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문종, 대각국사 의천, 순종, 선종, 헌종, 숙종
고려 11대 문종 = 휘, 촉유 (재위 1046년~1083년)
문종은 현종과 원혜왕후 김씨의 셋째 아들로 덕종과 정종의 이복 동생이며 정간왕에 추증된 평양공 왕기의 친형이었다.
덕종과 정종은 그의 이복형이면서 동시에 이종 사촌 형이기도 했는데 이모이자 적모인 원성왕후의 소생이었다.
1022년 낙랑군으로 봉해졌으며, 1037년 내사령에 임명되었다.
이복형인 정종이 세상을 뜬 후, 정종의 유지로 왕위를 계승했다.
문종은 즉위하자마자 문하시중 최충에게 명하여 율령, 서산을 정리하게 함으로써 각종 법을 만드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장인인 이자연은 사심없이 그를 보필하였고, 이자연과 최충을 통해 문치 정책을 추진해 나간다.
불교를 신봉하여 1067년 흥왕사를 세웠고, 자신의 아들을 부처에게 바치겠다고 하고 태자 왕후를 출가시켜 승려가 되게 하니
그가 바로 대각국사 의천이다.
유학도 장려하여 이 무렵 최충의 9재를 선두로 12도의 사학이 발달하였다.
지방에서도 중앙에서 파견하는 관리의 수가 늘었다.
국방과 외교에도 힘써 동여진이 북변을 침략하자 이를 토벌하여 동여진에 대한 초기의 정책은 다소 강경했으나
이후 점차 회유책을 썼고, 특히 송나라, 이슬람 등과 친선을 도모하여 교역이 융성하였다.
1056년 일본 사신이 개경을 방문하였다. 빈민 구휼에서도 치적을 쌓았다.
재위 37년간 고려의 문물 제도는 크게 정비되어 이 시기를 '고려의 황금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불교, 유교, 미술, 공예 등
문화 전반에 걸쳐 괄목할 수준을 드러내 문화가 크게 발전되었다.
그의 즉위 직후 왕위를 계승한 장남 순종 역시 재위 1년만에 병사하여 둘째 아들 선종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능은 개성시 장풍군에 위치한 경릉이다.
* 왕후 : 인평왕후 (현종과 원성왕후의 딸)
* 왕후 : 인예왕후 (이자연의 첫째 딸)
* 아들 : 순종(12대 왕) / 국원후 (13대 선종) / 계림공 (15대 숙종) / 대각국사 의천 / 상안공
* 아들 도생승통 / 금관후 / 변한후 / 낙랑후 / 총혜수좌
* 딸 : 적경궁주 / 보령궁주
* 현비 : 인경현비 (이자연의 둘째 딸)
* 아들 : 조선공 도(양헌왕에 추증)
* 손자 : 강릉공 온 (의종비 장경왕후, 명종비 광정왕후, 신종비 선정왕후의 아버지)
* 아들 : 부여공 / 진한공 (예종비 문정왕후의 아버지)
* 현비 : 인절현비 (이자연의 셋째 딸)
* 인목덕비 김씨
<대각국사 의천>
해동 천태종을 세운 한국 천태종의 중흥시조로서, 대한불교 천태종에서 3대 종조 가운데 한 사람으로 추앙받고 있다.
아버지는 고려 제11대 왕인 문종이며, 어머니는 인예왕후 소생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11세되던 해에 부왕 문종이 왕자들을 불러 "누가 출가하여 복전이 되겠는냐."고 물었을 때,
그가 스스로 출가를 자원하였다 한다.
1065년 5월 14일에 경덕국사를 은사로 삼아 출가하여, 영통사에서 공부하였다.
1065년(문종 19) 왕사 난원이 의천의 머리를 깎아 승려가 되게 하였고, 그 뒤 영통사에 있었으며,
13세에 우세의 호를 받고 승통이 되었다.
그해 10월 불일사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영특하였는데, 승려가 된 이후에도 학문에 더욱 힘을 기울여 대승과 소승의 경, 율, 론 삼장은 물론,
유교의 전적과 역사서적 및 제자백가의 사상에 이르기까지 섭렵하지 않은 바가 없었다.
