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20대 경종, 21대 영조
조선 20대 경종 = 휘는 윤, 자는 휘서 (재위 1720~1724년)
1688년 숙종의 맏아들로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원자로 봉해졌다가 1690년 3살 때에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이후 사친인 장희빈가 사약을 받아 죽을 때 생식기를 움켜쥐어
병약해져 그의 대리청정을 둘러싸고 김창집 등의 노론과 김일경 등의 소론이 싸움을 벌였다.
이 사건으로 김창집 등 4명의 노론파 대신이 죽음을 당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병약하였는데, 뒤에 단의왕후 심씨와 선의왕후 어씨 등 두 부인을 두었으나 자녀를 두지 못했다.
선의왕후는 노론의 추대를 받는 연잉군을 음흉한 시동생으로 간주하여 소현세자나
인평대군의 후손 중의 한명을 양자로 삼으려고 물색하였으나 실패하고 만다.
내성적이고 유순한 성격이었으나 모후 장희빈의 사사 이후 음울한 성격으로 변해간다.
<어머니 장희빈의 왕비 책봉>
1689년 인현왕후가 폐위되고 생모인 장희빈가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갑술환국으로 폐위되었던 인현왕후가 다시 복위하고 장희빈는 다시 빈으로 강등되어
왕세자였던 경종은 인현왕후에게 인계되어 그녀의 법적 아들이 된다.
왕세자의 사친으로 강등된 희빈장씨는 1701년 인현왕후 사망 후 인현왕후를 저주하여 시해하였다는 죄목으로 죽는다.
승정원을 통해 자진의 명을 내리기 전날인 1701년 10월 7일, 숙종은 후궁을 왕비로 진봉할수 없는 규칙을 정하였다.
<험난한 즉위 과정>
노론은 그를 제거하려 했으나 그는 천신만고 끝에 왕위를 계승했다.
숙종이 그를 인현왕후에게 인계하였고 숙종이 죽기 전 서둘러 재혼시킨 후처 선의왕후 어씨는 노론 실세
가문의 딸이자 어씨의 아비 어유구는 김창집의 제자이기도 했지만 그는 끝까지 노론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이때 대개 경종은 소론의 지지를, 연잉군은 노론의 지지를 받는 형국이었으며
때문에 소론과 노론 간의 권력 투쟁은 날로 심해져 갔다.
그런 가운데 1720년에 숙종이 승하하자 경종은 부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게 되었다.
그때 경종의 나이는 이미 33살이었고, 숙종이 아파서 누워 있던 4년 동안 대리청정을 하면서
숙종 대신 국정을 돌본 경험이 있었으므로 정사를 처리하는 데는 서툴지 않았다.
숙종 말년에야 비로소 강행되어 1720년에 완성된 양전사업은 대리청정 중인 경종이
민진후, 김창집 등의 노론의 극심한 반발을 무릅쓰고 이룩한 쾌거였다.
노론의 세자 교체 의도는 실패했다.
소론이 격렬하게 반발한 데다 세자의 결정적 흠도 드러나지 않았고 숙종의 건강도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안한 세자 대리청정이 유지되는 가운데 숙종은 재위 46년(1720) 6월 8일 세상을 떠났다.
이로서 그는 조선의 20대 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즉위>
경종이 즉위한 직후, 선왕이었던 숙종이 희빈 장씨의 작호를 거두지 않았고
천장과 망곡례를 허가했던 것은 경종이 즉위한 후에 그녀를 추존할 수 있도록 한
숙종의 은밀한 뜻이었으니 희빈 장씨에게 마땅히 명호를 올려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왔다.
노론의 격렬한 반발 속에 경종은 선왕의 국상 중에 논할 수 없다하여 상소를 올린
유학 조중우를 유배보내지만 노론은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조중우와 그 무리들을 압송해
국문하여 기어코 죽이기에 이른다.
그 직후, 태학생 윤지술이 장계를 올려 숙종의 빛나는 업적에 희빈 장씨를 죽인 것을
기록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이에 노론은 윤지술의 의기를 칭찬하며 그를 보호한다.
