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우리나라 이야기

[고려] 예종, 인종, 의종, 명종

malimi 2011. 12. 21.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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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16대 예종 = 우, 세민 (재위 1105년~1122년)

숙종과 명의태후 유씨의 아들이다.

부왕인 숙종의 여진정벌에 대한 서소를 간직하고 즉위한 뒤 군법을 정비하고 신기군을 사열하는 등

여진정벌에 힘써 1107년에 윤관, 오연총 등으로 하여금 여진을 정벌하여 섬멸하고

이듬해에는 천리장성 동북지역에 9성을 설치하였다. 그

러나 계속적인 여진족의 침입과 9성 방비의 어려움, 윤관의 공을 시기하는 자들로 인하여

1년 만에 9성을 철폐하고 여진에게 반환하였다.

 

1109년 국학에 학과별 전문강좌인 칠재를 설치하여 관학의 진흥을 꾀하였으며

1112년에는 혜민국을 설치하여 빈민들의 시약을 담당하게 하였고 이듬해에는 예의상정소를 설치하였다.

또한 이자겸 일파를 견제하기 위해 한안인을 측근 세력으로 양성하였다.

1115년 완안부의 추장 아골타가 여진족을 통일하여 황제라 일컫고 나라 이름을 금이라 칭하자,

요에서 금나라를 정벌하기 위하여 고려에 원병을 청하였으나 거부하였고

1116년, 청연각과 보문각을 짓고 학사를 두어 경서를 토론하게 함으로써 유학을 부흥시켰으며

송나라에서 대성악을 들여왔는데 이것이 바로 아악이다.

1117년, 금나라에서 "형인 대여진금국황제가 아우인 고려 국왕에게 글을 보낸다." 는 글로써

화친하기를 청하였으나 조정의 반대로 회답하지 않았고 1119년 양현고라는 장학재단을 국학에 설립하였다.

1120년, 팔관회를 열고 태조의 공신인 신숭겸과 김락을 추도하여 도이장가를 지었으며

2년 뒤인 1122년 4월에 승하하였다.

능은 개성에 있는 유릉이며 시호는 문효이다.

 

* 부 : 15.숙종      * 모 : 명의왕후

   * 왕후 : 경화왕후 (선종의 딸)

   * 왕후 : 순덕왕후 (이자겸의 둘째 딸) 17.인종 / 승덕공주 / 흥경공주

   * 왕후 : 문정왕후 (진한공 유의 딸)

   * 비 : 숙비 최씨

 

고려 17대 인종 = 해, 인표 (재위 1122년 ~ 1146년)

예종과 순덕왕후 이씨의 맏아들이다.

1109년 예종의 장남으로 태어나, 1115년(예종 10) 음력 2월 7살의 어린 나이에 왕태자로 책봉되었다가,

1122년 음력 4월 아버지가 죽자 14살에 왕위를 이었다.

나이가 어린 것이 염려되었으나 외조부인 평장사 이자겸이 옹립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즉위 초에는 이자겸이 정권을 틀어쥐고 인종을 위협하였다.

심지어 이자겸은 자신의 셋째와 넷째 딸, 즉 인종의 이모들을 모두 인종에게 시집보내어 왕의 장인까지 되었다.

일부 신하들은 이러한 이자겸의 횡포에 반기를 품고 이자겸을 축출하려 하였으나

이자겸이 과거 윤관의 부하 장수인 척준경과 손을 잡고 권세를 부려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자겸은 심지어 인종을 자신의 집에 가두고 자신이 공공연히 왕이 될 것이란 소문을 퍼뜨렸다.

 

그러나 이자겸과 척준경의 사이가 곧 멀어지고 그사이 척준경은 인종과 가까워진다.

1126년(인종 4) 이자겸이 궐내에 침입하여 궁실을 방화하여 왕은 남궁에 파천하였으나, 최사전, 척준경 등으로 하여금 이자겸을 잡아 영광에 귀양 보내고, 이듬해 척준경도 귀양 갔다.

