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24대 진흥왕 = 삼맥종, 심맥부 (재위 540년 ~ 576년)>
7세에 법흥왕의 양위로 왕이 되었는데, 즉위 당시에는 어머니인 태후가 섭정을 하였다.
544년, 흥륜사를 창건하였다.
이듬해 이사부의 건의에 따라 거칠부로 하여금 《국사》를 편찬하게 하였다.
551년, 연호를 개국으로 고쳤고 팔관회를 두었다.
가야 사람인 우륵이 신라에 악을23 보급하였다. 553년, 황룡사를 창건했다.
백제의 한강 유역을 침략하여 여러 성을 빼앗았는데, 이에 백제 성왕이 분하게 여겨 쳐들어온 것을 크게 격파하였다.
562년, 사다함의 공으로 대가야를 복속하였고 군대를 강화하였다.
또한 새로 개척한 땅에 순수비를 세웠는데, 현재까지 4개의 순수비(창녕, 북한산, 황초령, 마운령)가 전해진다.
568년에 연호를 태창으로 바꾸었으며, 572년에 다시 홍제로 바꾸었다.
576년, 원화 제도를 만들어 남모와 준정의 두 여인으로 하여금 300여명의 무리를 거느리게 했으나,
곧 두 여인이 서로 시기하다 남모가 죽는 일이 발생하자 원화를 폐하고 화랑을 제창하여 고구려, 백제 정벌의 원동력을 이루게 하였다.
말년에는 법운이라는 법명으로 중이 되었다고 하며, 왕비인 사도왕후 또한 비구니가 되어 영흥사에 머물렀다고 한다.
576년(진흥왕 37년), 43세의 나이로 승하했다. 그가 죽자 신라의 왕위는 태자 동륜이 572년에 죽었기 때문에
차남인 사륜(진지왕)이 승계하였다.
551년 나제 동맹. 신라, 백제는 고구려의 한강 유역을 공격하였다. 신라는 10개의 군을 얻고 백제는 6개의 군을 얻었다.
신라는 함경남도, 함경북도에 진출하여 순수비을 세웠는데, 고구려는 돌궐과의 전쟁으로 신라의 영토 확장에 대응할 수 없었다.
이때 백제는 신라에게 연합하여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하자고 제의하였고, 고구려는 경기도, 황해도, 한반도 북서부등
진흥왕이 새로 개척한 땅을 신라 땅으로 용인해 주는 대신 고구려 수도 평양성으로 진군하지 말것을 제의하였다.
진흥왕은 백제의 제의을 거절하고 고구려의 제의을 받아들였다.
신라는 경기도, 황해도, 한반도 북서부로 영토을 확장하고 백제로 진군하였으나, 백제가 화해을 시도하여 진군을 멈추었다.
이후 백제 성왕은 다시 신라을 공격하다가, 신라 병사에게 참수되었고, 백제는 남하하여 충청남도 부여로 후퇴하였다.
* 아버지=입종 갈문왕 구진 * 어머니=법흥왕과 보도부인의 딸 식도부인(지소부인)
* 동생=숙흘종 (김유신의 모친 만명부인의 아버지)
* 왕후=사도왕후 박씨 (박영실과 옥진궁주의 딸)
* 아들=동륜태자 * 손자=제 26대 왕 진평왕
* 아들=사륜(25.진지왕) / 구륜 * 딸=태양공주
* 딸=아양공주 * 외손자=김서현 (김유신의 아버지)
* 딸=은륜공주 / 월륜공주
* 후궁=숙명궁주 (태종 이사부와 지소태후의 딸) * 아들=정숙태자
* 후궁=보명궁주 (구진과 지소태후의 딸)
* 후궁=미실궁주 (미진부와 묘도부인의 딸) * 아들=수종전군 / 딸=반야공주 / 난야공주
* 후궁=소비 부여씨 (백제 성왕의 딸)
* 후궁=월화궁주 (가야국의 왕 이뇌왕과 신라 양화공주의 딸) * 아들=천주공 * 딸=덕명공주
* 후궁=금진궁주 (위화랑과 오도낭주의 딸) * 딸=난성공주
<지소태후>
입종은 법흥왕 재위기에 갈문왕에 임명되었으나 일찍 사망하였으며, 그로 인해 540년에 삼맥종이 7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게 되어 그녀는 왕태후가 되었다.
