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공민왕, 기황후, 신돈
고려 31대 공민왕 = 전, 이재, 익당 (재위 1351년 ~ 1374년)
<출생>
1330년 고려 충숙왕과 고려 출신 공원왕후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몽골식 이름은 바얀 테무르이다.
그는 곧 원나라 조정의 압력에 의해서 몽골에 입조하게 된다.
1341년(충혜왕 2) 원나라에 건너갔다.
1344년(충목왕 원년)에 강릉부원대군에 봉해졌고,
1349년(충정왕 1년)에 원나라의 황족인 위왕의 딸 노국대장공주를 아내로 맞았다.
<원나라 입조와 귀국>
당시 형 충혜왕에게는 아들 충목왕과 충정왕 그리고 천민 출신 은천옹주 소생 석기 왕자가 있었다.
석기는 충혜왕 사후 은천옹주가 폐출되면서 처형되었다.
그러나 충정왕의 어머니 희비 윤씨가 국정을 농단하자, 이 사실을 고려의 관료들이 원나라에 알려왔다.
1351년 원나라 황제는 칙서를 내려 충정왕을 폐위시키고, 강릉부원대군은
노국대장공주와 함께 귀국(1351년 12월)하여 국왕이 되었다(1352년).
공민왕은 즉위 초 전왕 충정왕을 유배하였다가 사사하였다.
<무신 독재 혁파>
즉위한 지 두 달 뒤인 이듬해 2월부터 그는 전격적으로 개혁작업에 돌입해
2월 초하루에는 무신정권의 최우가 설치하여 인사행정을 맡아오던 정방을 폐지하였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개혁조서를 선포하여 토지와 노비에 관한 제반 문제를 해결할 것을 명령하였다.
1352년 8월 공민왕은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옛날의 임금들이 일심전력으로 나라를 다스릴 때, 친히 국정을 담당함으로써 견문을 넓혔고
하부의 실정 또한 살필 수 있었다.
지금이야말로 임금이 친히 나라를 맡기에 걸맞은 시기이다. 첨의사, 감찰사, 전법사, 개성부, 선군도관은
판결송사에 관하여 5일에 한 번씩 반드시 계를 올리도록 하라.’
공민왕의 이 명령은 곧 왕의 친정체제 구축을 위한 획기적인 조치였다.
무신정권 이후 왕은 허수아비에 불과했고, 원나라의 복속체제 아래에서 겨우 서무를 결재하는 권리만 되찾은 입장이었다.
하지만 공민왕은 거기서 만족하지 않고 각 부서의 중요 안건을 직접 챙기며 관계와 민생 전반에 대한
통치기반을 확립하려 했던 것이다.
무신정권 이후 거의 이뤄지지 않았던 정치토론장인 서연을 재개함으로써 더욱 구체화되었다.
공민왕은 8월의 서연에서 원로와 사대부들이 교대로 경서와 사기, 예법 등을 강의할 것과
전답 및 가옥, 노비와 억울한 죄수 문제를 시급히 해결할 것을 촉구하였다.
또한 첨의사와 감찰사를 자신의 눈과 귀로 규정하고, 정치의 옳고 그름을 위해 백성들의 이해관계에 대한
기탄없는 보고를 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에 따라 그동안 권력에 기생하던 성사달 등 부패한 고급관리들이 대거 하옥되었다.
또한 상장군 진보문의 아내 송씨의 간통사건을 적발하는 등, 부정을 일으킨 자들을 색출하여 하옥함으로써
관리들의 기강을 바로잡고 풍기를 단속하였다.
<반원 개혁>
그러나 그해 9월 공민왕의 과감한 개혁정치에 위기를 느낀 판삼사사 조일신이 정천기, 최하상, 장승량 등과 힘을 합쳐
대신 기원과 최덕림 등을 죽이고 정변을 일으켰다.
정변에 성공한 조일신은 곧 공민왕을 협박하여 자신을 우정승에 임명케 하고, 자신의 측근들을 요직에 배치하였다.
한달 뒤 조일신은 다시 자신과 함께 거사를 감행했던 최화상과 장승량 등을 죽였다.
이로써 조일신은 정권을 독차지하게 된다.
이때 조일신은 좌정승으로 승진하였으며, 판군부 감찰을 겸하며 공신 칭호까지 받아내기에 이른다.
그러나 공민왕은 그를 제거할 마음을 품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리고 며칠 뒤 정동행성에서 대신들과 의논한 뒤 김첨수를 시켜 조일신을 연행하는 데 성공했다.
