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32대 효소왕 = 이홍, 이공 (재위 692년 ~ 702년)>
691년(신문왕 11)에 태자로 책봉되었다.
692년에 즉위하여서는 좌우이방부의 ‘이(理)’자가 왕의 이름과 같으므로 피휘(避諱)하여 좌우의방부로
관부의 명칭을 고치기도 하였다. 즉위하던 해에 대아찬 원선을 집사부 중시에 임명하여 국정을 위임하였다.
같은 해에는 고승 도증이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천문도를 왕에게 바쳤다.
천문도는 고구려에 전래된 진탁의 성도와 같은 것으로서 왕실권위의 상징으로 이용되었다.
또한, 이 무렵에 의학 교육기관인 의학을 설립하여 의학박사를 두고 본초경, 침경, 맥경 등의
중국 의학서를 교수하게 하였다.
695년에 서시전(과 남시전을 두었는데 이것은 지증왕대에 설치된 동시전과 더불어 왕경의 3대 시전으로서
물화의 유통을 쉽게 하였다. 이해에 자월(子月: 음력 11월)을 정월로 정하였다가 700년에 다시 인월(寅月: 음력 1월)을 정월로 바꾸었다.
698년에 일본국의 사신을 접견하였으며 699년에는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함으로써
양국과의 우호적인 외교관계도 유지하였다.
700년에 이찬 경영의 반란이 있었으며 이 사건에 연좌되어 698년에 중시로 임명되었던 순원이 파면되었다.
반란의 구체적인 원인은 알 수 없다. 다만, 어려서 즉위한 효소왕의 유약함과 왕자가 없음을 이유로
다음의 왕위계승을 위하여 일어난 것으로 짐작되며 쉽게 평정되었다.
702년 7월에 죽으매 망덕사 동쪽에 장사지냈다. 능은 경주 낭산 동남쪽에 있다.
<신라 33대 성덕왕 = 융기, 흥광 (재위 702∼737년)>
효소왕이 아들이 없이 죽었으므로 화백회의에서 그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왕비는 전비(前妃)는 704년(성덕왕 3)에 승부령이던 소판 김원태의 딸인 성정왕후(=엄정왕후)를
맞아들였으나 성덕왕 15년에 왕궁에서 내보내고, 이찬 김순원의 딸 소덕왕후를 계비로 맞이하였다.
<성정왕후>
3년(704년) 여름 5월에 입궁했다가 15년(716년) 3월에 출궁. 채색비단 5백 필과 밭 2백 결, 조 1만 섬을 받았으며,
강신공의 옛 집을 사들여 궁밖에서의 거처로 내려 주었다.
<내정>
정치적인 안정을 바탕으로 사회전반에 걸쳐서 전성기를 구가한 시기였다. 우선 정치적으로 국가의 행정을 담당하는
집사부의 중시가 일체의 정치적 책임을 지게 됨에 따라 전제왕권은 보다 강화될 수 있었다.
아찬 원훈이 성덕왕이 즉위하던 702년에 중시에 임명된 이래로 원문, 신정, 김문량, 김위문, 효정, 김사공, 문림, 선종,
윤충 등 10명의 인물이 성덕왕대에 중시로서 활동하였다.
특히, 이들 중에서 원훈, 사공, 선종의 경우에는 천재지이에 따른 정치적 책임을 지고 물러남으로써 중시가
전제왕권의 안정을 위한 방파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분위기 속에서 711년에는 왕이 백관잠을 지어 군신에게 제시하였다.
백관잠의 구체적인 내용은 전하지 않고 있으나, 아마도 전제왕권하에서 신하가 지켜야 할 계명을 적은 것으로서
유교적인 충군사상이 주요내용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성덕왕대에는 효소왕 때부터 활동하던 이찬 개원을 비롯하여 인품, 배부, 사공 등 4명이 상대등으로 재직하였으나
정치적으로는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외교>
703년에 아찬 김사양이 당나라에 조공한 이래 36년 동안 당에 파견된 신라의 사절 횟수는 43회로서
신라 중대왕실의 다른 어느 왕 때보다도 많았으며 사절의 내용은 주로 조공과 숙위, 그리고 하정이었다.
