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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22대 안장왕 = 흥안, 안 (재위 519년~531년) >

498년(문자왕 7년)에 태자가 되어 519년에 문자명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중국 남북조 왕조에게 외교를 계속하였다. 양나라에서는 520년 2월에 ‘영동장군 도독영평이주제군사 고구려왕’으로 책봉 되었지만,

이 때 양나라가 파견한 책봉사 강법성이 해상에서 북위군에게 잡히고, 낙양으로 보내졌다.

동년 9월에는 북위에서 ‘안동장군 영호동이교위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으로 책봉 받았고, 여전히 남북 양조로부터

높은 평가를 계속 받았다.

 

재위 5년인 523년에 음력 8월에 군사를 보내 백제를 침공하였다.

재위 11년인 529년에 음력 10월에 오곡(五谷)에서 백제와 싸워서 이기고 2천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재위 13년인 531년에 음력 5월에 왕이 죽었는데 귀족들에게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 부왕=문자명왕     * 모후=?

   * 왕후=?

   * 동생=고보연(23대 안원왕)

   * 부인=한씨

 

 

<안장왕이 태자 시절 만난 한 여인과의 사랑 이야기>

519년 고구려의 안장왕이 즉위할 무렵 오늘의 행주산성과 오두산성 일대인 한강 하류의 이 전략적 요충지

고양시는 백제의 영토로서 개백현이라고 불렸다.

 

그 해는 백제 무령왕 19년. 도읍은 오늘의 충남 공주인 웅진성이었다.

또한 신라는 법흥왕 6년, 중국은 북위와 양이 겨루던 남북조 시대 말기였다.

 

이러한 무렵에 백제 개백현에는 한씨라는 호족이 살고 있었는데, 그에게는 한주라는 아리따운 딸 하나가 있었다.

한은 성이니까 그녀의 이름은 우리말로 하면 구슬아씨였을 것이다.

안장왕은 장수왕의 손자인 문자명왕의 아들로서 태자 때의 이름은 흥안이라고 했다.

 

이 흥안태자가 어느 날 부왕의 허락을 받고 상인으로 변장한 채 강을 건너 개백현으로 몰래 넘어와 적정을 살피다가

그만 백제 군사들에게 발각되어 달아나게 되었다.

 

정신없이 도망치던 흥안태자가 막다른 골목으로 쫓기자 다급한 나머지 어느 큰 저택의 담장을 훌쩍 타넘어 몰래 숨었는데,

그 집이 바로 구슬아씨의 집이었다. 그렇게 해서 흥안태자와 구슬아씨는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었다.

 

천생연분이었는지 씩씩하고 잘 생긴 고구려의 태자와 아리따운 백제의 처녀는 그만 첫눈에 반해버리고 말았다.

며칠 숨어 지내는 동안 두 청춘 남녀의 가슴에는 사랑이 싹트고 샘솟아 그만 넘어서는 안 될 선까지 넘고야 말았다.

 

흥안태자는 그렇게 구슬아씨를 사랑의 포로로 만들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의 신분을 털어놓고 이렇게 약속했다.

 

“나는 사실 고구려의 흥안태자라오. 언제까지나 이렇게 숨어 있을 수는 없기에 사실을 밝히고 내 나라로 돌아가기 전에

당신에게 약속을 하고 가려 하오. 내 반드시 군사들을 거느리고 돌아와 그대를 모셔가리다! 그리고 정식으로 혼인을 하여

당신을 대고구려의 황후로 맞이할 터이요!”

 

그리고 나서 흥안태자는 밤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런데 한 번 간 태자는 달이 가고 해가 바뀌어도 돌아올 줄을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일이 벌어졌으니, 그것은 새로 부임한 성주가 구슬아씨의 미모가 매우 빼어나다는

소문을 듣고 혼인을 강요해온 것이었다.

 

그 성주가 미혼이었는지, 아니면 유부남인데 구슬아씨를 첩으로 삼으려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거나 구슬아씨는 이미 정혼한 남정네가 있다면서 한사코 거절을 했다.

마침내 성주가 애가 타고 노해서 구슬아씨를 잡아들여 매질을 하고 그래도 말을 듣지 않자 옥에 가두고 말았다.

 

성주가 매일같이 혼인을 강요하며 야욕을 채우려고 하자 구슬아씨가 이런 시조를 읊어 자신의 매서운 절개를 표시했다.

 

-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든 없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

독자들은 이 시조가 고려 말의 충신 정몽주가 읊었던 ‘단심가’로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그때 한주가 읊었다는 게 바로 이 단심가라고 했다.

 

어쨌든, 이 노래를 전해들은 성주가 제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을 알자 구슬아씨를 아예 죽여 없애기로 작정했다.

그 며칠 뒤가 성주의 생일이었다. 성주가 구슬아씨를 불러내 물었다.

