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성종, 서희, 목종 김치양, 강조
고려 6대 성종 = 치, 온고 (재위 981년~997년)
성종은 960년 태조 왕건의 아들 대종과 선의태후 유씨(柳氏)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969년 아버지 왕욱을 여의고 개령군을 세습하였으며 어머니 선의왕후 유씨마저 여의어 할머니인 신정왕후의 손에 길러졌다.
981년(경종 6년) 경종이 위독하자 내선으로 왕위에 올랐다.
본래 전왕이자 사촌형인 경종은 성종의 여동생인 헌애왕후와의 사이에서 이미 2살 된 아들 왕송(=목종)이 있었으나,
너무 어려 국사를 맡을 수가 없었기에 대신 왕위에 오른 것이다.
성종은 조카 왕송을 개령군으로 임명하고 친자식처럼 길렀다.
<즉위>
즉위 직후 충과 효로서 다스리겠다며 유교적 통치를 선언하였고, 아버지 왕욱을 대종 선경대왕으로 추존하고,
모후를 선의왕후로 추존한 뒤 종묘에 합사하였다.
이후 태조의 기일 전후 5일, 아버지 대종과 어머니 선의왕후의 기일 전후로 3일간 육식과 음주를 하지 않고,
도살장에서의 도살을 금하고 경건하게 보냈다.
호족들 중에는 불교정책에 반하는 점과 그가 대종의 아들이 아니라 광종의 사위 자격으로
왕위를 계승하였음을 주장하며 반발하는 이들도 있었다.
<체제정비와 외교 활동>
982년(성종 1년) 경관 5품 이상으로 하여금 봉사를 올리도록 하여 정치의 득실을 논하게 했다.
이에 참여한 최승로 등 유학자의 자문, 건의로 신정을 단행하고, 국자감에서의 유학 교육을 강화하였다.
또한 고려 초창기의 제반 문물제도를 정비하여 국가의 기반을 튼튼히 했으며,
자신의 신념에 따라 유교를 국가의 지도 원리로 삼고 중앙 집권적인 봉건 제도를 확립하였다.
그해에 행정 개혁을 단행하여 백관의 칭호를 개정하였고, 983년(성종 2년) 3성, 6관을 두었으며,
서무를 분장한 7시를 설치하는 등 중앙 관제를 제정하였다.
또 언론을 맡은 사헌부, 군국의 기밀기관인 중추원 등을 두었다.
한편 행정 개혁의 일환으로 지방에는 처음에 12목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팔관회, 연등회를 폐지하고 왕의 내리는 명령인 조서를 교서로 낮추는 등 북송에 사대주의 노선을 걷기 시작하였다.
<헌정, 헌애왕후>
성종의 두 자매인 헌애왕후와 헌정왕후, 고종 사촌인 헌숙왕후는 호족을 견제하려던
백부 광종의 근친혼 정책에 따라 광종의 태자 경종의 왕비가 되었다.
그러나 헌애왕후는 아들 개령군 송을 낳았고, 헌정왕후에게는 소생 자녀 없이 사망한다.
경종이 죽자 헌애왕후는 궁궐에서 살았고, 헌정왕후는 왕륜사 남쪽에 있는 사저로 나가 살았다.
그러나 헌정왕후는 이웃에 살던 이복 숙부 안종(왕욱)과 정을 통하였고, 이 사실을 말할 수 없었던 왕욱의 집 가노는 집에
방화를 하여 왕과 대신들이 오게 한다.
이때 임신 사실이 성종에게 발각되자 성종은 안종을 사수현(=사천시)으로 유배보 내고
그녀는 안종의 유배 가는 길을 배웅하다가 돌아오는 길에 산통을 느껴 아들인 대량원군을 낳다가 산고로 죽었다.
그러나 다른 설에 의하면 수태 중 왕욱의 사저에 있다가 발각되어, 부끄러워 울며 도망가다가 출산하고 죽었다고 한다.
고려사 후비열전과 고려사절요에 의하면 출산 직전 그녀는 이웃에 살던 왕욱의 사저에 있었다고 한다.