처음에는 1년간 보도부인이 섭정을 하였다가 541년부터 왕태후 지소가 섭정하게 되었다.
551년에 진흥왕이 연호를 고쳤는데, 섭정을 끝내고 친정을 하게 되면서 연호를 고쳤을 것이라고 본다.
지소태후는 이사부, 거칠부 등의 보좌를 받아 국정을 운영하였으며, 545년에는 이사부의 건의를 따라
거칠부에게 국사를 편찬하게 하였다. 또한 흥륜사를 완공하고 불사리를 받아들이는 등 불교의 중흥에도 힘썼다.
한편 당시 신라는 백제와의 동맹 하에서 고구려와 몇 차례 전쟁을 벌였는데, 진흥왕 11년까지의 전과는
지소태후의 섭정 하에서 일어난 것이다. .
지소태후는 원화 제도를 폐지하고 화랑을 조직했다고 한다.
지소태후는 자신의 딸인 숙명과 보명 등으로 하여금 진흥을 받들도록 하였고, 만호로 하여금 손자인 동륜의 비가 되게 하였다.
또한 진흥왕의 왕후이자 대원신통이었던 사도왕후를 싫어하여, 그녀를 쫓아내고자 하였으나,
사도가 이를 알고 진흥왕에게 고함으로써 무산되었다. 사도왕후에게 사실을 알려준 것은 지소태후의 아들인
세종의 부인이었던 미실이었는데, 세종이 미실에게 반하여 결혼하고자 했을 때,
지소태후는 미실이 박영실의 자손이라는 이유로 반대하려 하였으나 이사부와 상의하여 결국 혼인을 허락하였다.
지소태후는 미실이 사도왕후에게 비밀을 누설한 것을 알자, 그녀를 쫓아냈다가, 아들인 세종이 상심하자
다시 그녀를 불러들였다고 한다. 또한 지소태후는 여러 남편 및 애인을 거느렸고 많은 자손을 낳았다고 한다.
말년에는 위화랑을 따라 영흥사에서 불공을 드리며 살았다.
* 부친=23.법흥왕 * 모친=보도왕후 김씨
* 남편=입종 (법흥왕의 동생) * 아들=24.진흥왕 / 숙흘종
* 남편=태종 이사부 * 아들=세종전군 * 딸=진흥왕의 후비 숙명공주
* 남편=이화랑 * 딸=만호태후 (동륜의 아내, 진평왕의 모후)
* 남편=박영실 * 딸=황화공주 / 송화공주
* 남편=구진(태후의 침신) * 딸=보명궁주 (진흥, 진지, 진평의 후비)
<숙명공주>
진흥왕의 왕비이기도 했으며, ‘화랑세기’에만 등장하는 정숙태자의 어머니라고 한다.
어머니를 따라 진골정통이었으며, 진골정통으로 대를 잇게 하려는 지소태후의 뜻에 따라 이부오빠인 진흥왕의 후비가 되었다.
진흥왕은 어릴 때부터 왕후로 정해진 사도왕후를 사랑하였고, 숙명과는 어머니가 같은 남매 사이라고 하여
깊이 사랑하지는 않았지만 숙명의 배후 세력 때문에 무시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숙명은 진흥왕과의 사이에서 아들 정숙을 낳았고 지소태후의 입김으로 정숙이 태자가 되었다.
왕후가 되기 이전부터 궁중에서 이화랑과 사통하였으며, 왕후가 된 이후에도 이화랑을 사랑하였다.