조일신을 제거한 공민왕은 그 측근인 정을보, 이권, 나영걸, 고충절, 이군상 등 28명을 하옥하였다.
이어 이제현을 우정승, 조익청을 좌정승으로 임명하여 개혁적 정권 수립을 공고히 하게 되었다.
한편 당시 원나라는 피지배층 한족의 반란인 홍건적의 난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1354년 음력 7월부터 1356년까지 원나라의 지원 요청으로 최영, 이방실, 안우, 김용, 정세운, 유탁 등은
병력 2천을 이끌고 원나라에 파병되었다.
파병군은 고려종정군이라 불렸다.
파병 후 귀국한 장군들이 원나라의 몰락을 상세히 보고하여, 공민왕의 반원개혁에 힘을 실어주었다.
1356년(공민왕 5) 음력 4월 공민왕은 당시 원나라의 기황후를 등에 업고 권세를 부리던
기철등과 권겸, 노정 등의 부원 세력을 역모죄로 숙청하였는데, 이를 병신정변이라 한다.
또한 몽골의 연호와 관제를 폐지하고 문종 당시의 칭제로 환원하였으며, 원나라의 정동행중서성이문소도 폐지하였다.
1356년 음력 4월, 공민왕은 유인우에게 몽골이 빼앗아 백 년 넘게 장악하고 있던 쌍성총관부의 공격을 명령했다.
쌍성총관부 공격은 공민왕 반원 개혁의 상징적 사건이었다.
이때 고려인의 후손으로 총관부에서 대대로 몽골의 작위를 세습하던 이성계와 그의 부친 이자춘은
몽골을 배신하고 성문을 열어, 유인우에게 성을 바쳤다.
이를 계기로 이자춘 부자와, 고려 조정에 협력한 조돈 등이 고려 정계에 등장했다.
같은 해 공민왕은 인당, 최영을 파견하여 압록강 너머 원나라의 8참을 공격하여 격파하였으며, 파사부 등 3참을 점령하였다.
이 사건은 고려 최초의 요동 정벌로 평가된다.
<왜구, 홍건적의 침입>
1358년(공민왕 7) 최영이 이끄는 고려군이 4백 척 규모의 함대로 오예포에 침략한 왜구를 물리쳤다.
1359년(공민왕 8) 음력 12월부터 1360년(공민왕 9) 음력 2월까지, 홍건적 장수 모거경이 4만 명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하였다.
모거경은 서경까지 함락시켰으나 안우, 이방실, 최영이 지휘하는 고려군에게 패해 물러갔다.
1361년(공민왕 10) 음력 11월부터 1362년 음력 1월까지 반성, 관선생, 사류, 파두반이 이끄는
홍건적 20만 명이 다시 고려를 침공하여, 수도 개경까지 함락시켰다. 그러나 곧 고려군의 대대적인 반격을 받고
압록강 너머로 패주하였다.
1362년 김용의 음모로 정세운, 안우, 이방실, 김득배가 주살되고 만다.
같은 해 2월부터 7월까지 요동의 몽골 군벌 나하추는 쌍성총관부의 잔당인 조소생과 함께 고려의 동북면에 침공하였다.
그러나 나하추는 이성계가 이끄는 고려군에게 대패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쌍성총관부의 잔당 조소생, 탁도경 세력은 완전히 몰락하였다.
<암살 기도와 여진족 정벌>
이후 원나라에서는 고분고분하지 않는 그를 폐출하고 덕흥군 등을 추대할 계획을 수립하였다.
1363년초 그는 왜구 토벌을 계획하였으나 일시 중단하였다.
1363년 , 김용이 원나라의 지원을 받던 덕흥군과 내응하여 흥왕사에서 공민왕의 시해를 기도했으나 최영에 의해 진압되었다.
그러자 덕흥군은 1364년 음력 1월 원나라의 지원을 받아 최유와 함께 원나라군 1만 명을 이끌고 고려의 서북면에 침입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최영과 이성계에 의해 섬멸되었다.
고려 출신으로 원나라의 장군이 되었던 최유는 고려군에게 포로로 잡혔다.
1364년 음력 1월, 여진의 대추장 김삼선, 김삼개 형제가 고려의 동북면에 침입하였으나 이성계 휘하의 고려군에게 대패하였다.
또한 같은 달 원의 동녕로 만호 박백야대가 고려의 서북면 연주(평안북도 영변)을 침입하였다.
이는 원나라가 고려에 행한 최후의 공격이었다.
그러나 이 공격은 최영이 지휘하는 고려군에 의해 참패로 끝났다.