성종은 왕욱을 불러 질책한 뒤 사수현으로 귀양보낸다.
아이는 성종에 의해 양육되었고, 성종이 명하여 보모를 택하여 그 아이를 돌보게 하였다.
한편 헌애왕후 역시 김치양과 간통하다가 발각되었다.
경종이 죽은 후 외가의 친척으로 일찍이 출가하여 승려가 된 김치양을 만나 자주 교류하다가 사통하게 되었다.
이것이 공공연히 알려져 궁궐에 분란을 일으켰다.
성종은 김치양을 처형하려 했으나 헌애왕후의 부탁으로 귀양 보내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지었다.
그러나 이 두 사건으로 왕실의 권위는 대대적으로 실추되었다.
<거란의 침입>
993년(성종 12년) 거란이 세운 요나라의 대군이 고려로 침략하자 친히 안북부(안주)까지 나아갔다.
이후 서희를 적진에 보내 외교담판으로 요나라의 군대를 물러가게 하였다.
또한 여진족이 차지하고 있던 압록강 동쪽 땅에 강동 6주를 설치하여 영토를 넓혔다.
995년(성종 14년) 잠시 중단된 개혁을 재개하여, 6관을 상서 6부로 하는 등 관제를 개편하였으며,
지방 행정 구역을 10도, 12주로 나누어 다스렸고, 지방의 중소 호족을 향리로 편입하여 통제하였다.
백부 광종의 정책을 이어받아 과거제도를 강화, 장려하였고, 숭불의 폐단을 고려하여 팔관회 등 불교 행사를 금하고
유교주의를 채택하여 서울과 지방에 학교를 세우고 학문과 농업을 장려하였다.
밖으로는 993년 거란의 침입을 계기로 송나라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거란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동북, 서북 지방에 특히 유의했다.
불교 중심 사회에서 유교 중심 사회로의 전환을 꾀하였고, 고려 광종 이후 고려는 외왕내제를 지향하였으나
그는 송나라와의 외교 정책과 동시에 송나라를 종주국으로 하는 사대외교 정책을 추진하여 호족, 귀족들의 반발을 초래하였다.
아들을 얻으려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였다. 997년 음력 10월에 병이 위독하여 조카인 개령군 왕송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능은 개성의 강릉이다.
* 왕후 : 문덕왕후 유씨 (광종의 딸) * 의붓딸 : 선정왕후(목종의 비)
* 왕후 : 문화왕후 김씨 (김원숭의 딸) * 딸 : 원정왕후(현종의 1비)
* 부인 : 연창궁부인 최씨 (최행언의 딸) * 딸 : 원화왕후(현종의 2비)
<서희>
내의령을 지낸 서필의 아들이다. 조부인 서신일 때까지는 이천 지방에 토착한 호족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버지에 이어서 서희 자신도 재상위에 올랐고, 다시 그의 아들 서눌, 서유걸이 수상인 문하시중과 재상인 좌복야를
지냈을 뿐더러, 특히 서눌의 딸은 현종의 비가 되어 외척가문의 하나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과 아울러 그는 스스로의 재능으로 평탄한 출세의 길을 걸었다.
972년에 십수년간 단절되었던 송나라와의 외교를 그가 직접 사신으로 가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의 가장 큰 외교적 활약은 993년에 대군을 이끌고 들어온 거란의 장수 소손녕과 담판하여 이를 물리친 일이었다.
고려의 일방적인 북진정책과 친송외교에 불안을 느낀 거란이 동경유수 소손녕으로 하여금 고려를 침공하게 하였다.
거란군은 봉산군을 격파한 뒤, “대조(거란)가 이미 고구려의 옛땅을 차지하였는데 지금 너희 나라에서 강계를 침탈하므로
이에 와서 정토한다.”는 등의 위협을 거듭하였다.
이에 대하여 고려에서는 항복하자는 견해와 서경(평양)이북의 땅을 떼어주고 화의하자는 할지론이 우세하였다.