경종 2년에야 비로소 경종은 어머니 희빈 장씨를 옥산부 대빈에 추존할 수 있었다.
경종은 희빈 장씨를 왕비로 추숭하려 하였으나 일찍 죽는 바람에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한다.
경종의 재위 기간 4년은 노론과 소론의 정권 다툼으로 정치가 잠잠할 날이 없던 시기였으므로
특별한 업적 또한 남기지 못했다.
이 시기에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밝혀 놓은 남구만의 ‘약천집이 발간되었고,
서양의 것을 모방한 소화기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경종의 치세 중에 신임옥사가 일어나 20여 명이 처형당했고 옥사를 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은 죄인의 아내 등
52명이 죽었고, 유배형을 받은 이는 114명이었다.
재위한 지 4년 2개월 만인 1724년 8월 25일 창경궁 환취정에서 37살의 나이로 훙 하였다.
경종은 평생 자식을 두지 못했다. 희빈 장씨가 사약을 받을 때 경종의 하초를 잡아 당겨
후사가 없다고 전해진다.
1724년 그는 갑자기 최후를 맞이한다.
특별히 병세를 앓지 않은 상태에서 세제인 연잉군이 보낸 게장과 생감을 먹었다가
고통을 호소하면서 죽어갔는데, 소론 일부는 영조가 경종을 독살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일경, 목호룡 등의 김일경의 난이나 청주성을 중심으로 벌어진 이인좌의 난 당시
난군은 영조의 경종독살설을 보다 구체화시킨다.
* 부 : 19대 숙종 * 모 : 인현왕후 민씨 * 사친 : 옥산부대빈 장씨 (장희빈)
* 원비 : 단의왕후 심씨
* 계비 : 선의왕후 어씨
조선 21대 영조 = 휘는 금, 자는 광숙, 호는 양성헌 (재위 1724년~1776년)
숙종의 서장자로 태어나 1699년(숙종 25년) 연잉군에 책봉되었다.
그의 어머니인 숙빈 최씨는 임금의 우물에서 물을 긷는 무수리 출신이었다.
당시 무수리는 궁중 하인 중에서도 그 직급이 가장 낮아서 흔히 “궁녀의 하인”으로 불렸다.
어머니의 천한 신분 때문에 영조는 같은 왕자이면서도 이복 형이었던 왕세자와는 전혀 다르게
주위의 은근한 멸시를 받으며 자랐다.
궁중의 나인의 심부름꾼인 무수리 출신이고, 서자라는 사실은 그에게 콤플렉스가 되어 오랫동안 따라다녔다.
그는 어머니 숙빈 최씨를 왕비로 추존하려 시도하였으나 노론계 예학자들의 강경한 반대로 실패하고 만다.
이후 부왕 숙종의 다른 후궁인 명빈 박씨에게서도 이복동생 연령군이 태어난다.
이복동생 연령군은 병약하였고 배다른 동생이었지만 같은 서자로 멸시받는 처지였기에
그는 연령군을 각별히 아꼈다.
장희빈에게서 마음이 떠난 숙종은 은연중에 연잉군에게 마음을 두었고, 이이명 등에게
연잉군과 연령군을 잘 부탁한다는 발언을 하기도 하였다.
<잠재적 왕위계승권자>
왕세자는 14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 희빈 장씨가 사약을 받고 죽음을 당한 것을 본 후
병을 얻어 자식을 낳지 못하였다.
숙종은 경종의 대를 연잉군이 잇게 하라고 좌의정 이이명에게 명하였다.
이로 인해 왕세자를 지지하는 소론과 연잉군을 지지하는 노론 간의 권력 다툼이 치열해졌다.
1720년(경종 1년)에 왕세자가 왕위에 오른 뒤 경종에게 후사가 없어 노론인 김창집 등이
왕세제 책봉을 상소하여, 소론인 유봉휘 등의 반대가 있었다.