이러한 당과의 빈번한 외교적 교섭은 신라의 국제적 지위를 확고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국문물의 수입에도
적극적으로 기여하게 되었다.
704년에 입당사(入唐使) 김사양이 귀국하여 최승왕경을 바쳤고, 717년에는 숙위 김수충이 귀국하여
문선왕과 10철 및 72제자의 화상을 바치므로 국학에 봉안하였다. 728년에는 왕제인 김사종을 당나라에 파견하면서
신라 귀족자제들의 당나라 국학의 입학을 요청하였다.
<위민농본>
717년에 의학박사와 산박사(算博士)를 각각 1인씩 두었고, 718년에는 누각을 처음으로 제작하였다.
이러한 기술관계의 관직설치와 시설은 모두 유교적 이상정치인 위민 및 농본정책과 연결지어 생각할 수 있다.
성덕왕의 위민 및 농본정책은 특히 705년에 동쪽 주군의 백성들이 굶주려서 유망(流亡)하므로 관리를 파견하여 진휼하고,
706년에는 국내에 기근이 들자 창고를 열어 진휼하였으며, 6년에는 백성들에게 오곡의 종자를 나누어준 데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722년에는 모든 백성들에게 비로소 정전(=15세 이상의 남자에게 나누어 준 밭)을 지급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자영농민이 본래 소유하고 있던 토지에 대한 국가적 인정을 뜻하는 것으로서 농업생산력의 증대를 가져왔으며,
그 결과 국가는 농민으로부터 많은 세를 거두어들임으로써 재정적 기반을 튼튼히 할 수 있게 되었다.
<국방>
국방시책으로는 721년에 하슬라도(=강릉)의 정부(丁夫) 2,000명을 징발하여 북경지방에 장성을 축조하는가 하면
722년에는 모벌군성(=경주시 외동면)을 축조하여 일본의 침입로를 차단하기도 하였다.
731년에 일본의 병선 300척이 동해변을 습격하자 이를 공격하여 대파시켰다.
733년에 당나라의 요청을 받고 고구려의 고지에서 건국하여 신라와 사실상 국경을 접하고 있던 발해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그 결과 735년에는 당나라와의 외교적 현안이었던 국경문제를 패강(=대동강)으로 확정지었다. 이로써,
신라의 영토는 대동강에서 원산만에 이르는 이남지역으로 결정되었다. 성덕왕은 이 지역의 민심수습과 북방경영을 위하여
이찬 윤충, 사인, 영술 등을 파견하여 평양주와 우두주(=춘천)의 지세를 조사하게 하였다.
시호는 성덕이며, 이거사(移車寺)의 남쪽에 장사지냈다. 왕릉은 현재 경주시 조양동에 있다.
* 부왕=신문왕 * 모후=신목왕후 김씨
* 왕비=성정왕후(=엄정왕후. 소판 김원태의 딸)
* 아들=중경(태자였으나, 16년(717년) 사망. 시호는 효상태자)
* 후비=소덕왕후 * 아들=승경(34.효성왕)
* 아들=헌영(35.경덕왕) * 손자=건운(36.혜공왕)
* 딸=사소부인 * 외손=37.선덕왕
<신라 34대 효성왕 = 승경 (재위 737년 ~ 742년)>
형인 태자 김중경이 죽었으므로 724년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성덕왕이 죽자 즉위하였다.
어머니는 성덕왕의 계비인 소덕왕후이고, 비는 739년(효성왕 3)에 맞아들인 이찬 김순원의 딸 혜명이다.
효성왕은 즉위하면서 사정부의 승과 좌우의방부의 승을 모두 좌로 바꾸었는데 이것은 ‘승(丞)’자가 왕의 이름에 저촉되기 때문이다.