그러나 봉산군을 쳤을 뿐 적극적인 군사행동을 취하지 않고 위협만 되풀이하는 적장의 속셈을 간파한 서희는 할지론을 적극
반대하고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 여기에 민관어사 이지백이 동조하자 왕도 이에 찬성하였다.
이때 마침 소손녕도 안융진을 공격하다가 중랑장 대도수와 낭장 유방에게 패하여 고려의 대신과 면대하기를 청해왔으므로
서희가 여기에 응하게 되었다. 거란의 군영에 도착하여 상견례를 할 때, 소손녕이 서희에게 뜰에서 절할 것을 요구하자
‘뜰에서의 배례란 신하가 임금에게 하는 것’이라 하여 단호히 거절하며 당당한 태도로 맞서 결국 서로 대등한 예를 행하고
대좌하게 되었다.
소손녕이 먼저 침입의 원인을 “그대 나라는 신라땅에서 일어나 고구려의 땅은 우리가 소유하였는데 당신들이
그 땅을 침식하였다.”는 것과,
“고려는 우리나라와 땅을 접하고 있는데도 바다를 건너 송나라를 섬기고 있기 때문에 이번의 공격이 있게 되었다.”고
두 가지를 들었으나 침입의 근본적인 이유가 후자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서희는
“우리나라는 곧 고구려의 옛 터전을 이었으므로 고려라 이름하고 평양을 도읍으로 삼은 것이다.
만약, 지계로 논한다면 상국의 동경도 모두 우리 경내에 들어가니 어찌 침식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뿐만 아니라 압록강 안팎도 역시 우리 경내인데 지금은 여진이 그곳에 도거하여 완악하고 간사한 짓을 하므로 도로의 막히고
어려움이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심하다. 조빙을 통하지 못하게 된 것은 여진 때문이니 만약에 여진을 쫓아내고
우리의 옛땅을 되찾게 하여 성보를 쌓고 도로가 통하게 되면 감히 조빙을 닦지 않겠는가!”라고 반박, 설득하였다.
이와 같이 언사와 기개가 강개함을 보고 거란은 마침내 철병하였다.
이러한 서희의 국제정세에 대한 통찰력, 당당한 태도, 조리가 분명한 주장 등이 외교적 승리를 가져온 것이다.
그 결과 994년(성종 13)부터 3년간 거란이 양해한 대로 압록강 동쪽의 여진족을 축출하고 장흥진, 귀화진, 곽주, 귀주,
흥화진 등에 강동6주의 기초가 되는 성을 쌓고 생활권을 압록강까지 넓히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서희는 문무를 겸비하였을 뿐만 아니라 성품도 근엄하고 사리에 밝았던 것 같다.
일례로 성종이 서경에 행차하였을 때 미행으로 영명사에 가서 놀이를 하고자 하는 것을 상소, 간언하여 중지시켰다.
또 어가를 따라 해주에 갔을 때 임금이 그의 막사에 들어가고자 하니, “지존께서 임어하실 곳이 못 됩니다.”라고 정중하게
사양하였으며, 다시 술을 올리라고 명하자 “신의 술은 감히 드릴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여 결국 막사 밖에서
어주를 올리도록 한 사실에서도 그의 면모를 살필 수가 있다.
또한 공빈령 정우현이 봉사를 올려 ‘시정의 일곱가지 일’을 논한 것이 임금의 뜻을 거슬렸으나 서희는 오히려 정우현의 논사가
심히 적절한 것이라고 변호하고 그 허물을 스스로에게 돌렸다고 하는 데서도 잘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정우현은 감찰어사가 되고 서희는 말과 주과를 위로의 증표로 받았다고 한다.
서희는 성종의 총애를 받으면서 일신의 영달과 더불어 나라에 큰 공적을 쌓을 수 있었다.
이러한 모습은 그가 996년에 병으로 개국사에 머물게 되자 성종이 친히 행차하여 어의 한벌과 말 세필을 각 사원에 나누어 시납하고,
개국사에 다시 곡식 1,000석을 시주하는 등 그가 완쾌되도록 정성을 다한 사실에서 알 수 있다.
