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22대 정조
조선 22대 정조 = 휘는 산, 자는 형운, 호는 홍재 (재위 1776~1800)
<세손 시절>
정조는 1752년(영조 28년) 영조의 둘째 아들인 사도세자와 혜빈 홍씨(혜경궁 홍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형인 의소세손이 3살의 어린 나이로 요절한 뒤 태어났기 때문에 탄생 당일 영조에 의해 원손으로 호가 정해졌다.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좋아 사서삼경을 암기하니 할아버지 영조가 그를 각별히 총애하였다.
3세에 이미 글을 알아보기 시작하였으며, 영조는 어린 손자의 사부로 김종수와 안정복을 세손궁 사부로 임명한다.
김종수는 붕당으로는 노론이었음에도 노론의 당론을 따르지 않고 사도세자와 정조를 영조의 정통 계승자로 규정하였다.
뒤에 사도세자가 사형당한 뒤에도 김종수는 어린 세손을 영조의 정통 계승자라 천명하고
충성을 맹약하였으므로 정조 즉위 후 그의 지우를 받게 된다.
안정복은 남인 실학자로 그 학통이 이황과 조식, 정구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남인성리학의 대가이자 실학자,
역사가로 성리학자 겸 실학자인 성호 이익의 문하생이었다.
<동궁 시절>
아버지 사도세자는 소론에 동정적이었지만 그의 외가는 노론으로 외할아버지 홍봉한,
외종조부 홍인한은 노론의 지도급 인사였다.
어머니 혜경궁은 친정 쪽을 지지하고 남편 사도세자를 외면하였다.
노론의 지지를 받던 영조는 자신과 정치적 견해가 다른 아들 사도세자를 못마땅히 여겼고, 정신이상이라는
핑계로 뒤주에 가두어 죽인다.
8세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살려줄 것을 청하다가 병사들에 의해 끌려나가고 부친의 죽음을 목격하게 된다.
아버지 사도세자가 부왕과 다른 정견을 피력하다가 죽임당한 것을 안 그는 일체의 정치적 발언을 삼가고
개유와라는 독서실을 짓고 독서와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개유와를 통해 그는 다양한 책을 수집, 다양한 독서를 한다.
성리학에서 병서, 그리고 청나라 사신들이 들고 온 서구의 서적도 접하게 된다.
그가 사도세자의 죽음을 목격한 것을 불안하게 여긴 홍봉한 가문과 또다른 외척인 정순왕후 가문,
고모 화완옹주와 그녀의 양자인 정후겸 등은 세손을 제거하려 한다.
그러나 세손궁의 막료로 배치된 홍국영이 기민한 재주로 그들의 음모를 차단한다.
한번은 세손이 읽던 강목에서 서자에 대한 내용이 있었는데, 할아버지 영조는 서자에다가
천한 무수리 출신의 아들이라는 것에 오랫동안 컴플렉스를 갖고 있었다.
영조가 세손이 공부하는 책을 불시에 검사하려 하자 노론측에서는 그가 강목을 읽었다고 보고했고,
노론의 무고를 예상한 홍국영은 서자라는 부분을 모두 종이로 가려버렸다.
세손은 서자라고 쓴 부분은 가리고 읽지 않았다고 했고, 강목의 해당 부분은 흰 백지로 가려져 있었다.
<대리 청정>
사도세자의 죽음에 개입된 노론내 명문가인 홍봉한가, 김한구가, 정후겸가 에서는 그를 제거하려고
간자를 심어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였다.
외종조부 홍인한, 정순왕후의 친정인 김귀주, 김관주 일가, 고모 화완옹주의 양자 정후겸 파벌,
숙의 문씨의 일족 등이 세손을 공격했다.
세손을 직접 공격하지는 않았으나 외할아버지 홍봉한은 세손에게 상당히 비호의적이었다.
노론벽파는 세손을 제거하려 하였으나 노론 중 사도세자에 동정적이었던 유척기 계열과,
김상로의 조카손자뻘이지만 세손의 스승이던 김종수 계열, 사도세자와 평안도관찰사의
연락을 주도하다 사사된 조재호의 친족인 조재한 등은 그를 지지하였다.
1775년 24세가 된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맡기려 하자 좌의정 홍인한이 극구 반대했다.
