 아버지 김계명을 의공대왕, 어머니 광화부인을 광의왕태후, 왕비를 문의왕비로 봉하고 왕자 김정을 태자로 삼는 등,
열의를 가지고 치국에 임하였지만 진골귀족간의 오랜 분쟁은 일시에 바로잡을 수 없게 되었다.
그 결과 중기 이후에는 반란사건이 계속 일어났다.
866년 이찬 윤흥과 그 동생 숙흥, 계흥의 모역과, 868년 이찬 김예, 김현 등의 모반, 874년 근종 등의 모역이 있었다.
그러나 경문왕은 하대사회의 혼란을 수습하지 못하고 죽었다.
한편, 경문왕은 산 뱀을 가슴에 덮고 잠자는 나쁜 습성이 있다고 알려져 있을 뿐 아니라,
당나귀의 귀와 같은 큰 귀를 가졌다는 소문도 퍼져 있었다.
이러한 이야기는 역시 당시의 혼란한 사회상 속에서 만들어졌을 것이다.
* 왕후=문의왕후 김씨(헌안왕의 큰 딸)
* 아들=김정(49.헌강왕) / 아들=김황(50.정강왕) / 딸=김만(51.진성여왕) / 윤
* 후비=의명왕태후 김씨(=문자왕후)
* 손자=김요(52.효공왕)
* 후비=후비 김씨(헌안왕의 둘째 딸)
* 후궁=궁인(궁예의 어머니) * 궁예=경문왕에게 버림받은 아들로 901년 후고구려를 건국
* 동생=김위홍(혜성대왕으로 추봉)
<신라 49대 헌강왕 = 정 (재위 875년 ~ 886년)>
할아버지는 희강왕의 아들 김계명이고, 할머니는 광화부인이며, 비는 의명부인이다.
동생으로 황(50대 정강왕), 만(51대 진성여왕), 윤이 있었다.
서자로 요가 있어 뒤에 효공왕이 되었고, 딸은 신덕왕의 비가 되어 의성왕후에 봉하여졌다.
즉위한 뒤 헌강왕은 불교와 국학에 대한 관심을 아울러 가졌다.
876년(헌강왕 2)과 886년에 황룡사에서 백고좌강경을 설치하고 친히 가서 들었다.
이러한 왕의 사찰행은 불력에 의한 국가의 재건과 왕실의 안녕을 위한 출행이었다.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망해사가 세워진 것도 헌강왕대이다.
879년에는 국학에 행차하여 박사로 하여금 강론하게 하였으며, 883년에는 삼랑사에 행차하여
문신들로 하여금 시 1수씩을 지어 바치게 하였다.
879년에 신홍 등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하였다.
그뒤 헌강왕대에는 신라가 태평성대를 누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880년에 왕이 좌우를 거느리고 월상루에 올라 서울의 사방을 바라보면서, 백성들의 집이 볏짚이 아닌 기와로써 이어졌고
밥할 때 장작이 아니라 숯을 땐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부유함은 신라 전체가 아닌 이른바 금입택과 같은 진골귀족의 부강함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지만
오히려 신홍 등의 반란은 하대사회의 모순을 드러내는 것으로 생각된다.
반면 헌강왕대에 신라 하대사회의 위기의식을 나타낸 기록이 보이고 있다.
879년에 왕이 나라 동쪽의 주군을 순행하였을 때 어디서 온지를 모르는 네 사람이 어가를 따르며 춤을 추었는데,
당시 사람들이 그들을 산과 바다의 정령이라 하였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는 삼국유사에도 실려 있다. 헌강왕이 포석정에 갔을 때 남산신이 나타나서 춤을 추니,
이 춤을 전하여 〈어무상심>이라 한다.
또 헌강왕이 금강령에 갔을 때 북악신과 지신이 나와 춤을 추었다. 그 춤에서 “지리다도파”라 하였는데,
이것은 지혜로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 미리 알고 도망하여 도읍이 장차 파괴된다는 뜻이라 한다.