 

인종은 개경의 터가 좋지 않은 것 같아 고심하고 있던 차에 승려 묘청이 인종에게 서경으로 도읍을 옮겨야 한다 주장하였고,

역시 고려가 칭제건원, 즉 왕을 황제로 높이고 연호를 써야 한다는 자주적 사상을 인종에게 설득하였다.

그러나 당시 중국 북부의 금나라가 고려를 심히 견제하자 김부식 등 개경파는 이에 크게 반대하였고,

어떻게든 인종이 개경에 머물게 하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묘청이 인종의 신임을 믿고 오만방자하게 굴자 인종은 점차 묘청을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1135년(인종 13년) 묘청이 반란을 일으키니, 이것이 묘청의 난이다.

김부식을 서경정토대장으로 보내어 이듬해 평정하였다.

인종은 또한 김부식에게 ‘삼국사기’를 편찬할 것을 명하여 1145년 완성을 보았다.

 

1146년(인종 23년) 음력 2월 향년 38세에 태자에게 왕위를 물리고 병으로 죽었다.

능은 경기도 개풍군 청교면에 위치한 장릉이다.

 

어려서부터 재능과 기예가 있어 음률과 서화에도 능하였으며,

국가 재정을 절약하여 환관들을 감축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 부 : 16.예종      * 모 : 순덕왕후

   * 폐비 이씨 (이자겸 3녀, 이모)

   * 폐비 이씨 (이자겸 4녀,이모)

   * 왕후 : 공예왕후 임씨     

       * 아들 : 18.의종 / 대녕후 / 익양후(19.명종) / 원경국사 / 평량공(20.신종)

       * 딸 : 승경궁주 (공화후 영에게 하가) / 덕녕궁주 (강양공 감에게 하가)

       * 딸 : 창락궁주 (신안후 성에게 하가) / 영화궁주 (소성후 공에게 하가)

   * 선평왕후 김씨

 

고려 18대 의종 = 현, 일 (재위 1146년~1170)

의종은 인종과 임원후의 딸 공예왕후 임씨의 5남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그러나 모후인 공예왕후는 그보다 둘째 아들 대령후 경을 유난히 편애하여

그를 왕태자로 앉히려 했으나, 정습명의 반대와 인종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이후 둘째 동생인 대령후와 갈등하다가 후일 그를 역모로 몰아 유배보낸다.

 

1134년에 왕태자가 되었으며 국자감 사업으로 유학을 가르치던 정습명을 사부로 삼아 수학하였다.

1146년 인종이 죽자 즉위하였다.

즉위한 뒤에 그는 이미 인종 때에 일어난 이자겸의 전횡과 반란, 묘청의 난 등으로 크게 실추된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여

쇠약해진 왕권을 강화시키고자 노력하였다.

이를 위해 무신들을 총애하여 친위군을 강화시켜 나갔다.

이 과정에서 정중부, 이의방, 이고, 이의민 등이 발탁되었다.

 

인종은 죽으며 정습명에게 아들 의종을 지도할 것을 부탁하였는데, 선왕의 유지가 있다고하여

아는 것은 말하지 않는 것이 없었으며, 의종이 향락에 빠지자 이를 거침없이 지적, 질타하였다.

1148년(의종 2년) 정습명을 한림학사에 발탁, 제수하였고 1149년 좌승선으로 고시관이 되어 시부로 오광윤, 십운시로

조정시 등을 선발하였고, 다시 정습명을 추밀원지주사로 앉혔다.

 

왕에 대한 지적이 계속되자 의종은 정습명을 미워하고 기피하였다.

왕이 그를 꺼리는데다가 김존중과 정함 등은 밤낮으로 그를 헐뜯었다.

1151년 3월 정습명이 병으로 사직하자 왕은 즉시 김존중에게 임시로 그 직을 대신하게 하였다.

왕의 뜻을 이해한 정습명은 독약을 먹고 자결한다.

그러나 후일 의종은 무신정변으로 축출되며 뒤늦게 그를 찾았다고 한다.

 

그러나 말년에는 문신들 및 환관들과 어울려 유흥과 오락에 깊이 빠지고, 지나치게 불교, 음양설, 선풍을 중요시하고

유교를 멀리하는 등 정치적, 사회적 혼란을 초래하였고, 이 과정에서 무신들을 소외시켜 천대받게 만들어 무신정변의 계기를 낳았다.