이 사실이 들통나자 이화랑과 함께 도망쳤고, 이로 인해 정숙은 혈통을 의심받아 태자에서 폐출되고 숙명 역시 폐비되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아들을 태자로 옹립할 수 있었던 사도왕후가 이화랑과 숙명을 옹호하였기 때문에 용서를 받고
이화랑과 정식으로 결혼하게 되었다.
이화랑과의 사이에서 원광과 보리 등을 낳았다고 한다. 말년에는 남편 이화랑을 따라 영흥사로 들어가 불도에 힘쓰며 살았다.
<만호부인>
만호부인은 요절한 입종 갈문왕의 딸이 아니라 지소부인이 태후가 된 후 이화랑과 관계하여 태어난 자식이라고 한다.
만호부인은 배다른 형제인 숙명공주가 진흥왕과의 사이에서 낳은 정숙과 사통하여 딸 만룡을 낳았다.
후에 지소태후가 진골정통을 잇게 하기 위해 동륜태자와 결혼하였으며 진평왕이 즉위한 이후 태후가 되었다.
태후가 된 뒤에 진골정통을 지키기 위해 만룡을 보리와 결혼시키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또한 숙흘종과 사통하여 만명부인을 낳았다고 한다.
* 아버지=입종 갈문왕 * 어머니=지소태후
* 남편=동륜태자 * 아들=진평왕 / 진정 갈문왕 / 진안 갈문왕
* 남편=숙흘종 * 딸=만명부인
<미실>
어느 날, 미실의 외할머니인 옥진궁주는 칠색조가 자신의 가슴에서 날아 묘도에게 가는 꿈을 꾸었다.
옥진궁주는 꿈을 이상하게 여겨 묘도의 방으로 가 보았는데, 이때 미진부와 묘도가 서로 사랑하고 있었다.
옥진은 기뻐하며 두 사람에게 귀한 딸을 낳을 것이라고 예언하였는데, 이후 묘도는 미실을 낳았다.
미실은 본래 사다함과 사랑하는 사이였으나, 진흥왕의 생모 지소태후에 의해 지소태후와 이사부 사이에 태어난 아들인
세종과 결혼하게 된다.
세종의 아내였던 미실은 진골정통이었던 지소태후(=24.진흥왕 모)가 대원신통인 사도왕후(=24.진흥왕비)를 폐출하려 하자
사실을 사도왕후에게 고하였다. 왕후가 이를 다시 진흥왕에게 고해 태후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에 지소태후는 화가 나 미실을 출궁시키고, 법흥왕의 동생 진종의 딸인 융명을 세종의 새로운 배필로 맞아들였다.
한편, 미실은 출궁해 있는 동안 사다함과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세종은 미실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여 앓아눕기까지 하였고 아들을 생각한 태후가 미실을 다시 불러들였다.
당시 사다함은 전장에 나가 있었는데, 전장에서 돌아온 뒤 이 소식을 듣고 실망하여 '청오가'를 부르며 슬퍼하였고,
오래지 않아 친구인 무관랑의 죽음으로 슬퍼하다가 죽는다.
<무관랑> 무관랑은 어려서부터 사다함과 우정을 맺고 사우를 결의하였다. 562년에 사다함은 무관랑이 병사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7일 동안 통곡하다가 신의를 지켜 자결하였다.
한편 <화랑세기> 필사본에는 다른 이야기를 전한다. 사다함의 어머니가 일찍이 성관계가 문란하였다. 하루는 사다함의 사신인 무관랑을 자신의 방으로 불렀었다. 이 이야기가 밖으로 흘러나가자 수치심을 참지 못한 무관랑은 도망을 치려다 구지에 떨어져 다리를 다쳐 죽었다고 기록한다. 한편 사다함은 이 일을 애통히 여기다 7일 만에 병에 걸려 죽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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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세종은 사다함의 종제 이화랑의 추천으로 6대 풍월주가 되었으며, 훗날 미실의 애인이 되는 설원랑이 세종의 보좌를 맡는다.
