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태조, 박술희
고려 1대 태조 = 왕건, 약천 (재위 918년~943년)
태조는 고려 왕조의 초대 국왕이다. 시호는 운광렬대정예덕장효위목인용신성대왕이다. 연호는 천수.
왕건은 877년 송악산 송도에서 왕륭과 그의 부인 한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송악의 유력 호족이었던 아버지 왕륭은 후일 궁예가 거병하자 궁예의 휘하에 의탁하였고, 금성태수를 역임하기도 했다.
<도선 승려와 풍수지리 전설>
그의 출생에 대해선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강충(=왕건의 외6대조)에게 한 승려가 지나가다 부소산 남쪽에 집을 짓고 거주하면 곧 군왕이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하고 사라졌다.
승려의 예언에 따라 강충은 송악 부소산 근처에 터를 닦고 집을 짓고 살게 되었다.
송악의 호족이 송악의 남쪽에 집을 새로 짓고 있었다.
그때 마침 그곳을 지나던 도선대사란 고승이 문 밖에서 이것을 보고 “북쪽으로 옮겨 지으면
이곳에서 세상을 구할 성인이 태어날 것”이라고 중얼거리며 탄식하였다.
그러면서 왕륭에게 새 집터를 잡아주고 이 일을 비밀로 할 것을 당부한 뒤 길을 떠났다.
그로부터 얼마 후 왕륭의 부인 한씨에게 태기가 있더니 그 이듬해 음력 1월 14일 아들이 태어났다.
아기가 태어날 때 신비한 광채와 자줏빛 기운이 방 안 가득 빛나고 하루종일 뜰에 서려 있었다.
왕륭은 도선대사의 예언대로 아들이 태어나자 이름을 건이라 지었다.
태조는 어릴 적부터 총명함과 슬기로움이 남달랐으며 용모도 훤칠하여 장부다운 기상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태조가 17살이 되자 도선대사가 다시 송악으로 왕건을 찾아와 그에게 군사학과 천문학, 제례법 등을 가르쳤다.
<궁예의 휘하 부장>
895년 아버지를 따라 궁예의 휘하에 들어간 그는 898년(효공왕 2) 궁예 진영의 정기대감이 되었다.
898년 (효공왕 시대) 정기대감에 오른 태조는 약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지략과 통솔력으로
연이어 군대를 이끌고 출정하였으며, 900년까지 광주와 국원, 당성 등지를 평정하였다.
<후고구려 건국 이후>
900년 광주, 충주 등을 공취, 그 공으로 아찬의 위계를 받았다.
900년부터 황해 해상을 통해 후백제의 견훤과 교전하였다.
후고구려 건국 후 903년 수군을 이끌고 전라북도 지역을 공략, 궁예의 영토를 확장하여 알찬에 승진하였다.
육지에서도 전라도, 경상도 지방에서 견훤의 군사를 격파하여 영토를 확장하는 한편
정벌한 지방의 구휼에도 힘써 백성의 신망을 얻었다.
906년 상주의 사화진에서 견훤의 군대를 격파하였다.
913년 변방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문무백관의 최고 우두머리인 시중의 지위에까지 올라 명실상부한 2인자가 되었다.
궁예는 그를 전적으로 신임하고 모든 정사를 맡겼다.
<후백제와의 교전>
한편 북원의 성주 양길은 후백제와 동맹을 맺고, 후백제의 견훤은 양길을 대장군으로 임명하여 후고구려를 협공한다.
왕건은 군사 일부를 북원성으로 보내 양길군과 대적하게 하는 한편 직접 수군을 이끌고 후백제의 목포, 신안, 나주 일대를 공격한다.
후백제의 민심이 이반된 틈을 타 왕건은 서남해안을 공략하였고 오다련군 등 서남의 귀족들은 왕건에게 투항하였다.
갑판 선상에서 시내 위를 바라보던 왕건이 오색의 운기를 보고 달려갔다가 빨래하고 있는 오씨를 보았다.
<장화왕후>
그가 나주에 이르러 한 우물가에 있던 처녀에게 물을 달라 하였는데, 처녀는 바가지에 물을 떠주면서 버들잎을 하나 띄워서 주었다.
이유를 묻자 "장군께서 급히 물을 마시다가 혹 체할까 염려되어 그리 하였나이다" 하고는 얼굴을 붉히면서 고개를 떨구었다.
그는 처녀의 아버지인 나주의 호족 오다련군을 만나게 되었고, 오다련군은 그의 사람 됨됨이가 범상치 않음을 알아보고
자신의 딸 오씨를 그와 결혼시킨다.
처녀는 왕건이 찾아오기 며칠 전에 이미 황룡 한 마리가 구름을 타고 날아와 자신의 몸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 둘 사이에서 아들 무(=혜종)이 태어나지만 그는 곧 군사를 이끌고 되돌아갔다.
후에 태조는 혜종 왕무가 임금될 자격이 있음을 알았으나 모후의 신분이 미천하여 주변의 반발이 있자
왕위를 계승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징표로 옷상자에 자황포를 담아 전해주었다.