홍인한은 부사직 심상운을 사주하여 반대 상소를 올리기도 했고, 경연장에 직접 나서서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하게 하려는 영조의 말을 가로막고, 승정원도승지와 승지들을 가로막고,
사관의 기록을 방해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할아버지 영조는 세손의 손을 들어주어 대리청정을 하게 된다.
동시에 대리청정을 시작한 지 얼마 뒤, 영조는 세손에게 병권과 순감군권을 넘겨주고, 부표를 넘겨준다.
이때 노론은 당론으로 들고 일어나 영조의 병권 이양을 강력하게 반발했지만
할아버지 영조는 세손에게 병권을 넘겨준다.
할아버지 영조는 만년에 사도세자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금등 문서를 세손에게 공개한다.
금등 문서에 의하면 홍계희, 김상로, 김한구, 김귀주, 홍인한, 홍봉한 등이 사도세자를 공격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영조의 금등 문서 공개 정보를 입수한 노론은 세손에 대한 공격을 개시한다.
1776년 음력 3월 5일 영조가 83세로 승하하자, 숭정문에서 25살의 나이로 조선의 제22대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즉위>
3월 5일 영조가 경희궁의 집경당에서 사망한 후 5일간 애도기간을 거친 뒤 즉위하였다.
세손의 지위가 탄탄하지 못한 것을 염려한 영조는 그에게 군사의 점고와 순감권, 부표를
세손 대리청정 시에 이미 넘겨주었다.
그러나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홍국영을 시켜 병조와 한성부의 병력을 장악한다.
정조는 즉위 당일인 1776년조회에서 자신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라하여, 종통은 비록 영조의 명에 의해
효장세자를 잇게 되었으나, 사도세자 또한 국왕의 생부로서 존중해야 할 것임을 천명했다.
이어 영조의 유지를 받들어 양아버지 효장세자를 진종 효장대왕으로 추숭하고, 양어머니
효순현빈을 효순왕후로 추상하였으나, 이어 청나라로부터 양아버지 효장세자에게 내려진 각민왕이라는 시호를
친히 맞이하였다.
청나라에서 진종의 시호를 보낼 때 직접 맞이하는 등의 태도를 보였으나, 후일 정조에 대한
사후기록에서 정조는 이 당시의 진종 추숭을 그다지 마득지 않게 여겼다고 전하고 있다.
후에도 그는 원릉과 함께 사도세자의 묘역인 화성 현륭원에는 자주 방문해도 진종의 능침인
파주군 영릉에는 별로 방문하지 않는다.
즉위 초 세손 시절 세운 개유와를 본따 규장각을 설립한다.
규장각의 각신에는 과거 시험 급제자가 아닌 이들도 선발되었고, 서자와 중인 계층에서도 각신이 선발되었다.
이후 규장각은 기존의 노론계열 훈신과 척신들 위주로 채용된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을 대신할
그의 친위 문신세력 양성소가 된다.
<홍국영 세도>
정조가 그가 즉위 직후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천명한 것은 노론대신들에 충격을 던져주었다.
갑사 전흥문 등을 시켜 자객을 들여보냈고, 사도세자를 탄핵, 사형에 이르게 한 한사람인
홍계희의 8촌동생 홍계능과 홍계희의 조카 홍상간 등 홍계희 일족이 자객을 보내 그를 살해하려
하였으며, 정조의 외삼촌인 홍낙임 일가가 그를 제거하고 은전군(정조의 이복형제)을 추대하려 했다.
또한 정후겸과 그의 수하들 역시 정조를 제거할 계획을 세우다가 발각된다.
정조는 홍국영을 각별히 신임하였는게 그를 시켜 이들 외척, 벽파 세력 제거에 착수한다.
즉위 초반 그는 세손 시절 세손궁 막료인 홍국영과, 노론 중 사도세자를 지지했던
유척기의 문하생들 그리고 자신의 세손 시절 스승인 김종수를 등용한다.
김종수는 노론이었음에도 원칙론자였고 당론에 반대하고 세손을 지지하였다.
세손 시절 스승이던 김종수는 즉위 초 그에게 아버지이면서 임금이면서 동시에 스승이 되라고 충고한다.
아버지이면서 임금이면서 동시에 스승이 되라는 김종수의 충고는 정조에게 깊은 감명을 남겼다.
정조는 즉위 이후에도 경연에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나갈 만큼 학구열을 보였다.