미실은 천주사에서 사다함의 명복을 빌었는데, 그날 밤 꿈에 사다함이 나타나 "나는 너와 부부가 되기를 원했으니
내가 너의 배를 빌어 아들을 낳아야겠다"라고 말하더니 과연 미실은 얼마 뒤 하종공을 낳았다.
하종은 사다함을 빼닮아 당시 사람들이 사다함의 아이가 아닌가하는 의심을 했다고 한다.
왕태자 동륜이 장성하자 지소태후는 딸 만호를 동륜과 맺어주려 하였다. 이 때, 동륜의 모후이자 미실의 이모인 사도왕후는
미실에게 "네가 태자를 가까이하여 아들을 낳는다면 너를 부인으로 삼아주겠다." 라고 말하며, 동륜과도 정을 통하게 하였다.
한편, 이때 미실은 진흥왕의 명에 따라 왕을 섬기게 되었고, 왕후에 대등한 전주가 되었다.
또한, 미실은 세종이 공을 세우도록 하기 위해 그를 출병시키고, 자신은 그 사이에 세종의 보좌인 설원랑은 물론
자신의 동생 미생랑과도 정을 통한다. 진흥왕은 이러한 사실을 모른 채 미실을 총애하여 원화 제도를 29년 만에 부활시키고,
미실을 원화로 삼았다. 미실은 당시 풍월주였던 세종의 권한을 이어받아 낭도를 거느렸다.
보명은 본래 진흥왕의 후궁이었는데, 진흥왕의 태자였던 동륜이 미실에 이어 보명궁주를 연모하게 되었다. 보명은 이를 거부하였는데, 동륜이 보명궁의 담장을 넘어 궁주와 교합하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밤중에 홀로 보명궁의 담장을 넘던 동륜은 그곳에서 기르던 큰 개에 물려 부상을 입었고, 보명이 그를 안고 궁중으로 들어갔으나 새벽 무렵이 훙서하고 말았다.
이 일로 인해 미실과 동륜의 관계가 들통나고 미실은 궁 밖으로 쫓겨남은 물론, 원화의 자리에서 물러났다.이에 세종이 다시 풍월주의 지위를 회복하였으나, 미실이 세종에게 같이 물러나기를 청하니
세종은 설원랑에게 풍월주의 자리를 넘겨주었다.
이후, 사도왕후가 진흥왕에게 미실을 용서하기를 청하였고, 미실 또한 눈물로 용서를 구하니 진흥왕이 이를 받아들이고
궁으로 불러들였다. 이후 미실이 옥종공을 출산할 때가 되자, 그를 마복자로 삼는다.
미실은 이후 진흥왕이 병에 걸리게 되자, 사도와 함께 국정의 중심으로 등장하였다.
진흥왕의 아들인 금륜(25.진지왕)과 정을 통하여 왕후가 될 준비를 하는 한편, 진흥왕이 서거하자
사도태후와 함께 손을 써 진지왕을 왕위에 올린다. 그러나 막상 진지왕이 왕위에 오른 뒤 왕후의 자리는 미실이 아닌
지도부인에게 돌아간다. 진지왕이 왕위에 오른 뒤에도 미실은 동륜의 아들 백정(26.진평왕)과 정을 통하는 사이가 된다.
이후 진지왕이 여색을 좋아하고 방탕하였을 뿐 아니라 미실을 왕후로 봉하겠다는 약속도 지키지 않자 사도태후와 미실은
논의하여 태후의 오빠인 노리부를 통해 진지왕을 폐위하고, 동륜의 아들 백정을 왕에 추대하였다(26.진평왕).