“마지막으로 묻겠노라! 너는 내 각시가 될 터인고? 만일 또다시 거절한다면 오늘이 바로 네 제삿날이 되리라!”

“하늘이 무서운 줄 아시오! 내가 죽으면 내 제삿날이 되려니와 만일 내 뜻을 꺾지 못한다면 오늘이 성주의 제삿날이 되리라!”

 

성주가 분기충천하여 “저 년 죽여라!” 하고 악을 쓰는데, 갑자기 사방에서 와 하는 함성이 울리더니

수십 명의 장사가 창검을 들고 잔치판에 뛰어들더니 성주의 부하들을 마구 죽이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들은 계속해서 고함쳤다.

“악독한 성주 놈을 죽여라!” “고구려 군사 수만 명이 강을 건너왔다!” “모두 항복하지 않으면 죽는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 구슬아씨의 목숨이 위급한 순간에 고구려 군사들이 나타난 것일까.

사실은 이러했다. 고구려로 돌아간 흥안태자는 부왕이 세상을 뜨자 뒤를 이어 즉위했는데, 단 하루도 구슬아씨를 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개백현을 수복하고 한주를 구출해오는 장수에게는 천금의 상과 높은 벼슬을 내린다 하고, 중신들을 불러 계책을 논의했다.

 

이때 안장왕의 누이 안학공주를 사모하는 을밀선인이 앞으로 나서서 자신이 군사를 거느리고 개백현을 수복하고

한주를 구해오겠노라고 했다. 그 대신 성공하면 안학공주와 혼인을 허락해달라고 했다.

을밀선인은 고국천왕 때의 명재상 을파소의 후손이라고 한다.

 

그렇게 해서 을밀선인이 특공 결사대를 이끌고 그 전날 밤에 몰래 강을 넘어 숨어 있다가 성주의 잔치판을 급습한 것이었다.

무사히 구슬아씨를 구해낸 을밀선인이 말했다.

 

“지금 대왕께서 저 강 건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봉화를 올리면 군사를 휘몰아 이내 강을 건너오실 것입니다!”

 

구슬아씨가 그 말을 듣자 을밀선인과 그의 부하들을 안내하여 고봉산으로 올라가 봉화를 올렸다.

강 건너편에서 대군을 거느리고 있던 안장왕이 그 봉화를 보자 이내 도강작전을 개시하여 질풍노도처럼 개백현을 휩쓸고

마침내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았다. 동시에 사랑하는 구슬아씨를 구출하여 고구려의 도성 평양성으로 데려간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안장왕은 531년 재위 13년 만에 세상을 떠났는데, 후사가 없었으므로 아우 보연이 왕위를 이었다고 했으니,

이로 추측컨대 한주가 왕후가 되었든 후비가 되었든 두 사람 사이에서는 아마도 아들이 태어나지 않았던 모양이다.

 

 

<고구려 23대 안원왕 = 곡향강상왕, 향강상왕, 안강상왕, 보연, 연 (재위 531년 ~ 545년)>

장수왕 이후에 중국의 남북조에 대해 조공을 계속하였다.

북위에는 532년에 '사지절 산기상시 영호동이교위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으로 책봉 되었고 동위 시대인 534년에 표기대장군이

더해졌다. 양나라에서는 안장왕대의 작호인 '영동장군 도독영평이주제군사 고구려왕'을 그대로 계승했다.

 

재위 3년인 533년에 왕자 평성을 태자로 삼았다.

 

536년 봄과 여름에 크게 가물었으므로, 사신들을 보내 굶주린 백성들을 위무하고 구제하였다.

음력 8월에 누리(=우박)의 재해가 있었다.

 

재위 10년인 540년에 음력 9월에 백제가 우산성을 포위하였으나 기병 5천 명을 보내 싸워서 물리쳤다.

542년 음력 3월에 바람이 크게 불어 나무가 뽑히고 기왓장이 날아갔다. 음력 4월에 우박이 내렸다.

재위 15년인 545년 음력 3월에 죽었다.

 

* 부왕=문자명왕     * 모후=?

   * 왕후=정부인

   * 후궁=중부인     * 아들=고평성(24대 양원왕)

   * 후궁=소부인     * 아들=이름이 기록이 되지 않음.

 

 

<고구려 24대 양원왕 = 양강상호왕, 양강왕, 평성 (재위 545년 ~ 559년)>

533년에 태자가 되었다. 545년 3월에 선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일본서기-백제본기 ; 양원왕의 즉위에는 고구려 내부에 내분이 있었다고 한다.

안원왕에게는 정부인이 있었는데 아들이 없어서, 중부인의 8살 아들인 평성을 왕(양원왕)으로 옹립 하였다.