<왕세제 시절>
연잉군은 왕세제 직위를 몇 번이고 사양하다가 결국 1721년(경종 1년) 음력 8월에 왕세제로 책봉되었다.
이후 노론측에서 세제 대리청정을 건의하자 소론측에서는 노론의 불순한 의도를 지적했고,
경종은 입장표명을 하지 않다가 목호룡의 고변이 터지면서 사태가 달라진다.
이어 노론의 대리청정 건의로 일시 정무를 담당했으나 소론의 반대로 청정을 취소당했고
신임사화로 노론이 실각하자 자신을 지지하던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 등 4대신과
50여명의 고관들이 사형당하고 그 일족이 유배, 투옥되는 등 지지 세력을 잃었으며,
1722년 김일경 등의 사주를 받은 박상검, 문유도의 음모로 생명의 위협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살아남은 노론세력은 세를 키워나갔고, 그는 다시 세력을 회복할수 있었다.
1724년 음력 8월에 병약하던 경종이 승하하자 왕위를 물려받게 되었다.
<탕평책>
치열한 당쟁 속에서 생명의 위협까지 느꼈던 영조는 등극하자마자 소론을 몰아내고
한때 노론 정권을 수립했으나 1724년 김일경과 목호룡이 경종독살설을 주장한 것과
국왕인 그에게 왕이라 칭하지 않고 너, 그대라고 칭하는 것을 보고 충격받게 된다.
만인의 임금이 되고 싶었던 그는 붕당의 폐습을 통감하여 차츰 소론을 등용하고
1727년 노론의 강경파를 추방하고(→정미환국), 이후 양파를 고르게 등용함으로써
탕평책을 기본 정책으로 삼아 당쟁의 격화를 막았다.
그러나 임금으로 즉위한 지 4년 만인 1728년에 경종의 죽음으로 정치적인 기반을
위협받게 된 이인좌, 이유익 등이 소현세자의 증손자인 밀풍군 탄을 임금으로 추대하여
무력으로 영조와 노론을 몰아내려 하였다.
1728년 이인좌의 난을 계기로 영조는 다시 정견을 같이 하는 노론을 중용하였다.
이인좌의 난 이후 노론은 소론 강경파와 남인 일부가 가담한 것을 언급하며 소론 축출을
요구하였으나 그는 오히려 노론 출신이 장악한 삼정승에 소론 출신 이광좌, 이태좌, 박문수,
이종성, 조현명, 조문명 등을 등용하는 것으로 노론의 과격한 요구를 억제한다.
영조는 탕평책의 한 방법으로 “쌍거호대”를 실시했다. 즉, 주요 자리마다 노론과 소론의 인물을
같이 등용하여 서로를 견제하도록 함으로써 정권을 독점할 수 없게 했다.
그리고 1772년에는 같은 당파에 속한 집안끼리는 결혼을 금지시켰다.
또 사형을 시킬 때는 반드시 3심을 거쳐 시행하도록 하는 삼복제도를 다시 만들었을 뿐 아니라
사대부 집안에서 임의로 형벌을 내리는 것을 금지시켰다.
<이인좌의 난 전후>
1728년 소론 강경파인 이인좌 형제 등은 충청북도 청주성을 거점으로 하여 거병하여 이인좌의 난을 일으킨다.
이는 무신년에 일어났다 하여 무신란으로도 부른다.
이들은 경종의 위패를 모시고 조석으로 곡을 하였으며, 영조의 경종 독살설을 시중에 확산시켰다.
청주성에서 일어난 반란군은 즉시 경상도와 전라도로 확대되었고, 관찰사와 병마절도사가 전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관군을 투입해 난을 진압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경상도 안동과 대구의 유생들이 자발적으로 창의군을 조직하여 이인좌의 난
진압에 참여하였으나 난군 세력이 영남에서 가장 발호했다는 이유로 반란 진압 후 남인들의
협조설까지 확산되면서 경상도를 반역향으로 규정하여 과거를 정거하고 금고령을 내린 뒤,
대구 감영에는 평영남비를 세우게 된다.
