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우리나라 이야기

[고려] 현종, 덕종, 정종

malimi 2011. 12. 20. 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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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8대 현종 = 순, 안세 (재위 1009년~1031년)

992년 태조 왕건의 서자 왕욱과 대종의 딸이자 태조의 손녀인 헌정왕후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981년 경종이 사망하면서 그의 제4비인 헌정왕후 황보씨(대종의 딸)는 궁에서 나와 살았다.

이때 그 이웃에 왕욱(태조의 아들)이 살았는데, 두 사람은 자주 왕래하다보니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고,

결국 정을 통해 헌정왕후는 왕욱의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 헌정왕후와 현종은 모자간이면서도 사촌 남매간이 된다.

992년 헌정왕후는 아이를 낳고는 곧바로 죽었다. 이 아이가 왕순(=현종)이다.

 

후일 왕순은 성종의 명에 의해 보모에게 맡겨졌다.

어느날 왕순이 궁에 들어와 성종과 대면하게 되는데, 이때 왕순이 성종의 무릎 위로 기어 올라오며 '아비, 아비'라고 불렀다.

이때 성종은 눈물을 흘리며 왕순을 아버지 왕욱에게 보냈다.

왕순은 아버지 왕욱이 사망하는 996년까지 귀양지 사수현(=사천시)에서 함께 살았고, 왕욱이 사망한 이듬해인

997년에 개경으로 돌아왔다.

 

<출가와 탄압>

현종은 12세 때 대량원군에 봉해졌으나 천추태후가 김치양과의 사이에 낳은 아들을 왕위에 앉히려고 그를 숭교사에 보내

승려로 만들었다.

이모의 손에 이끌려 강제로 승려가 되었지만 이후 숭교사에 자객들이 자주 들이닥치자 목종과 숭교사 내 승려들의 도움으로

1006년에 신혈사로 거처를 옮겨갔다.

여러 차례 김치양과 천추태후가 자객을 보내 자신의 목숨을 노리자 신혈사의 주지승인 진관대사가 그를 보호하기 위해 땅굴을 파

그를 그 곳에 대피 시킨 뒤 그 위에 침대를 배치하는 기지로 위기를 모면하였다.

1009년(목종 12년) 서북면 순검사 강조가 목종을 폐하고 옹립하여 왕위에 올랐다.

 

< 거란의 재 침입>

다음해 거란이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침입하자 강조에게 30만 군대로 방어하게 했으나

강조가 패하고 개경이 점령당하는 바람에 나주로 지채문의 호종을 받아 피난갔다가 환도했다.

이 때의 피난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비참한 몽진으로 기록된다.

현종은 창화현 아전에게 병장기를 빼앗기고 적성현에서는 무뢰배들이 그에게 활을 쏘았으며

나중에 공주를 나오면서 임신한 왕후마저 떼어놓고 피난해야 할 정도였다.

그리고 이 때에 공주에서 머물다 김은부의 딸과 관계를 맺어 나중에 그의 딸들이 왕후가 된다.

전주에서는 절도사 조용겸이 현종을 납치하려다 위기를 겨우 모면하기도 하였다.

이 기간에는 실질적으로 고려의 중앙정부는 실질적으로 와해된 상태였으며 각처의 장수들에 의해서 거란을 물리치게 된다.

 

<무인세력과의 갈등>

1014년 거란의 침입으로 파괴된 궁궐을 다시 짓고 전쟁으로 크게 불어난 재정을 보전하기 위하여 무신과 군인들의 영업전을 빼앗았다.

이에 거란과의 싸움에서 공이 높았던 상장군 최질, 김훈등이 억울함을 호소하며

이 정책을 실행한 문신들을 잡아 대궐로 난입하여 현종앞에서 이들에게 매질을 하고는

거란과의 전공이 높은데도 상을 받기는커녕 영업전을 빼앗긴 억울함을 호소하며

무신도 공이 높으면 문신처럼 높은 품계를 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하였다.

현종은 일단 수락하였다.

 

1015년 현종은 이자림과 모의하여, 공이 높은 무신들을 위로한다면서 잔치를 열어 고위 무신들을 불렀다.

잔치가 무르익어 무신들이 술에 취하게 되자 이들을 주살했다.

19명의 장군들이 살해되었으며, 이 사건으로 문치가 확고해졌다.

요사에 따르면 거란은 이 사실을 탐지했고 3차 침공에 대한 주장이 거란 조정에서 힘을 얻게 되었다.

 

<거란의 제3차 침입>

1018년 거란이 현종의 입조를 요구하며 다시 쳐들어왔으나 강감찬이 구주에서 거란군을 대파함으로써 위기를 모면했다.

1022년 향리의 장의 명칭을 군현에서는 호장, 향, 부곡 등에서는 장으로 간소화시키고,

1024년에는 개경을 확장하여 5부 35방 314리로 정했다.

또한 그동안 폐지되었던 연등회와 팔관회를 부활시켰으며, 최초로 문묘종사의 선례를 만들었다.

 

경제 정책으로는 농상을 적극적으로 장려하고 감목양마법을 제정했으며 조세의 균등을 기하고 양창수렴법을 실시했다.

세력 기반이 취약했던 그는 자신의 외가와 가까운 구 신라계 인사들을 중용하여 요직에 발탁하였다.

거란과 변방 야인들의 침입에 대응하여 송나라와의 외교를 강화하는 한편, 취약한 왕권을 위협할 수 있는 왕족과

호족들을 경계하였다.

1031년에 40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능은 경기도 개풍에 있는 선릉이며, 시호는 원문이다.

 

* 부 : 안종, 태조의 아들. 신성왕후 김씨 소생

* 모 : 헌정왕후 황보씨, 대종 왕욱의 딸. 경종의 왕비.