그의 유교 소양은 성리학과 이전의 유학의 가르침을 대부분 숙지했고, 직접 과거 시험을 주관하거나
성균관 관학 유생들과 사부학당의 유생들을 찾아가 직접 시험할 수준이었다.
그는 홍국영에게 정승직을 임명하지는 않았지만 정사와 병권을 맡겨 노론벽파의 탄핵과 제거를 유도한다.
그러나 홍국영의 세도가 막강해지자 소론의 서명선과 노론 김종수 등은 홍국영의 권력이
과도하게 비대해짐을 알리며 그에게 경계할 것을 주문한다.
<사도세자 복권 노력>
1776년(정조 즉위년) 3월 사도세자에게 장헌이라는 존호를 올렸다. 사도세자에 대한 복권작업이 시작되었다.
이로서 임오화변 이후 금기의 대상이 된 사도세자는 국왕의 생부로서 금기, 언급기피의 대상에서 해제된다.
동시에 사도세자를 추숭할 추숭 도감을 설치했다.
노론에서는 그가 사도세자가 아닌 효장세자의 양자 자격으로 즉위하였음을 공언하며 그에게 압력을 가한다.
이어 사도세자의 묘호와 사당 이름을 정할 봉원 도감을 설치하려 했다가, 추숭도감에 통합시켜서 운용한다.
사도세자에게는 장헌이라는 존호를 더하여 사도 장헌세자로 일컫었고,
생모를 지칭하던 호칭을 혜빈궁에서 빈자를 가려 혜경궁으로 고쳤으며,
혜경궁의 조정문안 순위 역시 왕대비 다음이나 중궁보다는 앞서게 했다.
경기도 양주군 배봉산에 있던 사도세자의 무덤 수은묘의 이름을 영우원으로 올리고,
순화방에 있던 그의 사당인 수은묘는 경모궁으로 올려 격상시켰다.
그해 4월부터 8월까지 사도세자의 사당인 경모궁을 개건, 수리하여 9월에 완공한다.
경상도 안동의 유생 이도현이 사도세자를 추숭하자는 상소를 올렸으나 정조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이도현 부자를 사형을 처함으로써 즉위 초기 노론 벽파의 의구심에서 벗어나려 했다.
1776년 그는 사도세자에게 태묘 보다 조금 낮은 지위, 생모 혜빈에게는 역시 대비보다 조금 낮은 지위를 올린다.
그러나 이 자리에 동시에 사도세자의 추존 논의는 용납하지 않을 것임을 밝히기도 했다.
그는 이후 생부 사도세자를 왕으로 추존하려는 시도를 계속 하였으나,
그가 사도세자를 왕으로 추존하려 할 때마다 노론은 격하게 반발하였다.
결국 사도세자를 명예회복하고 시호를 내리는 선에서 만족해야 했다.
<노론, 남인, 소론 중용과 친위세력 구성>
1728년 이인좌의 난 이후 정계에서 소외된 남인과 소론을 발탁하였다.
특히 세손시절 스승의 한사람인 안정복을 중용하고, 그의 천거를 통해 정약용, 채제공 등을 중용하여 측근으로 두게 되었다.
이인좌의 난 이후 역적으로 몰려 권력에서 배제된 소론과 남인계 인사들을 등용하여 정계로 다시 발탁하였으나
한편으로는 노론의 탕평파와 원칙론자들을 등용하였다.
노론의 원칙론자인 스승 김종수와, 이미 사망한 유척기의 문하생들을 각별히 중용하였다.
특히 세손시절의 스승 중의 한사람인 김종수를 중용하여 자신의 측근으로 두고 수시로 서신을 주고받았다.
그는 노론의 당원이면서도 노론, 소론계 인사들의 일거수일투족과 그들의 성격, 특징 등을
정조에게 은밀히 보고하였고 이는 자신이 죽기 전까지 누설하지 않았다.
노론에서 당론으로 사도세자의 후손을 인정하지 않겠다고 하였으나 유척기와 그의 제자들,
그리고 김종수만이 당론에 도전하여 세손을 적극 감싸기도 했다.
특히 스승 김종수의 사상은 그에게 감동을 주었다.