이후 과거와 출사를 금지당한 영남의 남인계 유생들은 정조 때에 억울함을 호소하며
영남 의병의 행적과 선비들의 연명부를 적은 영남만인소를 두 차례에 걸쳐 올리게 된다.
난이 진압된 뒤에도 그는 탕평책을 유지하게 되지만 노론 편향으로 흘러가게 되었고,
사도세자 사건으로 이어지게 된다.
<인권과 경제정책>
영조는 조선사회를 개혁한 계몽군주로서 가혹한 형벌을 폐지 또는 개정하여 민중들이
인권을 존중받도록 하였으며, 신문고 제도를 부활하여 민중들이 억울한 일을 직접 알리게 했다.
그는 금주령을 내려 사치, 낭비의 폐습을 교정하고 농업을 장려하여 민생의 안정에 힘썼다.
배고픈 민중들의 실태를 조사하여 그들을 구제하고, 민중들이 국방의 의무를 대신하여
세금으로 내던 포목을 2필에서 1필로 줄이는 균역법을 제정하여 세제의 합리화를 기하는 한편,
민중들의 세금 부담을 크게 줄였으며, 신분에 따라 국가에 대한 의무를 달리 부담하게 하였다.
또 일본에 조선 통신사로 갔던 조엄이 고구마를 들여왔는데, 그가 들여온 고구마는
훗날 흉년 때 식량으로 대신할 수 있게 되었다.
영조 자신도 소식, 물자 절약등으로 검소하게 살아냄으로써 국가 지도자로서의 모범을 보였다.
또한 북관의 군병에게 조총 훈련을 실시하고, 1729년 화차를 제작하여 이듬해 수어청에
총의 제작을 명하고 진을 설치하여 각 보진의 토성을 개수하는 등 국방 대책에 힘썼다.
오가작통법을 부활하여 조세 수입을 늘리고, 1756년에는 기로과(60세 또는 70세 이상인 노인만 보는 과거)를 신설하였다.
<학문진흥>
학문을 좋아했던 영조는 스스로 서적을 집필하였으며, 인쇄술도 개량해 많은 서적을 간행하고
반포하여 민중 모두가 마음껏 읽을 수 있게 만들었다.
‘퇴도언행록’, ‘어제여사서’, ‘육전’, ‘소학훈의’, ‘속오례의’, ‘속대전’, ‘무원록’, ‘속병장도설’,
‘누주통의’, ‘해동악장’, ‘여지도서’, ‘동국문헌비고’, ‘숙묘보감’ 등 많은 서적들을 편찬했으며,
‘어제경세문답’, ‘위장필람’ 및 ‘악학궤범’의 서문은 영조의 자서이다.
또한 유능한 학자를 발굴하여 실학의 학통을 수립하게 하고, 풍속, 도의의 교정에도 힘써 사회,
산업, 문화, 예술 등 각 방면에 걸쳐 부흥기를 이룩했다.
영조의 이러한 실용 정책의 영향으로 조선은 이익을 선봉으로 실학이 자라기 시작했으며,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의 시대는 “조선의 르네상스”라고 불릴 만큼 크게 성장하게 된다.
<탕평의 실패>
그러나 노론과 소론의 대립 구도는 끝내 1762년 자신의 아들인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
사도세자는 경종비 선의왕후가 만년을 보내던 저승전에서 유년기를 보냈고 이들을 통해 경종
독살설을 접하고 노론에게 반감을 갖게 된다. 영조의 원비이자 사도세자를 양자로 입양한
정성왕후 서씨가 죽고 맞이한 김한구의 딸 정순왕후 김씨와 후궁 숙의 문씨 역시 사람을 심어
사도세자의 행적을 영조에게 고해바치며 양자 사이를 이간질했다.
김상로, 홍계희, 김한구 등은 세자가 그릇된 정치관을 갖고 있다고 영조에게 고하였고,
영조에게 경종 독살설의 진실을 묻게 된다.