 

그의 총애를 받던 문신들은 왕의 총애를 등에 업고 약탈을 자행하였고, 무신들을 무시하기 시작했다.

이후 의종의 측근 김돈중이 오병수박희를 하던 정중부의 수염에 불을 지른 것이 빌미가 되어 무신정변이 발생한다.

 

1170년 보현원에 거동하였을 때에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의 무신들이 반란을 일으켜 무신정변이 일어남으로써

무신 정권에 의해 폐위되어 3년간 거제도의 폐왕성에 유폐되었다.

그 뒤 1173년에 김보당 등 의종 복위 세력이 무신 정권에 항거하여 거병하면서 사람을 보내어

유배된 의종을 모셔와 받들고 경주로 가서 웅거하였다. 그러나 무신 정권이 보낸 군대에게 모두 패하였다.

 

1173년 의종은 총애하던 장수 이의민에 의해 곤원사 연못가에서 술을 두어 잔 마신 뒤에 등뼈가 꺾여지고

시체는 그대로 동경의 한 연못에 수장당하는 비참한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이때 그의 나이 47세였으며 이후 동생인 명종에 의해 능이 조성되었는데 바로 희릉이다.

현재 희릉의 위치는 알 수 없으나 개성 동쪽에 위치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부 : 17.인종      * 모 : 공예왕후

   * 장경왕후 (강릉공 왕온의 딸)      * 자녀 : 효령태자 / 경덕궁주 / 안정궁주 / 화순옹주

   * 장선왕후 (최단의 딸)

   * 궁인 무비

 

고려 19대 명종 = 호, 지단 (재위 1170년~1197년)

인종과 공예태후 임씨의 셋째 아들이며 의종의 동생이다.

1170년에 무신정변으로 의종이 폐위되고 무신들에게 추대되어 즉위하였다.

 

그러나 실권은 무신 정권의 지도자인 이고, 이의방, 정중부 등에게 있었다.

이후 그는 무신 정권 집권자들을 서로 견제하게 만들고 왕족들의 단합을 이끌어내어

무신들의 손아귀로부터 부단히 왕실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1173년에 동북면병마사 김보당이 무신 정권 타도와 전(前) 임금인 의종의 복위를 천명하며 군사를 일으켰으나,

무신 정권에 의하여 진압되고 의종은 시해되었다.

1179년 정중부의 전횡을 탐탁지 않게 여긴 경대승이 정변을 일으켜 정중부를 죽이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경대승이 죽자, 명종은 경주로 달아난 이의민을 다시 불러들였다.

이의민은 새로운 무신 권력자가 되어 자신의 아들들을 모두 요직에 앉히고 부정부패를 일삼아 갖은 횡포를 부리다가,

나중에 가서는 스스로 임금이 되려는 야심까지 품게 된다.

 

1196년 음력 4월, 최충헌이 이의민을 참살하고 정권을 장악하여 최씨 정권 시대가 열리게 된다.

이때 최충헌은 거사의 명분을 얻기 위하여 앞으로의 국정개혁안의 내용을 담은 봉사 10조를 올리고

명종은 이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러나 최충헌의 난 초기의 혼란기를 기회로 무신 정권을 타도하려 하였으나

1197년에 최충헌 형제의 정변으로 폐위를 당하고 창락궁에 감금되었다.

유폐된 지 6년 후에 병을 얻어 승하하였으며 능은 장단군 장도면에 위치한 지릉이다.

 

의종, 명종, 신종은 문종의 4대손이면서 동시에 증손녀 사위가 된다.

의종, 명종, 신종은 인종의 아들로 문종-숙종-예종-인종으로 이어진다.

 

문종의 서자인 양헌왕의 아들이자 손자인 강릉공 온은 의종의 비인 장경왕후, 명종의 비인 광정왕후,

신종의 비인 선정왕후의 친정아버지가 된다.

 

* 부 : 17.인종      * 모 : 공혜왕후

   * 왕후 : 광정왕후      * 자녀 : 22. 강종 / 연희궁주 / 수안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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