진지왕 폐위 당시, 화랑은 문노를 따르는 호국선과 설원랑을 따르는 운상인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문노 등이 진지왕 폐위를 반대할까 우려한 노리부공과 사도태후는 호국선과 운상인을 합치고, 미실을 다시 원화로 세웠으며
세종을 상선, 문노를 아선으로 삼았다. 이후 미실은 설원랑과 문노의 사이를 중재하여 풍월주의 지위를 문노가 잇게 했고,
문노는 본래 세종을 존경하였으므로 곧 미실에 충성을 바치게 된다. 이후 문노가 국선의 자리로 풍월주가 되었으므로
이를 선화라 칭했다.
진평왕 즉위 초반에는 사도태후가 섭정하였는데, 미실은 새주가 되었고, 노리부는 상대등에 임명되었다.
이후, 진평왕은 보명과 미실을 각각 좌후와 우후에 봉하였다. 진평왕 7년인 585년, 자신의 동생인 미생이 10대 풍월주가 되자
미실은 하종으로 하여금 부제가 되게 하였다. 3년 뒤에는 하종이 미생의 뒤를 이어 11대 풍월주가 된다.
만년에는 세종, 설원 등과 함께 영흥사로 들어가 중이 되었다고 하며, 수많은 남성들 중 설원랑과의 관계를 가장 진실된 것으로
생각하였다 한다. 설원랑과의 사이에는 제16대 풍월주 보종공을 낳았는데, 마지막 아이라 깊이 총애하였다고 한다.
606년, 미실이 병에 걸리자 설원은 미실을 밤낮으로 간호하며 자신이 대신 앓기를 바랐다.
얼마 후, 설원이 미실의 병을 대신 앓고는 죽었다.
* 조부=선모와 보혜의 아들 아시공 * 조모=법흥왕과 벽화부인의 딸 삼엽공주
* 외조부=보현공주(지증왕의 딸)의 아들 박영실 * 외조모=위화랑과 오도의 딸 옥진궁주
* 아버지=미진부 * 어머니=묘도부인 * 동생=미생랑
* 이모=진흥왕의 비 사도태후 * 이모=지도부인(진지왕의 비)의 어머니 흥도부인
* 시어머니=법흥왕과 보도부인의 딸 지소태후
* 남편=세종공 * 아들=하종공 / 옥종공
* 정인=사다함공
* 정인=설원랑 * 아들=보종공
* 정인=24대 진흥왕 * 딸=반야공주 / 난야공주 * 아들=수종전군
* 정인=진흥왕의 아들, 진평왕의 아버지 동륜태자 * 딸=애송공주
* 정인=25대 진지왕
* 정인=26대 진평왕 * 딸=보화공주
<김용춘>
진지왕의 아들이자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아버지이다.
진평왕, 선덕여왕 시기에 중앙 정계에서 활약하였으며, 태종무열왕이 즉위한 이후 문흥대왕으로 추존되었다.
김용춘은 진지왕과 지도부인 박씨의 아들로 진지왕이 579년에 폐위되고 죽은 뒤에 왕위 계승권에서 멀어졌다.
용춘의 아들 춘추의 경우 진골의 신분으로 나타나고 있으나 용춘의 신분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진지왕이 폐위된 후에 성골에서 족강되었는지, 아니면 성골 신분을 유지하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부인은 진평왕의 딸인 천명공주로 602년에 아들 춘추를 낳았다.
622년(진평왕 44년)에 이찬의 관등에 있었으며, 내성사신에 임명되었다.
629년에는 대장군이 되어 김서현, 김유신을 부장으로 이끌고 출진, 낭비성을 함락시켰으며,
635년(선덕여왕 4년)에는 주현을 돌아보며 위문하였다.
645년에는 황룡사 구층목탑 건축을 주관하였고, 이후에는 더 이상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아들 춘추가 왕위에 즉위한 654년에 문흠대왕으로 추존되었다.
* 아버지=진지왕 * 어머니=지도부인
* 비=천명부인(26.진평왕의 딸) * 아들=김춘추(29.태종무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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