김종수는 세손시절부터 그에게 아버지이면서 통치차이면서 동시에 스승이 될 것을 여러 번 권고하였는데,
스승 김종수의 사상에 깊이 감명받은 그는 세손 시절부터 한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김종수는 김집과 송시열, 송준길 등이 같은 서인이었음에도 인조반정 공신들의 전횡과 불의를
묵인하지 않고 공격했던 것과, 소현세자, 민회빈 강씨 및 석견, 석철 3형제의 복권을 위해 노력한 점,
김집과 송시열, 송준길 등이 인조와 효종 때부터 소현세자, 민회빈 강씨 및 석견, 석철 3형제의 복권을 주장한 점,
서인 산림 김홍욱이 서인 공신세력과 귀인 조씨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된
민회빈 강씨의 복권과 석철의 석방을 주장하다가 장살된 것을 그에게 주지시켰다.
그는 김귀주-김관주 가문, 홍봉한-홍인한 가문, 화완옹주 가문, 숙의 문씨 가문 등 외척 세력의 타도와
공정한 절차로 인재를 선발하여 요순시대의 정치를 동방에 재구현해야 함을 늘 반복하여 강조하였다.
김종수는 외척 세력에 대항할 이로 심환지와 산림 송능상, 송덕상, 송환기, 김종후 등을 그에게 천거하였다.
<노론 벽파 숙정작업>
그후 영조 말년 이래 집권하여 오던 외척당 일당을 숙청하고 노론 청명당 계열을 등용한다.
이에 모역하다 발각된 홍상간, 정후겸, 윤양로 등을 주살하거나 유배하는 한편,
즉위 이듬해 그를 시해하고 은전군 찬을 추대하려다 발각된 홍상범 일당을 주살하였다.
정조는 즉위 초기 대리청정을 방해하고 세손의 오른날개(홍국영)을 제거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고모 화완옹주는 신분을 강등시키고 홍인한, 정후겸 등에게 사사를 명하였다.
숙의 문씨의 오라비 문성국 일가를 참수하고 그 어미는 제주도의 여종으로 보내고 숙의 문씨 역시 사사시켰다.
한편 영조 외척당의 실세이자 세손의 외조부인 홍봉한도 탄핵을 받았으나 정조는 끝내 그를 보호해 주었다.
정조의 외숙인 홍낙임은 1777년 홍상간 등의 궁궐 자객침투 사건에 연루자로 이름이 올랐으나,
혜경궁의 요청으로 직접 국문 끝에 정조는 홍낙임을 석방한다.
이 사건에 정조의 이복동생 은전군 이찬의 이름이 추대 대상자로 올라 있었기 때문에
정조는 그에게 자결을 명하였다. 이찬은 처음에는 자결을 거부하다가 끝내 사사당했다.
그 와중에 능력과 학식 있는 인물을 위주로 대거 등용하여 국왕 친위 세력을 키워 나갔다.
특히 왕세손 시절부터 자신을 경호해 온 홍국영을 절대적으로 신임하여 궁궐을 호위하는
숙위소 대장과 도승지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1780년에는 홍국영을 지방으로 방출시켰으며 이후부터 노론과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정조는 영조가 왕실 척족들을 중용해 외척당이 득세하게 한 것과는 반대로, 12년에 이르는 동안
외척 세력을 비롯한 기득권 세력을 제거하거나 약화시켜 친정 체제를 구축하는 데 주력하였다.
<홍국영 숙청과 친정 체제 구축>
홍국영에게 숙위소 대장과 승정원도승지를 겸하게 하고 병권까지 부여하였으나
그의 권력 농단이 강해지자 원칙론자인 김종수 등을 통해 비판하게 한다.
홍국영은 1778년 음력 6월 자신의 누이 원빈 홍씨를 정조의 후궁으로 들인 후 왕실의 외척
자격으로 권력을 행사하였고, 왕실 계승문제에 개입하게 된다.
그러나 1779년 음력 5월 원빈 홍씨가 자녀 없이 사망하자 강화도에 이배된 은언군의 장남
상계군 담을 원빈 홍씨의 양자로 들이게 한다.
노론 대신들은 왕의 나이가 젊음을 들어 반대하였으나 홍국영은 상계군의 양자 입양을 강행했고,
상계군 담은 완풍군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다.
그러나 1780년 원빈 홍씨가 효의왕후의 손에 죽었다고 의심한 홍국영이 나인을 시켜
효의왕후전 수라간과 주변에 독을 풀어놓은 것이 발각되면서 그를 제거한다.