또한 세자는 대리청정 기간 중 이인좌의 난 이후 꾸준히 요구된 소론계 인사들에 대한 연좌제,
처벌을 반대하고 소론계 인사들을 등용하여 노론에게 경계심을 불러일으킨다.
1749년에 사도세자가 영조의 건강 때문에 대리청정을 하게 되자 사도세자와 영조를
이간질하는 노론과 정순왕후에 의해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 죽게 되었다.
영조는 후에 사도세자를 죽인 것을 후회하고 사도세자의 아들(=정조)을 왕세손으로 삼았으며,
자신이 생존할 때 이미 손자에게 정치를 맡게 하여 노론에게 견제당하는 일을 사전에 방지하였다.
<세손 대리청정과 최후>
그의 사후 노론에서 사도세자 사건을 언급하며 죄인의 아들이라고 할 것을 예상하여 세손을 일찍 죽은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양하고, 후사를 얻지 못하고 죽은 맏며느리 효순현빈은 승통세자빈으로 봉한다.
또한 정조에게도 즉위 후 효장세자를 왕으로 추존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노론은 끝까지 세손을 공격하였고, 세손은 개유와 등에서 학문과 독서에 몰입하며
정치적 발언과 행동을 삼간다.
세손이 본 책 중 강목에서 서자, 첩의 자식 이란 언급이 많은 부분이 있는데 노론에서 영조의 열등감인
서자, 서출이라는 부분을 그가 본다고 무고하였으나 세손궁의 궁료였던 홍국영이 민첩하게
책의 서자, 첩의 자녀 언급 부분은 백지로 가리기도 한다.
이후 세손은 정치적 발언과 행동을 일체 삼가하고 조용히 생활하였다.
영조는 세손에게 보위를 양위하려 하였으나 신하들의 만류로 대리청정을 결심한다.
1774년(영조 50년) 그가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명할 때 홍인한 등 노론의 지도부가 승정원의
승지와 사관들을 가로막고 붓을 빼앗으면서까지 방해하였으나 그는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였고,
곧이어 병권을 움직일수 있는 감국권과 부절 승인권한 역시 세손에게 넘겨주었다.
한편 은언군과 은신군 등이 시장에서 송사에 휘말린 뒤 홍봉한이 이들의 뒤를 후원하였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손자 은언군과 은신군을 제주도로 유배보내게 된다.
은신군은 곧 풍토병을 얻어 사망하고 은언군은 세손이 즉위한 뒤에 석방된다.
만년에 기로소(에 들어갔으며, 1776년 영조는 83살의 나이로 죽어 조선 왕조의 역대 임금 중
최장 재위 기간(52년)을 가진 임금으로 기록되었다.
<사후>
대리청정과 병권을 장악했고, 세손 궁료들의 기민한 움직임으로 세손은 보위를 계승하여 22대 왕 정조가 된다.
그리고 그의 유언대로 효장세자를 진종으로 효순현빈을 효순왕후로 추존하였으나 정조는 즉위 첫날 자신은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선언한다. 한편 조선 후기로 오면서 임금의 국상에도 3년상을 입는 사대부 수가 감소하게 되면서,
영조의 국상 당시 빈소를 마련하고 3년상을 마친 주도복, 이상호 등의 선비들을 특별히 상을 내려 포상하기도 했다.
* 부 : 제 19대 숙종 * 모 : 인원왕후 김씨 * 사친 : 숙빈 최씨
* 원비 : 정성왕후 서씨
* 계비 : 정순왕후 김씨
* 후궁 : 정빈 이씨 * 딸 : 화억옹주(조졸) / 화순옹주 * 아들 : 진종 행(효장세자)
* 후궁 : 영빈 이씨 * 딸 : 화평옹주 / 옹주 3명 (조졸) / 화협옹주 / 화완옹주
* 아들 : 장조 선(장헌세자, 사도세자)
* 후궁 : 귀인 조씨 * 딸 : 신생옹주(조졸) / 화유옹주
* 후궁 : 폐 숙의 문씨 * 딸 : 화령옹주 / 화길옹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