즉위하던 해(737) 3월에 이찬 정종을 상대등에 임명하여 귀족회의를 관장하게 하고 아찬 의충을 집사부의 중시에 임명하여
행정을 담당하게 하였다.
739년 의충이 죽자 이찬 신충을 중시에 임명하고, 왕제인 헌영(=경덕왕)의 관등을 파진찬으로 하여 태자로 삼았다.
또, 전 왕인 성덕왕 때에 정상화된 당나라와의 외교적 관계를 한층 강화하는 한편, 외교적 통로를 이용하여
중국의 선진문물을 수입하였다.
특히 738년에 당나라 사신 형숙이 신라에 올 때 당나라 현종이 그에게 ‘신라는 군자의 나라’라고 일러준 것을 보아도
당시 신라의 문화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이때 형숙은 ‘노자도덕경‘을 비롯한 서책을 왕에게 바쳤는데, 여기서 신라의 선진문물에 대한 수용 자세를 엿볼 수 있다.
740년에는 파진찬 영종의 모반사건이 있었으나 모두 평정되었다. 반란의 원인은 영종의 딸이 효성왕의 후궁이 되어
왕의 총애를 받았는데 왕비가 이를 시기하여 그의 족당과 더불어 후궁을 모살하였다.
이에 영종이 왕비의 족당을 원망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보면 단순한 여인들의 투기가 정치적 반란을 유발한 것 같으나
실제는 성덕왕대에 전성을 구가하던 중대 왕실의 전제왕권이 점차 약화되면서부터 그간에 축적되었던
정치적 모순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즉, 이것은 전제왕권 하에서 억압되었던 귀족세력이 왕권의 약화를 틈타 다시 세력을 뻗치기 시작하였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현상은 741년에 귀족세력의 대표인 상대등 정종과 경덕왕대에 상대등으로 활동하는 사인이
왕을 대신하여 열병한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재위 6년째되던 742년 5월에 죽으매 시호를 효성이라 하고, 유명에 따라 법류사 남쪽에서 화장하여 유골을 동해에 뿌렸다.
* 아버지=33.성덕왕 * 어머니=소덕왕후 김씨
* 왕후=왕후 박씨 * 왕후=혜명부인 김씨 * 후궁=파진찬 영종의 딸.
<신라 35대 경덕왕 = 헌영 (재위 742년 ~ 765년)>
효성왕의 동생이며, 아버지는 제 33대 왕 성덕왕. 어머니는 이찬 순원의 딸 소덕왕후이다.
왕비는 서불감 김의충의 딸 만월부인(=경수왕후). 효성왕에게 아들 없었기 때문에 742년 5월에 효성왕이 사망하여 왕위에 올랐다.
경덕왕 때에는 신라 중대 왕실의 전제왕권이 새로운 귀족세력의 부상으로 인해 흔들리기 시작하여,
왕권의 재강화를 위한 일련의 관제정비와 개혁조치가 취해진 시기였다. 개혁정치의 주역은 경덕왕과 신라 중대에서 행정책임자였던 집사부의 중시였다.
744년에 이찬 유정이 중시에 임명된 이래, 대정, 조량, 김기, 염상, 김옹, 김양상 등 7인의 인물이 경덕왕 때에 중시를 역임하였다.
특히, 747년에 중시의 명칭을 ‘시중’으로 변경하였으며, 또 국학에 제업박사와 조교를 두어 유학교육을 진흥시키고,
748년에는 정찰 1명을 두어 백관을 규찰하게 함으로써, 왕을 정점으로 하는 전제왕권체제를 유지하려 하였다.
이밖에도 749년에 천문박사 1명과 누각박사 6인을, 758년에는 율령박사 2인을 두었는데,
이것은 모두 위민의식에 바탕을 둔 이상적인 유교정치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기술적인 분야에 대한 제도적인 배려였던 것이다.