처음에는 자발적인 은퇴 권고로 흑두봉조하를 만들었다가 뒤에 방출시킨다.
이후 그는 김종수와 서명응, 채제공 등을 등용하여 친정체제를 형성하게 된다.
그러나 홍국영은 숙청되었으나 왕이 특별히 신임하는 측근 가신에 의해 정사가 좌우되는 세도 정치의 폐단을 남기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정조는 규장각 제도를 정비하여 자신을 지지하는 정예 문신들로 친위 세력을 형성시켜
‘우문지치’와 ‘작인지화’를 규장각의 2대 명분으로 내세우고 문화 정치를 표방하였다.
'우문지치'는 문치주의와 문화국가를 추구하는 정책으로, 정조는 많은 책을 출판하도록 하였다.
'작인지화'는 인재를 양성하겠다는 의지 표명으로, 규장각에서 정조가 유생들을 모아
그 중에서 젊은 문신을 뽑고, 뽑힌 신하들을 자신이 직접 가르치고 시험을 보게해서 평가하였다.
한편으로는 각 당의 원칙론자들을 등용하면서 노론의 원칙주의자도 포섭, 송시열에 대한
경의를 표하였고 노론의 강경파 중 청렴한 인물인 김종수 등을 신임하기도 했고, 그와 홍국영의 건의를
받아들여 재야의 산림학자인 송덕상, 송능상, 김종수의 형 김종후 등을 중용하기도 했다.
정조는 개인적으로 원빈 홍씨를 총애하였는데 원빈이 죽자 정조는 손수 ‘어제인숙원빈행장’을 썼다.
국왕이 후궁의 행장을 직접 쓴 것은 조선역사상 유례없는 파격적인 일이었다.
<학문적 치적>
그는 또한 영조 때부터 시작된 문물 제도의 보완 및 정비 작업을 계승, 완결하였다.
아울러 스스로 초월적인 통치자로 군림하면서 스승의 입장에서 신하들을 양성하고 재교육시키려 하였다.
정조는 우수한 인재를 뽑아 초계문신이라 칭하고 매월 2차례씩 시험을 치렀으며 상과 벌을
직접 내리기도 했는데, 소외받던 남인과 영남계 인사들도 과거에 응시하도록 하였다.
또한 서북인을 채용하였으며, 서인도 기용했다.
특히 남인학자를 우대하여 주자학의 공리 공론적인 학풍을 배격하고 실사구시와
이용후생을 목표로 하는 실학이 크게 발전하였다.
왕세손 때부터 활자에 관심이 깊어 임진자, 정유자, 한구자, 생생자, 정리자, 춘추관자 등을 새로 만들어
인쇄술의 발달을 기하는 한편으로 서적 편찬에도 힘을 기울여 ‘증보동국문헌비고’, ‘국조보감’, ‘대전통편’, ‘문원보불’,
‘동문휘고’, ‘규장전운’, ‘오륜행실’ 등을 간행하게 했고, 정조 자신의 문집 ‘ 홍재전서’도 완성했다.
또한 그는 이덕무와 박제가를 시켜 실제 전투 기술을 다룬 훈련서인 ‘무예도보통지’를 펴내기도 하였다.
제도 개편에도 힘써 형정을 개혁, 악형을 금지시켰고, 백성의 부담을 덜기 위해 궁차 징세법을 폐지,
한편 빈민의 구제를 위해 자율전칙을 반포했다.
이런 사회적인 분위기는 중인 이하 평민에게까지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정조 시대는 양반은 물론, 중인, 서얼, 평민층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문화에 대해
관심을 가져 문화를 크게 꽃피운 조선 후기의 문화적 황금시대를 이룩했다.
<정치 문제와 천주교>
당시 사회 문제로 대두된 천주교에 대해서는 정학, 즉 성리학의 진흥만이 서학의 만연을 막는 길이라는 원칙 아래 유연하게 대처하였다.
그러나 충돌이 전혀 없지는 않아 1791년에는 신해교난이 일어나기도 했다.
즉, 정조는 천주교를 성리학의 진흥으로 막을 수 있는 일시적인 종교현상으로 보아 호의를 보이거나
온건하게 대하였으나, 권상연과 윤지충이 조상의 신주를 소각하고 천주교 예식으로 모친의 장례를 치른 진산사건에 대해
사형으로 강경하게 처벌함으로써 외래종교인 천주교가 유교전통을 부정하는 것만은 용납하지 않는 강온정책을 실시한다.