<구주대첩>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할 때부터 거란과는 거리를 두었다.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를 거란이 멸망시켰고,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고려는 북진 정책을 국시로 내걸었기 때문에
국경을 마주한 거란과는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거란 입장에서는 이러한 고려의 정책과 더불어 송나라와 고려가 연합할 경우, 고려가 자신들의 뒤를 칠 것을 우려하여
사전에 고려를 완전히 자신들의 속국 정도로 제압하든지 최소한 송나라와 거리를 두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이 때문에 거란은 고려를 3차례 침공하였다.
993년(성종 12) 1차 침입에서는 소손녕이 이끈 거란군에게 승리한 뒤 서희가 담판을 벌여 강동 6주를 획득하였고,
1010년(현종 1) 2차 침입에서는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침공해 왔으나 별 소득없이 돌아갔고,
1018년(현종 9년) 3차 침입에서 강감찬이 구주대첩을 이루었다.
이에 고려는 강감찬, 강민첨, 김종현 등 20만 8천의 대군으로 소배압을 막도록 하였다.
고려군은 압록강 유역 흥화진의 삼교천에서 거란군과 맞서 싸워 승전하였으나, 거란군은 수도인 개경을 목표로 우회하여
계속 남하하였다.
고려 7대 목종 = 송, 효신 (재위 997년~1009년)
경종과 헌애왕후 황보씨의 아들이다.
997년에 성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후 모후 헌애왕후를 응천계성정덕태후로 존칭했다.
관리의 봉급제도인 전시과를 개정하고 학문을 장려하는 등 치적이 많았으나 아들이 없었다.
천추태후는 외척인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왕으로 삼고자 김치양과 함께 음모를 꾀하여,
왕의 당숙이자 사촌인 대량원군 왕순을 승려로 만든 뒤 죽이려고 하였다.
이를 간파한 목종은 서경 도순검사 강조에게 대량원군의 호위를 명하였으나,
오히려 강조에 의해 폐위되어 경기도 파주 접선 해안가에서 강조가 보낸 자객에 의해 살해되었다.
강조는 김치양 부자를 숙청하고 대량원군을 왕위에 올렸는데, 그가 즉 제8대 왕 현종이다.
목종의 능은 공릉이며 현재 위치는 알 수 없으나 개성 동쪽에 위치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아버지 : 5.경종 * 어머니 : 헌애왕후 황보씨 (=천추태후)
* 비 : 선정왕후 유씨
* 궁인 : 요석택궁인 김씨
<김치양>
목종의 모후인 천추태후의 외척이다. 경종이 죽은 뒤 승려 행색으로 천추궁에 출입하였으나,
추문이 있어 성종에 의해 멀리 장배되었다.
그러나 목종이 즉위하자 실권을 쥔 천추태후에 의해 합문지후 통사사인에 임명되고,
곧 우복야 겸 삼사사가 되어 패서호족인 유행간, 이주정, 문인위 등 친당을 조정에 포열시키는 등 권력을 휘둘렀다.
그리고 성종에 의해 구체화된 유교적 왕정체제에 반발하여 목종으로 하여금 네 차례나 서경행차를 하게 하였으며,
그때마다 방악과 주진의 신기에 대한 재제의 의식을 가지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자기 출신지인 서흥에 성수사라는 사당을 짓고, 또 궁성 서북에 시왕사를 지어 도교, 불교 및
토속신앙을 내세워 유교를 배척하고자 하였다.
1003년(목종 6) 천추태후와의 사이에서 아들이 생기자 그 아이를 왕위에 올리고자 당시 왕위계승에 가장 유력한
태조의 손자인 대량원군 왕순을 숭경사에 출가시켰다.
그리고 다시 대량원군을 삼각산 신혈사로 옮겨 은둔시킨 뒤 여러 차례 자객을 보내 살해하려 하였다.