같은 해 음력 5월에는 김속명이 이끄는 고려군이 진해에 침입했던 3천 명의 왜구를 격파하였다.
<개혁의 실패>
홍건적과 왜구의 계속적인 침범은 고려의 국력을 소모시켰다.
1365년(공민왕 14), 오랫동안 아이를 갖지 못했던 노국대장공주가 드디어 회임을 하였다.
그러나 노국대장공주는 난산 끝에 사망하고 말았다. 노국대장공주의 죽음은 공민왕에게 극심한 충격을 주었다.
그는 노국대장공주의 초상화를 바라보며 통곡했고,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노국대장공주는 인덕왕후로 추존되었으며, 공민왕은 서거한 왕후를 추모하는 불사에 전력을 기울였다.
왕비의 사후 그는 술과 색으로 시름을 달랬고, 미소년들을 왕궁으로 출입시키기도 했다.
끝없는 상심에 빠졌던 공민왕은 1365년 음력 5월 을사환국을 통해 신돈을 등용하였다.
영산 출신 승려였던 신돈은 당시 살아있는 부처라는 소문이 있었고 그 소문을 들은 공민왕은 직접 영산까지 내려가
신돈과 만나 대담하였으며, 신돈을 개경으로 불러들여 시국을 논하였는데 그의 달변이 왕의 마음에 들게 된다.
<신돈의 등용과 제거>
수상직과 감찰서와 서운관의 수장직을 겸한 신돈은 전민변정도감을 설치(1366년)하여 권문세족들이 불법으로 겸병한 토지를
원소유자에게 환원시키는 한편 억울하게 노비로 전락한 사람들을 해방시켰고, 또한 성균관을 다시 설치하였다.
결국 신돈의 개혁으로 권문세족과 신흥 무인세력은 힘을 잃게 되었고, 이들은 곧 신돈의 정책에 대해 거세게 반발하였다.
1366년 음력 10월 김유가 1백 척의 규모의 토벌군을 이끌고 제주도를 공격했으나 패전했다.
당시 제주도는 삼별초의 항쟁이 진압된 뒤 몽골의 목마장이 설치되었으며, 다수의 몽골인들이 주둔하여 친원노선을 걷고 있었다.
이후 약 10여 년 넘게 제주도는 고려 조정에 반발하였다.
1368년(공민왕 17) 명나라가 건국하자 이인임을 보내어, 명나라와 협력하여 요동에 남은 원나라 세력을 공략하였다.
1370년(공민왕 19) 1월과 11월, 이성계와 지용수로 하여금 동녕부를 공격하여 오로산성을 점령하였고,
요동의 고려인을 본국으로 송환시켰다. 그러나 이것이 영토 확장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1371년 음력 7월 신해환국으로 신돈이 유배된 후 처형되었다. 이로서 공민왕의 개혁은 사실상 마감되었다.
그해 음력 9월 동녕부를 다시 공격하였다. 노국대장공주의 죽음과 신돈의 제거 이후 개혁정책에 염증을 느낀 그는
술과 남색에 빠져 방황하게 된다.
<죽음>
노국대장공주를 잃은 공민왕은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날로 변태적인 성격으로 변하였다.
1372년 자제위를 설치하여 젊고 외모가 잘생긴 청년을 뽑아 이 곳에 두고, 좌우에서 시중을 들게 하였다.
1374년 음력 7월부터 8월, 제주도에서 목호의 난이 일어났다.
이에 최영이 314척의 함대와 병력 25,600여 명을 이끌고 난을 진압하고, 제주도를 완전히 수복하였다.
홍윤은 공민왕의 후궁이었던 익비와 간통하였는데, 이를 최만생이 은밀히 공민왕에게 보고하였다.
공민왕은 "이 사실을 아는 자를 모두 죽여야겠다"고 말했다.
최만생은 자신까지 죽게될까 두려워 홍윤에게 사실을 고해바쳤다.
결국 공민왕은 홍윤, 권진, 홍관, 한안, 최선, 최만생에 의해 1374년(공민왕 23년) 9월 21일에 시해당했다.
향년 44세였다.
홍윤과 최만생 등은 공민왕을 칼로 수차례 난자하여 시해했다.
그 후, 칼질을 한 자들이 “밖에서 적이 들어왔다.” 라고 부르짖었는데, 가까이서 호위하던 위사들은 겁을 먹고 움직이지 않았다.
이들은 한결같이 입을 다물었고, 재상을 비롯한 신하들 또한 변고를 들었음에도 궁으로 들어오는 자가 없었다.
오직 내시 이강달만이 진실을 알았는데, 그 또한 이를 비밀에 부쳤다.