<왕권 강화책>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매우 그리워하여 아버지의 묘소인 수은묘를 처음에는 영우원으로 격상켰다가,
다시 양주에서 수원으로 천장하여 현륭원이라 이름짓고 정기적으로 참배하였다.
또한, 현륭원 주변인 수원에 과학적인 성채인 화성을 건립하고 그 안에는 행궁을 만들었다.
정조는 암행어사를 비밀리에 자주 파견하여 지방 사회의 문제점을 직접 파악하고 해결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로써 지방 사족의 향촌 지배력을 억제하고 백성들에 대한 정부의 통치력이 강화되었다.
또한 왕실 직속 친위대인 장용위를 신설하였는데, 초반에는 5위와 비슷한 위로 출발하였으나 곧 장용영으로 격상시켰다.
장용영의 설치를 통해 친위대 설치는 물론 각 군영의 독립적 성격을 약화시키고
군사권을 장악함으로써 임금의 최고 통수권을 실질적으로 행사할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
1782년 정조는 사육신을 추모하여 노량진에 조선육신 이라는 신도비를 세워주었다.
<기타 정책>
1791년에는 신해통공을 실시해 상인들의 상업 활동의 자유를 크게 넓히고,
수령 등의 가혹한 형벌을 제한하였다.
한편 노론의 거점인 한성에서 벗어나고자 수원으로의 천도를 계획하여 정약용 등을 통해
수원 화성 축성을 단행하였으나 천도계획은 성공하지 못하였다.
노론 중에서도 정파에 속하지 않은 김종수와 노론 벽파 계열 인물인 심환지 역시 중용하여 균형을 맞추었다.
또한 우암 송시열을 송자로 존숭하고, 남인과 소론 계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송시열의 문집을
국비를 들여 송자대전이라는 이름으로 간행하게 한다.
말년의 정조는 노론이면서도 시파인 안동 김씨인 김조순에게 신임이 두터웠고
아들인 순조의 세자빈 후보로 김조순의 딸을 골랐으니 바로 순원왕후이다.
김조순은 할아버지인 영조의 왕세제 시절 세제 대리 청정을 주장하다가 손자 김성행과 함께
사형당한 영의정 몽와 김창집의 4대손으로, 김상헌, 김상용, 김수항의 후손이었다.
노론 당내에서도 상당한 배경을 갖고 있던 그는 시파였다.
정조는 김조순의 딸을 세자빈으로 간택하는 데 반대하자 사도세자의 계시를 이유로
세자(뒷날의 순조)의 가례를 강행한다.
소론과 남인 중에는 사도세자의 원한을 갚아야 된다는 건의를 계속해서 올렸지만, 그는 이 주장을
모두 받아들이지는 않고 시파 중 강경파인 조재한 등은 역적의 예로서 단죄하기도 한다.
<1차 영남만인소>
1792년 윤 4월 27일에 올라온 상소는 만 명이 넘는 영남의 선비들의 이름으로 올려졌다.
상소 하나에 1만명 이상이 서명한 사례는 조선왕조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내용은 사도세자가 영조에 충성했을 뿐 아무런 죄도 없다는 것을 선포함으로써 군주의 권한을
강화하고 강력한 개혁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788년(정조 12년) 8월부터 영남 선비들은 이인좌의 난에 영남인이 동조했다는 것에 대한 항변으로
연명상소를 올리기 위하여 1만 5천명이 모여 복합 서명하였으나 승정원에서 끝내 봉소해주지 않자
동년 11월 왕의 안동 도산서원 방문을 틈타 소두 이진동이 신문 밖에서 대전별감을 통하여 상소를 올렸다.
이진동의 상소는 수십 년간 묻혀있던 정치적인 문제들을 언급한 내용으로 기사환국(1689) 이후
영남 남인의 형편과 무신란 당시 영남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다.
이후 1792년 윤 4월 영남 선비들은 남인과 가까웠던 홍문관 관원 김진동을 통해 만인소가 전달되는데,
왕에게 직접 상소를 전달하려면 관직에 있어야 되거나 근기지역 양반이어야 전달될 확률이 유력하였다.
또한 왕에게 보내는 상소의 소두는 최소 5품 이상의 홍문관, 예문관의 현직 관원이거나 전직 관원 출신이어야 했다.