경덕왕의 개혁적 제도정비는 귀족세력을 제어하면서 전제왕권체제를 강화하려는 일종의 한화정책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제도, 개혁>
그러나 이러한 한화정책 추진은 745년에 귀족세력을 대표하는 상대등에 임명되었던 김사인에 의해서 비판을 받게 되었다.
756년에 상소를 통하여, 근년의 빈번한 천재지이를 들어 현실정치의 모순에 대하여 신랄하게 비판하고,
당시의 시중에 대해서 정치적 책임을 물었다. 이때의 비판 내용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나,
아마도 경덕왕에 의해서 추진되던 한화적 개혁정치가 비판의 대상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김사인의 비판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는 757년 병을 표면상 이유로 하여 상대등 직에서 물러나고,
왕의 측근 인물인 이찬 신충이 상대등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755년에 시중으로 임명되어 김사인의 비판을 받았던 김기가 오히려 757년부터는 적극적인 한화정책을 추진하였다.
즉, 757년에는 지방 9개주의 명칭을 비롯한 군현의 명칭을, 759년에는 중앙관부의 관직명을 모두 중국식으로 바꾸었던 것이다.
이러한 경덕왕과 집사부 중심의 한화적 개혁정치는 중대의 전제왕권체제를 재강화하여 연장시키려는 정치적 노력이었으나
성공한 것 같지 않으며, 다음의 혜공왕 때에 가서 모두 옛 명칭으로 환원됨으로써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
이것은 혜공왕 때에 귀족세력의 정치적 비중이 전제왕권보다 높아지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전제왕권을 유지하려는 경덕왕의 노력은 전제왕권을 안정시킨 성덕왕의 위업을 기리기 위하여
거대한 성덕대왕신종을 조성하기 시작한 데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외교관계와 말년의 정치>
경덕왕은 당나라와의 외교관계에 있어서는, 재위하는 동안 전통적 방법인 조공과 하정의 사신을 11회나 당나라에
파견함으로써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한편, 일본과의 관계는 즉위하던 해에 일본의 사신이 왔으나 받아들이지 않았고, 또한 753년에 일본의 사신이 이르렀으나
오만하고 무례하므로 왕이 접견하지 않고 돌려보냈다는 것으로 보아, 양국의 관계는 원만하지 못하였던 것 같다.
757년에 내외관리의 월봉을 혁파하고 다시 녹읍을 부활시켰다. 이것은 새로이 성장하는 귀족세력의 경제적인 욕구가 지금까지
세조만 받던 월봉을 혁파하게 하고, 녹읍의 부활을 제도화시킨 것이라 하겠다.
경덕왕 말기에 정치적으로 성장한 귀족세력은 763년에 경덕왕의 측근세력이었던 상대등 신충과 시중 김옹을 면직시켰다.
왕당파인 이들의 면직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은 기록상에 나타나지 않으나, 전제왕권에 대한 귀족세력의 반발의 결과로 보인다.
이러한 추측은 김옹이 물러난 뒤 약 4개월의 공백기를 거쳐, 764년 만종과 양상이 각각 상대등과 시중에 임명되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여기서, 양상은 나중에 상대등으로서 혜공왕을 시해하고 신라 하대의 첫 왕인 선덕왕으로 즉위하는 인물로서,
경덕왕 때에 이미 귀족세력을 대표하고 전제왕권에 도전하는 존재였다.
따라서, 경덕왕 말년의 정치는 재강화에 실패한 전제왕권과 귀족세력의 정치적 타협 위에서 존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모지사(牟祗寺) 서쪽 언덕에 장사지냈다고 하는데, 왕릉은 월성군 내납면 부지리에 있다.
* 부왕=성덕왕 * 모후=소덕왕후 김씨
* 왕후=삼모부인
* 왕후=만월부인 김씨(서불한 의충의 딸) * 아들=건운((36.혜공왕)
* 후궁=순정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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