한편, 동해안의 개운포에 놀러갔다가 동해 용왕의 아들이라고 하는 처용을 만나 데리고 왔다.
그리하여 〈처용가〉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처용을 지방 세력가의 자제로 보아 헌강왕대에 기인제도가 나타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또한 886년 봄에는 적국인 보로국과 흑수국 사람들이 신라와 통교를 청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헌강왕은 중국 당나라와 일본과의 교섭을 꾀하기도 하였다.
* 부왕=경문왕 * 모후=문의왕후 김씨
* 왕후=의명부인
* 딸=의성왕후(53.신덕왕의 비, 54.경명왕 모, 55.경애왕의 생모)
* 후비=의명왕태후 김씨(또는 문자왕후) * 김요=52.효공왕
* 동생=50.정강왕
* 여동생=51.진성여왕
* 동생=궁예 901년 후고구려를 건국
* 숙부=김위홍 혜성대왕으로 추봉.
<신라 50대 정강왕 = 황 (재위 886년~887년)>
할아버지는 희강왕의 아들로 의공대왕으로 추봉된 김계명이고, 할머니는 광의왕태후로 추봉된 광화부인이다.
아버지는 경문왕이고, 어머니는 헌안왕의 맏딸로 문의왕후에 봉하여진 영화부인이다. 정, 만, 윤과 형제간이다.
짧은 재위기간 동안에 887년(정강왕 2) 정월 황룡사에서 백좌강경을 설치하였고, 이찬 김요가 한주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군사를 보내어 토벌하였다.
5월에 병이 들어 시중 준흥에게 병이 위급하여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이니 아들이 없으므로 누이 만(진성여왕)으로
왕위를 잇게 하라고 부탁하고, 7월 5일에 죽었다. 보리사 동남에 묻혔다.
* 부왕=경문왕 * 모후=문의왕후 김씨
* 여동생=51.진성여왕
* 동생=궁예(901년 후고구려를 건국)
* 숙부=김위홍(혜성대왕으로 추봉)
<신라 51대 진성여왕 = 만, 원 (재위 887년~897년)>
할아버지는 희강왕의 아들로 의공대왕에 봉해진 김계명이며, 할머니는 광화부인으로 광의왕태후로 봉해졌다.
아버지는 경문왕이고, 어머니는 헌안왕의 장녀로 뒤에 문의왕후에 봉해진 영화부인 김씨이다.
형제로는 정(헌강왕), 황(정강왕), 윤 등이 있다.
신라 시대 3인의 여왕 중 마지막 여왕이다.
진성여왕은 즉위 직후 주, 군에 1년간 조세를 면제하고, 황룡사에 백좌강경을 설치하는 등 민심수습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887년(진성여왕 2) 2월 숙부이자 남편이었던 상대등 위홍이 죽자 정치 기강이 갑자기 문란해지기 시작하였다.
이와 함께 대야주에 은거하던 왕거인의 국왕 비판 등이 있었으며, 888년부터는 주, 군으로부터 세금이 들어오지 않게 되어
국고가 비게 되었다. 이에 관리를 각지에 보내어 세금을 독촉하였고, 이를 계기로 사방에서 도적이 봉기하게 되었다.
이때 원종과 애노가 사벌주(=상주)에서 난을 일으켰으나 이를 토벌하지 못하였다. 이 난을 계기로 계속해서 적당의 난이 일어났다.
891년에 북원(=원주)의 적수 양길이 부하인 궁예를 시켜 동쪽으로 원정하게 하여 명주(=강릉)까지 함락시켰다.
그 다음해에는 완산주(=전주)에서 견훤이 스스로 후백제를 건국하니 무주( 광주) 동남쪽의 군현이 모두 그에게 항복하였다.
895년에는 영주를 손에 넣은 궁예가 다시 저족, 생천을 거쳐 한주, 철원까지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신라 국가의 실질적인 통치영역은 경주를 중심한 그 주변지역에 그치고, 전 국토는 대부분 적당이나
지방호족세력의 휘하에 들어갔다.