그러나 상소의 소두 이우는 아버지가 참봉과 교관을 지낸 인물로, 아무것에도 해당되지 않았다.
그러나 홍문관 관원 김진동을 통해 상소가 정조에게 전달되면서 왕에게 보내는 상소의 소두는
최소 5품 이상의 홍문관, 예문관의 현직 관원이거나 전직 관원 출신이어야 한다는 전례가 깨지게 된다.
상소의 내용은 이인좌의 난 당시 영남 선비들이 자발적으로 일어나 반란군과 투쟁하였으며,
반란군은 소론과 남인 과격파이고 영남과는 무관한 충청도 출신이었다는 점을 전제한 뒤,
영남의 사림들이 임오의리 문제(사도세자 아사 문제)의 진실을 알고 있으나 노론의 탄압으로
비밀리에 간직하던 중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나도록 감히 입을 열지 못하였으나
동 도산서원을 방문한 정조를 여악과 향락을 찾으러 갔다는 유성한의 흉소와 윤구종이
우리 노론은 경종에게는 신하의 의리가 없다는 망언을 전해 듣고 상경했으며,
사도세자의 평소 현명한 언행과 학식으로 보아 정신이상자일 리가 없고 세자와 영조와의 원만한
관계를 언급하면서 벽파의 반역 사악한 무리들에 의해 이간질당하고 끝내 원통히 죽었으니
마땅히 사도세자에게 누명을 씌운 역도들을 찾아내 처단, 처벌하여야 할 것이며,
임오의리 문제는 부자 또는 조손간의 차마 말하지 못하고 차마 듣지 못하는 사안이지만
영조가 금등 문서를 남긴 것처럼 그것은 충역을 가리고 시비곡직을 가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더 차원 높은 효와 의리를 찾을 수 있으며, 전하께서 영남을 특별히 잊지 않고 권념해 주시고
파격적인 예우를 해주시니 영남의 사림들은 모두 전하를 위해 몸 바쳐 보답할 각오가 되어
있으므로 선세자(사도세자)를 위해 왕에게 아부하기 위하여 변무하는 것이니 죽음을 무릅쓰고 직간하는 것이며,
유성한, 윤구종의 경종에 대한 불충은 선세자에 대한 불충과 다를 바 없으니
여러 신하의 주청대로 그들을 역률로 다스려야 된다는 내용이었다.
이 상소를 읽고 정조는 말을 잇지 못하고 오열하였다.
정조는 소두에게 상을 내리고 상소를 소중히 간직한다. 이는 노론벽파에게 충격적인 상소였다.
<2차 영남만인소>
1차 영남 만인소에 정조가 감격하자 여기에 고무된 영남 유생들은 다시 1만 명 넘는 연명 상소를 올린다.
정조는 특별히 이우에게 참봉직을 제수한다.
그러나 정조는 김한동, 이우들을 불러 대면하였으나 목이 메어 제대로 대화할수 없었고
이들에게 여비를 주어 고향으로 되돌려보냈다.
결국 3차 상소를 준비하던 도중 유생들은 정조의 간곡한 설득으로 귀향하게 되었다.
이후 정조는 이 상소와 '무신창의록'을 상세히 읽고 이인좌의 난 당시 영남 의병들이 항거하였음에도
노론에 의해 반역향으로 몰린 것을 알고 영남을 반역향에서 해금해주었다.
<수원성 축성>
매년 수시로 수원화성에 능행을 다녀오던 정조는 화성 현륭원 근처에 새로운 성 수축을 기획,
1794년초 정약용에게 성곽 건설을 지시한다. 이 성곽은 1794년 착공하여 1796년 준공되었다.
기존에 화강암으로 쌓았던 방식을 버리고 벽돌로 쌓는 축성 공사에는 정약용이 고안한 거중기가 사용되었다.
수원성은 정조가 그의 아버지의 묘를 수원에 옮긴 뒤 축조한 성으로 거중기, 녹로 등 신기재를 사용해 만들어졌다.
화성은 군사적 방어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보유하고 있으며 실용적인 구조로 되어 있어
동양 성곽의 백미로 평가 받는다. 한때 그는 노론이 장악하고 있는 한성부를 떠나
수원성 근처로 도읍을 천도할 계획도 세웠으나 중단하고 만다.