그러나 소부인에도 아들이 있었는데, 안원왕이 병에 걸리면서, 중부인의 친가인 추군과 소부인의 친가인 세군이 왕위를 다투었고,

이 과정에서 추군이 이기고, 세군 2천명을 몰살하였다고 한다.

다만, 삼국사기의 태자 옹립 기사(533년)와 백제본기 8세 즉위(545년)와는 상충된다.

 

북조의 동위, 북제만 조공을 계속하고 남조와의 교류는 중단하였다.

북제에서는 550년에 ‘사지절 시중 표기대장군 영호동이교위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으로 책봉 되었다.

 

547년에 백암성을 고쳐 쌓고, 신성을 수리하여 전쟁을 대비하였다. 548년에 군사 6천 명으로 백제의 독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신라의 장군 주진이 구원군을 이끌고 와서 실패하였다. 550년에 백제가 쳐들와서 도살성이 함락되었다.

이에 백제 금현성을 공격하였으나, 이 틈을 노린 신라군에게 고구려 두 성을 함락되었다.

551년에 돌궐군이 쳐들어와서 신성을 포위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자 백암성으로 옮겨 공격하였다.

이에 양원왕은 장군 고흘에게 군사 1만 명을 주어 싸우게 하여 1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이 해에 다시 신라가 쳐들어와서 10개의 성이 함락되었다. 552년에 장안성을 쌓았다. 554년에 백제 웅천성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했다.

재위 13년인 557년에 왕자 양성을 태자로 삼았다. 그 해 10월에 환도성의 간주리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사형 당했다.

재위 15년인 559년에 죽었다.

 

* 부왕=안원왕     * 모후=중부인

   * 왕후=?     * 아들=고양성(25대 평원왕)

 

 

<고구려 25대 평원왕 = 평강상호왕, 양성 (재위 559년 ~ 590년)>

양원왕 재위 13년인 557년에 태자로 책봉되었고, 559년에 즉위하였다.

 

중국의 진, 수, 북제, 후주 등 여러 나라와 친교를 맺었으며, 586년 장안성으로 천도하였다.

 

평원왕의 재위는 수나라가 대륙을 통일하고 점차 고구려를 압박해오던 시기이자, 백제와 신라의 나제동맹이 깨어져서

삼국이 서로 대립하던 시기이다. 또한 온달 장군평강공주 설화의 바탕된 시기이기도 하다.

 

평원왕은 재위 7년인 565년에 왕자 원을 태자로 삼았고, 586년에 장안성(현재의 평양 시가지 일대)으로 옮겼다.

 

589년 중국에서는 수나라가 남조의 진나라를 멸망시켜 중국을 통일하였다.

이에 평원왕은 수나라가 쳐들어올 것을 우려하여 군사력을 강화시켰다. 재위 32년인 590년에 죽었다.

 

* 부왕=양원왕     * 모후=?

   * 왕후=?      * 아들=고원(26대 영양왕) / 고건무(27대 영류왕) / 고태양(보장왕의 아버지)

   * 딸=평강공주     * 사위=온달

 

 

<온달 장군>

고구려의 장군이다. 살림이 구차하여 구걸로 어머니를 봉양했고, 남루한 옷차림으로 거리를 다녔기 때문에 바보 온달로 불리었다.

 

뒤에 평원왕의 반대를 물리치고 그를 찾아온 평강공주와 결혼한 후 학문과 무예를 익히고,

해마다 음력 3월 3일에 열리는 사냥 대회에 참가하여 좋은 성적을 올렸다.

후주의 무제가 요동을 거쳐 고구려에 침입하자 선봉에 나서 승전하여 제1의 전공자가 되고, 대형 작위를 받았다.

 

영양왕 1년(590년) 신라에게 빼앗긴 한강 이북 땅을 탈환하고자 출정하여 아단성에서 적병의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평강공주>

고구려 평원왕의 딸이다. '평강'이란 이름은 '평강상호왕'에서 따온 이름으로 '평강왕'은 그녀의 아버지인 평원왕의 다른 이름으로

쓰였으니 즉 평강왕의 딸이라는 의미로 '평강공주'라 기록된 것이다. 실명은 전해지지 않는다.

 

어려서 자주 울어 그때마다 평원왕이 바보 온달에게 시집보내겠다고 하여 울음을 그치게 하였다.

16세 때 평원왕이 왕족인 상부의 고씨 집에 출가시키려 하자 이를 거역하고, 궁궐을 뛰쳐나와 온달을 찾아가 결혼하였다.

그 후 온달에게 학문과 무술을 가르쳐 고구려에서 제일가는 장군이 되게 하였다.

 

온달이 전사하고 관에 들어갔을 때, 부하 장수들이 온달의 관을 옮기려 하였으나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평강공주가 나타나 그의 관을 부여잡고 울자, 그제서야 온달의 관이 움직였다고 한다.

아들 온군과 손자 온사문 역시 고구려 말기 장군으로 활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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