1084년(선종 1) 송나라 정원 법사의 초청을 받고 왕에게 송나라에 가서 구법할 것을 청했으나 왕이 말리므로 남루한 옷차림으로 몰래
제자 수개만 데리고 1085년 송나라로 떠나자 왕은 크게 놀라 관리와 제자 낙진, 혜선, 도린 등으로 수행하게 했다.
송나라 철종이 영접하여 계성사에 있게 하고, 화엄 법사 유성으로 하여금 상종하게 하여, 현수, 천태 양교의 판교동이,
유묘의 뜻을 문답 하였다.
또 상국사의 원조선사와 흥국사 서천의 삼장 천길상을 찾아보고 주객원외랑 양걸을 대동하고 송나라 서울을 출발
금산의 불인 선사 요원에게 들리고, 항주의 원공 법사를 찾아 혜인에게 ‘화엄소초’의 의심되던 것을 물었다.
그때 선종이 귀국을 청하자 자변 대사에게 천태종의 경론을 듣고, 천태산 지자대사의 부도에 예배, 발원문을 지어
천태종을 본국에 중흥할 것을 맹세했다. 또 영지의 대지 대사에게 계법을 받는 등 고승 50여 명을 만나 법요를 문답하였다.
1086년(선종 3) 왕과 왕후의 영접을 받고 환국하여 석전과 경서 1천 권을 바쳤으며, 흥왕사에 있으면서 그곳에
교장도감을 두게 하고, 요나라, 송나라, 일본에서 경서를 구입하고, 고서를 수집하여 ‘속장경’ 4천 7백 40여 권을 간행하였다.
1094년(선종 11) 흥원사의 주지로 있었고, 그 후 해인사, 흥왕사에 있다가 국청사가 새로 세워지자 주지를 겸하고
처음으로 천태교를 강하였다.
송나라의 승려와 불교학자들과 서신으로 사상교류를 하는 한편, 국내에서도 후학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숙종 때 주전론을 주장하여 사회경제 면에도 많이 공헌한 바 있고, 1098년(숙종 3) 왕자 징엄이 승려가 되자 그 스승이 되었다.
1101년(숙종 6) 국사로서 활동하던 중 총지사에서 사망하였다.
1101년 10월 5일 문병 온 형왕 숙종에게 "원한 바는 정도를 중흥하려 함인데 병마가 그 뜻을 빼앗았나이다.
바라옵건대 지성으로 불법을 외호하시와 여래께서 국왕, 대신에게 불법을 외호하라 하시던 유훈을 봉행하시오면
죽어도 유감이 없나이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당시 그의 나이 향년 47세, 법랍 36세였다.
오관산 영통사 동쪽에 장례하였으며, 김부식의 명문으로 된 비가 세워지고, 또 남숭산 선봉사에도 임존의 명문으로
해동 천태 시조 대각국사비가 세워졌다.
서호의 승려 혜소는 국사의 고제로서 후에 행록 10권을 선집하였으며, 태백산인 융응은 국사의 적사로 법해의 용문이라 호하였다.
저서로는 <신편제종교장총록>3권, <신집원종문류>22권, <석원사림>250권, 의천의 사후 그의 제자들이
그의 행적과 시 등을 모은 <대각국사문집> 23권과 <대각국사외집>13권, <간정성유식론단과>3권, <천태사교의주>3권 등이 있다.
그러나 이 저술들이 거의 실전, 없어지고 현재는 <신편제종교장총록>3권과 <대각국사문집>, <대각국사외집>의 낙장본,
<원종문류>, <석원사림>의 일부, <간정성유식론단과> 등이 현전하여오고 있다.
<김은부>
김은부는 신라왕실의 후손이었다. 신라의 왕족인 김긍필의 아들로, 영주 안산현에서 태어났다.
공주 절도사로 있을 때 요나라(거란)의 침입을 피하여 현종이 공주에 왔을 때 예를 갖추어 극진한 영접을 하였고,
요나라군이 물러가고 현종이 파산역에서 돌아올 때에 딸을 바쳐 현종의 원성왕후가 되었다. 원혜왕후, 원평왕후도 모두 그의 딸이다.
그 후 형부시랑이 되었고 요나라에 사신으로도 다녀왔으며, 지중추사, 호부상서에 승진하고 중추사상호군이 되었다.
죽은 뒤 왕후의 인연으로 창국공신의 호와 개부의동 삼사수사 공상주국 안산군개국후 등의 여러 벼슬을 받았으며,
그의 처도 안산군 대부인에 피봉되었다.