다음날, 임금의 명령이라 하여 이인임, 경복흥, 안사기 등을 소집해 사태 수습을 논의했다.
이인임은 처음에는 승려인 신조를 의심해 그를 감옥에 가두었다.
그러던 도중 병풍과 최만생의 옷에 묻은 피를 보고 그를 집중적으로 추궁하였으며, 이윽고 사태의 진상이 드러났다.
홍륜 등 일파는 체포되어 사지가 찢기는 거열형을 당하고 삼족을 멸하는 극형을 받았다.
<미술과 서예>
공민왕은 그림에 뛰어나 고려의 대표적 화가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진다.
글씨에도 능하였으며, 특히 대자(大字)에 뛰어났다.
서예작으로는 경북 봉화군에 있는 부석사 무량수전의 현판과 청량사 유리보전의 현판, 안동 영호루 현판 등이 있다.
이는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으로 피난중일 때 직접 써주었다고 한다.
* 부왕 : 27대 충숙왕 * 모후 : 공원왕후 홍씨
* 형 : 28대 충혜왕
* 비 : 인덕왕후(노국대장공주, 원 위왕의 딸)
* 후궁 : 혜비 이씨(경주 이제현의 딸)
* 후궁 : 익비 한씨(덕풍군 의 딸)
* 후궁 : 신비 염씨(서흥 염제신의 딸)
* 후궁 : 정비 안씨(죽성 안극인의 딸)
* 후궁 : 궁인 한씨
* 후궁 : 시비 반야(신돈의 시비)
* 차남 : 32대 우왕
<기황후>
기황후는 중국 원나라 혜종의 황후였다.
고려 출신의 여자로, 고려후기의 무신 기홍영의 증손녀이자 고려 고종의 사위인 기온의 종손녀였다.
원나라에 바쳐지는 공녀 중의 한사람이었으며 궁녀가 되었으나 고려 출신 환관 고용보의 주선으로 황궁의 궁녀가 되었으며,
기적적으로 황제의 총애를 얻어 귀빈이 되었으며, 황후 다나슈리가 탕기시를 몰아내고 황후의 자리를 차지한다.
원 순제의 총애를 받아 아들 아유시리다르 빌레그트를 낳았다.
1365년, 제1 황후인 곤기라트 출신의 바얀 후투그 사후 제1황후가 되었다.
이후 아들 아유시리다르 빌레그트를 황태자로 옹립하였고, 휘정원을 자정원으로 개편해
심복인 고용보를 초대 자정원사에 임명한 뒤 고려인 출신 환관과 고려인 출신 관리 및 일부 몽골관료들을 포진시켜
자신의 친위대로 삼았다.
친정인 기씨 일족을 통해 고려에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나 얼마못가 사라졌다.
공민왕에 의해 친정오빠 기철 등이 살해된 뒤 원 순제를 사주하여 충선왕의 서자 덕흥군을 왕으로 앉히고
고려를 침공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태자인 아유시리다르 빌레그트의 비(妃) 역시 고려 여인으로 정하여 권씨를 태자비로 삼았다.
북원의 초대 황제인 북원 소종의 모후이다. 몽골식 이름은 완자홀도이고, 존호는 보현숙성황후이다.
사후 유언에 따라 고려로 운구되어 경기도 연천현 동쪽 야산에 장사되었다.
본관은 행주이고, 전라북도 출신.
<신돈>
고려 말의 승려 출신 문신, 정치인이다.
영산의 대족의 서자로 태어나 승려가 되었으며, 매골승과 떠돌이 승려 생활을 하였다.
승려로 다니면서도 신분에 따라 차별대우를 하지 않아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받았으며,
개성 현화사의 주지가 되었다.
고려 공민왕을 만나 시국관이 왕의 마음에 들었으며 이후 노국대장공주를 잃고 실의에 빠진
고려 공민왕에 의해 등용되어 환속 후 1365년(공민왕 14년) 영문하부사와 감찰사판사, 서운관판사 등을 겸직하며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여 토지를 농민에게 보급하고, 양인이 노비가 된 자들을 석방시켰으며 성균관을 중건하고
공자를 국가의 스승으로 격상시키는 등의 개혁 정책을 펼쳤으나 권문세족의 반격과 개혁 정책에 염증을 느낀
공민왕에 의해 제거되었다.
그뒤 1371년 7월 수원부로 유배되었다가, 그가 역모를 꾸민다는 익명의 투서에 의해 사형당하게 된다.
이후 이성계 일파가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한 뒤, 자신들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우왕과 창왕을 그의 후손으로 날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