그러나 대량원군의 살해음모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마침내 병중에 있는 왕까지 제거하려고
1009년 천추궁 곁의 대부유고에 불을 지르고 이 혼란을 틈타 목종 및 반대세력을 축출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이 실행에 옮겨지기 전에 유충정의 밀고로 그 음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왕은 재신 최항, 채충순, 황보 유의 등에게 신혈사에 있는 대량원군을 맞아오게 하는 한편,
서북면도순검사 강조에게 군사를 이끌고 입위할 것을 명함으로써 저지하였다.
이 난의 수습을 계기로 실권을 쥔 강조에 의해 그는 아들과 함께 살해되고, 그 일당과 천추태후는 섬으로 유배되었다.
<강조>
1009년(목종 12) 김치양이 목종의 어머니 천추태후와 사통하여 낳은 아들을 왕으로 세우려고 난을 일으킬 때,
목종의 명을 받고 궁궐수비를 위해 개경으로 오게 되었다.
그러나 개경에 도착하기 전 동주의 용천역에 이르렀을 때 죄를 저질러 조정에서 쫓겨난 뒤
항상 화난을 일으키려고 벼르고 있던 내사주서 위종정과 최창회가 거짓으로 전한 개경소식을 듣고,
자신이 천추태후에 의한 함정에 빠져 있다고 생각하여 서둘러 본영으로 되돌아갔다.
그런데 마침 천추태후는 군사들이 오는 것을 꺼려 내신을 보내어 절령을 막고 사람의 내왕을 차단하였다.
이러한 사태를 걱정한 아버지는 종을 승려로 변장시켜 죽장속에 서신을 보내 아들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개경에 와 국난을 평정하도록 하였다.
이 편지를 받자 목종이 세상을 떠난 줄 알고 부사인 이부낭중 이현운 등과 갑졸 5천인을 거느리고 황해도 평주에 이르렀으나,
왕이 세상을 떠나지 않은 사실을 알고 군사이동을 멈추게 하였다.
그러나 여러 장수들이 이제 와서 주저할 수 없다고 하자, 목종을 폐하고 새 왕을 세우기로 결심하고 개경으로 들이닥쳤다.
궁궐을 점령한 뒤 황보유의와 김응인을 시켜 김치양 일파에 의해 신혈사로 쫓겨나 있던 대량원군 왕순을 데려오게 하였다.
그리고 군사를 보내 도망간 김치양 부자와 유행간 등 7인을 죽이고, 천추태후의 친속 30여인을 귀양보냈다.
또한, 목종은 폐위시켜 태후와 함께 충주로 보내는 도중 상약직장 김광보를 시켜 시해하게 함으로써 대권을 쥐었다.
그러나 이듬해 거란의 침입으로 그의 대권은 제대로 행사하지도 못하고 좌절되었다.
1010년 11월, 거란의 성종은 목종을 죽인 죄를 묻겠다는 표면적인 이유를 내세워 쳐들어왔다.
그러나 근본적인 이유는 지난 993년(성종 12) 제1차침입 때 강동육주의 영유권을 고려에 넘겨주었다는 것과 고려가 송나라와 화친관계를 지속하고 있다는 데 있었다. 이에 그는 행영도통사가 되어 거란군과 맞서 싸웠다.
그러나 계속적인 승리에 자만심이 쌓여 거란군이 공격해온다는 보고를 듣고도 경계를 하지 않다가
결국 같은해 11월 수많은 적군이 들이닥치자 대항할 겨를도 없이 패하고 말았다.
이때의 패전으로 많은 병사가 죽고, 부장 이현운, 도관원외랑 노전, 감찰어사 노의, 양경, 이성좌 등과 함께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포로가 되어 자신의 신하가 되어달라는 거란 성종의 권유에, “나는 고려사람인데 어찌 너의 신하가 되겠는가?” 하며 단호히 거절하여 고려인의 늠름한 자세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현운이 성종의 신하가 되겠다고 하자 발길로 차면서 고려인의 긍지를 잃지 말라고 나무랐다는 일화를 남기고 최후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