<집권 강화, 개혁의 실패>
1793년(정조 17년) 정조는 특명을 내려 임진왜란 때의 장수 이순신을 의정부영의정으로 추증하고,
1794년 직접 이순신의 신도비명을 지었다.
1795년에는 충무공 이순신의 유고 전집을 간행할 것을 명했다.
그해에 그는 남인 인사들 중 1728년 이후 추탈당한 허목, 허적, 윤선도, 윤휴 등의 관작을 회복시키고
남인, 소론 인사들을 대대적으로 중용하였다.
노론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그는 남인, 소론계 인사들을 등용하였다. 그러나 북인계 인사들은 예외로 둔다.
세손시절 개유와를 운영하면서 수집한 서책을 통해 서양에 새로운 문명국가가 존재한다는 것을
안 그는 실학자들에게도 각별한 관심을 가졌다. 남인계 정약용, 이가환, 안정복 등 이익 학파
문인들과 노론계열 중상주의 실학자인 박지원, 박제가와 박지원의 문하생들, 이덕무, 유득공 등을 각별히 대하였다.
1794년에는 박지원의 파격적인 문체가 문제시되어 같은 당인 노론에 의해서 심하게 비판을 받자
그가 나서서 박지원을 옹호하기도 했다.
또한 청나라의 베이징을 통해 역관들이 들여온 새로운 문물에도 관심을 가졌는데,
안경을 직접 써보기도 했다.
또한 정조 때인 1797년(정조 21년) 영국 군함 프로비던스 호가 부산 용당포에 표착하여 동래 부사와 교섭하였다.
1798년에는 그해의 별시 문,무과와 소과를 직접 주관하여 인재를 채용하기도 했다.
의술에 상당한 조예가 있던 정조는 재위 24년인 1800년 음력 6월 14일 직접 처방을 내리기도 했다.
<최후>
붓글씨에도 능하여 정조어서, 근묵 등을 남겼고, 그림도 잘 그려서 필묵란도와 매화도를 남기기도 했다.
후에 필묵란도는 대한민국 보물 제 744호로 지정된다.
1800년(정조 24년)초 정조는 등창으로 병석에 눕게 되었다.
그러나 격무로 인한 스트레스와 과로로 증세는 악화되었고 독살을 의심했던 그는
내의원 어의들을 신뢰하지 않고 직접 자신이 조제와 처방을 하기도 했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여러 개혁에 착수하였으나, 1800년 음력 6월 49살의 나이에 병이 악화되어
연훈방을 받고 얼마 뒤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정순왕후가 지켜보는 가운데 사망한다.
그가 갑자기 예기치 못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서 그가 추진해 온 정책과 남인, 소론 등의 등용
등은 대부분 무산되고 말았다.
그 뒤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을 거쳐 조선에는 외척 가문이 주도하는 세도 정치가 전개된다.
한편, 정약용은 솔피시를 지어 정조의 죽음에 암살의혹을 제기했고, 경상북도에서는 안동 유생이며
여헌 장현광의 후손인 장현경 3형제가 정조의 원한을 갚는다며 사람을 모아 거병을 기도하다가 적발된다.
이후 정조의 죽음에는 독살설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지만 이를 뒷받침할 사료는 아직 없다.
그는 생전에 아버지 장헌세자를 왕으로 추숭하지 못했지만 후일 가계상 그의 증손뻘이 되는
고종이 1898년(광무 1년) 장헌세자를 장종으로 추존한다.
그리고 그가 황제로 추존될 때 생부 장종 역시 장조 의황제로 추존한다.
생부를 복권, 추존하려던 그의 노력은 그로부터 120년, 정조 자신의 사후 98년만에 결실을 보게 된다.
* 조부 : 21대 영조
* 부 : 장조(장조의황제, 사도장헌세자 추존) * 모 : 헌경의황후(혜경궁) 홍씨
* 양부 : 진종(진종소황제 효장세자) * 양모 : 효순소황후 조씨
* 왕비 : 효의선황후 김씨
* 후궁 : 의빈 성씨 * 아들 : 문효세자 순 * 딸 : 옹주 (조졸)
* 후궁 : 현목수비 박씨 * 아들 : 순조숙황제 공 * 딸 : 숙선옹주
* 후궁 : 원빈 홍씨 * 양자 : 상계군(생부는 양부 정조의 이복 동생 은언군)
* 후궁 : 화빈 윤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