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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8월

 

단테의 인생은 황제파인 기벨린당과 교황파인 구엘프당 사이에 벌어진

오랜 대립의 역사에 의해 결정되었다.

13세기 중반 이후 그들의 대립관계는 잔인하고 치명적이었다.

두 파는 번갈아가며 우선권을 획득했는데 그때마다 상대에게
무서운 형벌을 가했고 유형을 내렸다.

 

1260년에는 얼마동안 지배권을 쥐고 있던 구엘프당이 몬타페르티 전투에서 패했으나
(〈지옥편〉10곡, 32곡), 1266년에는 교황과 프랑스 군대의 지원을 받아 베네벤토에서
기벨린당을 물리치고 그들을 영원히 피렌체에서 쫓아버릴 수 있었다.

 

이러한 사건으로, 단테는 전후(戰後)의 긍지와 영토 확장주의의 분위기로 가득찬 도시에서
토스카나 전역에 정치적 지배력을 확대하려는 열망을 품고 성장할 수 있었다.

 

피렌체는 정치력을 신장했을 뿐만 아니라 지적인 영향력까지 행사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피렌체의 지적 우월권을 확보하는 데 지도적인 인물은 망명에서 돌아온 브루네토 라티니였다.

 

<지옥편〉에 묘사된 단테와 위대한 스승의 만남은 단순히 한 학생과 선생의 만남이라기보다는

 한 세대 전체가 그들의 지성적 사부와 만난 것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라티니는 젊은 세대 가운데 구이도 카발칸티, 포레세 도나티, 단테를 포함한 우수한 인재들에게

새로운 민중 의식을 일깨워주었고,

그들의 지식과 작가로서의 역량을 조국 피렌체를 위해 쓰라고 격려했다.

 

인간은 사회적(정치적) 존재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제를 단테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심지어 〈천국편〉(8곡, 117)에서 단테는 사람이 도시국가의 일원이 아니었다면

사정은 인간에게 훨씬 더 나빴으리라는 생각은 어떤 논쟁의 여지도 없다고 인정하고 있다.

<백과사전에서>

 

단테가 한 말씀중

'정치가는 정치를, 종교인은 종교를...'

 

<단테의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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