또, 896년에는 이른바 적고적이 경주의 서부 모량리까지 진출하여 민가를 약탈하는 등 수도의 안위조차 불안해졌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중국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온 최치원은 894년에 시무10조를 제시하였다.
이 제의는 받아들여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진골귀족의 반대로 시행되지는 않았다.
최치원의 개혁안은 육두품 중심의 유교적 정치이념을 강조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는 것이어서 진골귀족의 이익과는
배치될 수 있었다.
이 개혁이 시대적 한계성 때문에 시행되지 못함으로써 신라의 붕괴는 막을 수 없었고 후삼국이 정립하게 되었다.
897년 6월 조카인 헌강왕의 아들 요(효공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그해 12월에 죽었다. 황산에 장시지냈다.
한편, 진성여왕 때에는 거타지 설화가 알려져 있는데, 그 내용은 고려 태조 왕건의 할아버지인 작제건이 용녀를
아내로 맞이하는 설화와 비슷하다.
* 부왕=경문왕 * 모후=문의왕후 김씨
* 숙부 혹은 남편=김위홍(혜성대왕으로 추봉)
* 동생=궁예((901년 후고구려를 건국)
<신라 52대 효공왕 = 요 (재위 897년 ~ 912년)>
어머니는 의명왕태후, 할아버지는 경문왕이고, 할머니는 헌안왕의 장녀 영화부인이며, 비는 이찬 예겸의 딸이다.
헌강왕이 사냥을 나갔다가 길에서 자색이 뛰어난 한 여자를 만났는데, 뒤에 헌강왕이 궁궐을 빠져나가
그 여자와 야합하여 태어난 아들이다. 뒤에 이 사실을 안 진성여왕에 의하여 헌강왕의 혈육이라 하여
895년(진성여왕 9)에 태자로 봉하여지고, 뒤이어 왕위를 물려받았다.
재위시 신라는 왕실의 권위가 떨어져서 지방에서 일어난 궁예와 견훤이 서로 패권을 다투는 형세였다.
우선, 지금의 청주나 충주 이북지역은 완전히 궁예의 세력권에 속하게 되었다.
궁예는 901년(효공왕 5)에 스스로 왕이라 칭하였고, 904년에 백관을 설치하였으며, 그 다음해에는 철원으로 도읍을 옮겼다.
신라는 907년에 서남쪽에서 점점 세력을 키운 견훤에게 일선군(선산) 이남의 10여성을 빼앗겼다.
한반도에서 궁예와 견훤의 세력다툼은 점차 열기를 더하여 갔다.
한편, 궁예의 부하 왕건은 903년 병선을 이끌고 금성 등 10여 군현을 공취하였다.
이후 서해의 해상권은 대체로 왕건의 수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909년에 왕건은 진도군과 고이도성을 공취하였으며, 견훤이 중국 오월에 보낸 사자를 나포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910년에 왕건은 나주를 다시 뺏기 위하여 포위 공격하여 온 견훤군을 대파하였다.
서해상에서 왕건의 전승은 그가 다가올 사회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발판이 되었다.
이상과 같은 정세 속에서도 신라왕실의 실정은 계속되어 911년에는 대신 은영이 효공왕의 천첩을 죽여
왕정을 경계하기까지 하였다.
죽은 뒤 사자사 북쪽에 장사지냈다고도 하고, 혹은 사자사 북쪽에서 화장하여 뼈는 구지제 동산 기슭에 묻었다고도 한다.
* 큰 할아버지=경문왕 * 큰 할머니=문의왕후 김씨
* 작은 할머니=김씨 * 작은 할아버지=김위홍(혜성대왕)
* 부왕=헌강왕 * 모후=의명왕태후, 문자왕후 김씨
* 왕후=왕후 박씨(이찬 예겸의 딸)
* 숙부=정강왕
* 고모=진성여왕
* 숙부=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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