   * 왕후 : 원정왕후 (성종의 딸)

   * 왕후 : 원화왕후 (성종의 딸)      * 딸 : 효정공주 / 천수공주

   * 왕후 : 원성왕후 (김은부의 딸)      * 아들 : 연경군 (9대 덕종) / 평양군 (10대 정종)

      * 딸 ; 인평왕후(문종의 제 1비) / 경숙공주

   * 왕후 : 원혜왕후 (김은부의 딸)      * 아들 : 낙랑군 (11대 문종) / 평양공

      * 딸 : 효사왕후(덕종의 제 3비)

   * 왕후 : 원용왕후 유씨 : 모후 헌정왕후의 조카이자 경장태자의 딸

   * 왕후 : 원목왕후 (서희의 손녀)

   * 왕후 : 원평왕후 (김은부의 딸)      * 딸 : 효경공주

   * 숙비 : 원순숙비 (김인위의 딸)      * 딸 : 경성왕후 (덕종의 제 1비)

   * 귀비 : 원질귀비 (왕가도의 딸. 덕종의 비인 경목현비의 언니)

   * 귀비 : 귀비 유씨

   * 궁인 : 궁인 한씨     * 아들 : 검교태사 왕충

   * 궁인 : 궁인 이씨 / 궁인 박씨

 

 

고려 9대 덕종 = 흠, 원량 (재위 1031년~1034년)

덕종은 거란에 사신을 보내어 거란이 압록강에 가설한 부교 및 보성을 파괴할 것과 고려인의 송환을 요구하였으나,

요 흥종이 이를 거부하자 하정사의 파견을 중지하였다.

또한 국경 지대인 삭주, 영인진, 파천에 성을 쌓았다.

 

이듬해 8월 평장사 유소에게 명하여 압록강에서 영원 등 14성을 거쳐 동해안의 도련포까지 천리장성을 축성하게 하자

동여진인과 거란인들의 투항이 속출하였다.

처음으로 국자감시를 실시하고, 왕가도를 감수국사로, 황주량을 수국사로 삼아 현종 때 시작한 국사편찬사업을 완성하였다.

능은 숙릉이나 현재 위치는 알 수 없으며 개성 북쪽 교외에 위치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덕종은 3명의 비를 두었는데 경목현비를 제외한 두명은 현종의 딸이자 그의 이복누이다.

 

* 왕후 : 경성왕후 (현종과 원순숙비 김씨의 딸)

* 비 : 경목현비 (왕가도의 딸. 원질귀비의 여동생)      * 딸 : 상회공주

* 왕후 : 효사왕후 (현종과 원혜왕후 김씨의 딸)

 

 

고려 10대 정종 = 형, 신조 (재위 1034년~1046년)

1034년 동복형 덕종이 죽자 그 유언으로 왕위를 승계하였다.

서경과 개경에 팔관회를 열어 대사면령을 내림으로써 백관과 백성들의 화합을 도모하였으며, 황주량, 최제안, 최충, 유지성 등을

각각 예부, 이부, 형부, 공부상서로 기용하여 조정을 개편하였다.

 

즉위년 11월 팔관회를 열었을 때 송나라의 상인들과 동, 서여진 및 탐라국에서 토산물을 바쳤는데,

이후 이들 동, 서 여진의 사신 및 탐라국 사절단에게도 팔관회를 관람하도록 규정을 만들었다.

1035년 서북로 함경남도 송령에 장성을 쌓아 변방의 수비를 강화했고,

지금의 평안북도 창성에 성을 쌓아 창주라 하고 백성을 이주하여 살게 했다.

1036년 제위군에게 토지를 더 지급하여 변경의 방비를 맡게 하였다.

1036년 동서대비원을 수리하여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에게 무료로 의복과 옷을 지어주게 하였다.

 

그러나 거란의 계속된 위협으로 1037년 압록강 일대에서 거란의 침입을 받자, 강화 회담을

체결하여 한동안 단절되었던 조공을 다시 바치기로 하여 거란과 화친을 맺었으며, 1038년부터는 거란의 연호를 사용하였다.

1039년 거란의 요나라 황제로부터 책봉교서를 받았다.

 

1039년 광종때 폐지된 노비종모법을 다시 부활하여 노비 여성에게서 태어나는 자녀는 노비가 되도록 했고,

1045년 임진강에 부교를 놓았다.

그리고 비밀리에 백성들을 징발하여 정변진, 숙주, 영원, 평로, 장주, 정주, 원흥진 등에

계속 성을 수축하게 하였는데, 1044년 천리장성을 완공케 했다.

 

또한 예학 관련 서적의 반포를 명하여 그해 ‘예기정의’, ‘모시정의’ 등을 간행하였다.

또 5역, 5천, 불충, 불효한 자와 향, 부곡인, 악공, 잡류 들의 자손들이 과거에 응시할 것을 금지, 박탈했다.

1046년 장자상속법을 제정했다.

 

병석에 누웠을 때 동생인 문종에게 왕위를 선위하고 붕어하였다.

병이 위독해지자 이복 동생 휘를 불러 임시로 국정을 맡게 하고 그에게 선위한 것이다.

능은 주릉이나, 그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동복형인 덕종은 왕위 계승문제로 이복누이를 비로 맞이한 것과 달리 정종은 왕비들을 왕족이 아닌 다른 귀족가문과 혼인하여

이때부터 근친혼에서 벗어난 것으로 알 수 있다.

 

* 왕후 : 용신왕후 한씨

* 왕후 : 용의왕후 한씨      * 아들 : 애상군 / 낙랑후 / 개성후

* 왕후 : 용목왕후 이씨      * 딸 : 도애공주

* 비 : 용절덕비 (김원충의 딸)

* 궁주 : 연창궁주 노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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