덕종, 정종, 문종, 추존왕 정간왕은 그의 외손자들이면서, 동시에 덕종, 정종 형제와 문종, 추존왕 정간왕 형제는 이종사촌간 이었다.
고려 12대 순종 = 훈, 의공 (재위 1083년)
1047년 12월에 태어났으며 초명은 휴, 이름은 훈. 자는 의공이다.
8세 때인 1053년 2월에 태자에 책봉되었다가 1083년 7월 문종이 죽자 37세의 나이로 고려 제12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어려서부터 질환이 있었던데다가 아버지 문종의 승하를 너무나도 슬퍼한 나머지 심신이 쇠약해져 재위 3개월 만에 승하하였다.
시호는 선혜이며, 능은 개성에 위치한 성릉이다.
* 정의왕후 (현종과 원혜왕후 소생인 평양공의 딸)
* 선희왕후 (김양검의 딸이며 문종에 의해 쫓겨났다)
* 장경궁주 (이자연의 손녀이자 이자겸의 누이. 순종의 사후 궁노와 간통하여 쫓겨났다)
고려 13대 선종 = 운, 계천 (재위 083년~1094년)
고려 문종의 둘째 아들로 인예왕후 소생이었다. 글을 잘 썼고 시도 지었다.
1083년 부왕 사후 왕위를 계승한 순종이 재위 1년만에 병사하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선종시대는 불교와 유교의 균형적인 발전을 토대로 매우 안정되었으며, 외교에서도 거란을 포함한 송, 일본, 여진 등과
광범위한 교역을 추진하며 주도권을 행사하였다.
1084년에는 승과를 설치하고 불교를 장려하였으며, 변경을 지키는 사졸들에게 저고리와 바지를 하사하였다.
1085년 왕의 아우 의천이 몰래 송나라에 들어가 2년 동안 불법을 공부하고 돌아오자 송나라에서 항의하였으나
선종은 사절을 보내 이를 무마시켰다.
의천을 태운 배가 예성강 포구에 도착하자 선종은 친히 마중 나가 환영의식을 성대하게 하였는데 의천은
불경과 경서 1,000권을 바쳤고, 흥왕사에 교장도감을 세울 것을 건의하였으며, 송, 요, 일본 등지에서 서적을 사들여
거의 4, 000여 권에 달하였는데 모두 간행하게 하였다.
1089년 회경전에 13층 금탑을 세우고, 인예왕후의 청에 따라 천태종의 중심사찰인 국청사를 짓게 하였다.
1091년 예부의 주장으로 국학에 72현의 상을 벽에 그려 붙였는데, 그 차례는 송나라 국자감의 예를 따르고,
그 복장은 10철을 모방하게 하였다.
1092년 병이 들어 의원이 처방한 약을 먹고 문득 시를 지었는데 “약효가 있고 없음이야 무엇을 염려하랴.
덧없는 인생 시작이 있었으니 어찌 끝이 없으리. 오직 원하는 것은 여러 가지 선행을 닦아 청청한 곳에 올라
부처에게 예를 드림이네.”라는 구절이 있어 만백성이 안타까워 하였다. 1094년 2월 열병을 한 뒤
재위 10년 7개월 만에 향년 46세로 승하하였다.
능은 개성에 있는 인릉이며, 시호는 사효이다.
사숙왕후와 정신현비는 자매간이었고, 원신궁주는 사숙왕후 자매와 사촌간이었다.
* 사숙왕후 (이석의 딸) * 아들 : 14대 헌종 * 딸 : 수안택주
* 정신현비 (이석의 딸) * 딸 : 경화왕후(예종의 비)
* 원신궁주 (이정의 딸) * 아들 : 한산후
<사숙왕후>
선종의 정비이자 헌종의 어머니이다.
정신현비의 육촌 언니이며, 시어머니인 인예왕후, 인경현비, 인절현비에게는 친정 조카가 된다.
선종이 국원공으로 있을 때 선종과 혼인하여 연화궁비에 책봉되었으며 1083년, 선종이 순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자 왕후로 책봉되었다. 1094년, 선종이 승하하고 아들인 헌종이 즉위하자 왕태후가 되었으며 왕실의 어른으로서 11세의 어린 헌종을 대신하여 섭정을 하였다. 이 기간 동안 사숙태후는 왕태후가 되어 자신이 살던 궁전을 중화전으로 부르게 하였으며 휘하에 부를 두어
자신의 독자적 정치 기구인 영녕부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이로 인해 왕권이 약화되고 이자의가 반란을 일으키는 등 국가적 혼란이 일어나게 되자
사숙태후는 1년 만에 섭정을 거두었으나 헌종은 얼마 지나지 않아 숙부인 계림공에 의해 축출되고
1095년, 숙부인 계림공이 고려의 제15대 왕인 숙종으로 즉위하였는데 즉위 이후 숙종은 왕권의 강화를 목적으로
사숙태후의 궁전인 중화전의 호와 사숙태후가 설치한 영녕부를 폐지하였고
1097년에는 헌종마저 승하하였으나 이후에도 옛 궁에 살면서 오래도록 조금도 허물이 없었다고 한다.
고려 14대 헌종 = 욱 (재위 1094년~1095년)
사숙태후 이씨의 맏아들이다. 신병으로 숙부에게 왕위를 선위하고 2년 뒤에 사망하였다.
1094년, 승하한 선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지만 나이가 어리고 소갈증으로 매우 병약하여
어머니인 사숙태후가 수렴청정 하였다.
1년 뒤인 1095년에 이자의가 한산후 균을 옹립하려고 했으나 숙부인 계림공 왕희(=숙종)가
이를 미리 알고 장사 고의화를 시켜 살해했다.
이후 왕희에게 선위하고, 물러나 있다가 2년 후인 1097년 14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능은 온릉이나 현재 위치는 알 수 없고 개성 동쪽에 위치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부왕 : 13.선종 * 모후 : 사숙왕후 이씨
* 동생 : 수안택주
* 서모 : 정신현비 이씨 * 이복 누이 : 경화왕후 (예종의 비)
* 서모 : 원신궁주 이씨 * 이복 동생 : 한산후
* 왕후 : 회순왕후 (이부상서 소계령의 딸)
고려 15대 숙종 = 희, 옹, 천상 (재위 1095년~1105년)
부지런하고 검소하며 과단성이 있고 오경, 제자서, 사서 등에 해박하였다.
문종의 큰 기대를 받아 "뒷날에 왕실을 부흥시킬 자는 너다." 라고 하여 문종 때 계림공에 책봉되었는데
친조카인 헌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1년 만에 왕위를 찬탈하여 1095년에 즉위하였다.
1096년, 6촌 이내의 혼인을 금하였고 1097년에는 주전관을 두고 주화를 만들어 통용하게 하였으며
1101년에는 본국의 지형을 본떠서 활구를 주조하였고 이듬해에는 고주법을 제정하여 해동통보
1만5000관을 만들어 문무백관과 군인들에게 분배하였다.
1099년 김위제의 주장에 따라 남경을 중시하고 남경개창도감을 두어 궁궐을 조성하였으며
1102년에 예부에서 "우리나라가 예의로 교화하기는 기자로부터 비롯되었으니 원컨대 그 분묘를
찾고, 사당을 세워 제사하십시오." 라고 숙종에게 아뢰자 숙종은 서경에 기자사를 세웠다.
1103년 동여진의 추장 영가가 사신을 보내어 내조하였으나 추장이 되면서 고려에 침입하였다.
같은해 2월에 임간이 정주에서 패하였고, 3월에는 윤관이 여진정벌을 계획하였지만
역시 이기지 못하고 화약을 체결하고 돌아왔다.
이에 따라 윤관의 주장으로 별무반을 처음 설치하였다.
윤관은 “신이 여진에게 패한 것은 저들은 기병이고, 우리는 보병이므로 대적할 수 없었습니다.”라고 아뢰니
드디어 기병으로 구성된 신기군, 보병으로 구성된 신보군)과 승도들로 구성된 항마군을 두어 별무반이라 칭하고
여진정벌을 준비하게 하였다.
1105년 서경에 순행하여 동명왕묘에 제사하고 돌아오는 도중에 병이 들어 개경으로 돌아오다가 서경에서 승하하였다.
능은 경기도 장단군에 있는 영릉이다.
* 명의왕후 유씨 * 아들 : 16대 예종 / 상당후 왕필 / 원명국사 / 대방공 / 대원공 왕효 / 제안공 왕서 / 통의후
* 딸 : 대녕궁주 / 흥수궁주 / 안수궁주 / 복녕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