뒤에 왕건이 태자를 책봉할 때 왕건이 징표로 장화왕후 오씨에게 하사한 자황포 비단을 대광 박술희에게 보여주자,
박술희가 그 뜻을 알고 혜종을 태자 삼기를 적극 건의하여 성사시켰다.
<정변과 추대>
호족 세력에 염증을 느낀 궁예는 왕비 강씨와 두 왕자를 살해한다.
궁예의 숙청에 반감과 위기의식을 느낀 신숭겸, 복지겸, 백옥삼 등은 일부 호족들과 제휴하여 왕건을 추대할 계획을 세운다.
918년 그를 찾아가 왕위에 오를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왕건은“나는 충의를 신조로 삼고 있으니 왕이 비록 난폭할지라도 어찌 감히 두 마음을 가지겠는가?”라면서
왕건이 일단 거절하였다.
그러나 신숭겸 등은 “시기란 만나기 어렵고 알고도 놓치기 쉬운 것인데 하늘이 주는 것을 받지 않으면
도리어 그 재앙을 받는 법입니다.”라고 밝혀 자신들의 거사가 천명임을 강변하였다.
결국 거사를 왕건이 허락하자 그를 새 군주로 세웠다.
<즉위>
918년 6월 15일 철원궁의 포정전에서 즉위하여, 고구려의 뒤를 잇는다는 뜻에서 국호를 고려로 하고,
새로 '천수'라는 연호를 정하였다.
이듬해에는 자신의 고향이자 세력 근거지인 송악으로 천도하여 자신의 정치적, 군사적 기반을 확고히 다졌다.
통일 역량을 기르기 위하여 대내적으로는 궁예가 저지른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기 위해 빈민 구제 기구인
흑창을 설치하고 세금을 낮추어 민심을 안정시키는 한편, 고려에 반대하는 호족들을 줄이기 위해
그는 각지 호족의 딸들을 후비로 맞이하였고, 아들들을 특별히 송도에서 수학하게 하였는데
이는 혼인관계를 통해 호족세력을 통합하는 것과 자제들을 볼모로 삼아 각지의 호족을 견제할 목적이었다.
또한 구 고구려세력들의 염원이었던 북진정책을 내세웠고 불안한 시대 민심을 수습코저 숭불정책을 건국이념으로 삼아
정책을 펴나갔다. 왕건은 서경을 개척하고 여진을 공략했으며 불교를 호국신앙으로 삼아 각처에 절을 세웠다.
대외적으로는 힘으로 신라지역을 공략하려던 궁예와는 달리 강성한 백제세력에게 시달리던 신라와의 우호정책을 통해
후백제와는 무력으로 대결하는 정책을 취하였다. 후백제와의 싸움에서 고려는 처음에는 927년 공산 동수 전투에서
패배를 거듭하였으나, 930년 고창 전투 이후 몇 차례의 전투를 통해 점차 승리의 기세를 잡았다.
즉위 초반 궁예의 부하로 그에게 반발한 환선길의 반란, 이흔암의 반란에 부딛쳤다.
또한 명주의 성주 김순식 역시 그가 궁예를 몰아냈다는 점을 비판하며 그에게 항거하였다.
그러나 김순식은 포섭하는데 성공하고 후에 왕씨 성을 그에게 사성한다.
<발해 흡수와 후백제와의 전쟁>
926년(천수 9) 거란족의 요나라에게 무너져 망명해 온 발해의 왕자 대광현을 포함한 발해 유민들을 흡수하고,
신라를 공격한 후백제를 신라와 협공하였다.
927년(태조 10) 음력 9월 공산 전투에 신숭겸, 김락, 전이갑·전의갑 형제와 함께 출정하였다가 크게 패하였다.
공산 전투 초반 고려군이 승리하는 것 같았으나, 싸움의 진행 중 태조는 견훤이 이끄는 후백제군에게 포위되어 위험하였다.
이때 신숭겸이 “제가 대왕과 외모가 비슷하오니 제가 대왕으로 변장하면 대왕께서는 무사히 탈출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왕건의 옷을 빼앗아 입고, 태조 왕건이 일반 군졸로 변장하여 포위를 뚫고 탈출하였다.
태조는 부득이 신숭겸과 옷을 바꾸어 입고 빠져나간다. 태조가 포위망을 빠져나가는 동안 신숭겸은 태조 왕건의 행세를 하며
왕건의 백마를 타고 군대를 통솔하다가 견훤군에게 발견, 견훤군이 쏜 화살에 맞고 전사했다.
이후 신숭겸의 시체를 발견한 태조는 크게 슬퍼하여 송악으로 철수할 때 참수되어 머리가 없던 신숭겸의 시신에
금으로 만든 머리 모형을 끼워 넣어 장사지내고 장절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러나 930년 고창 전투에서 후백제군을 크게 격파하면서 한반도의 패권을 장악한다.
927년의 공산 동수 전투 이후 사기가 오른 후백제군은 930년 7월 갑병 5,000명을 이끌고 의성부를 공격해 함락시켰고
그곳의 성주이자 왕건의 부장인 홍술이 전사했다.
930년 12월 후백제군은 교통의 요충지 고창으로 몰려들었고 이에 왕건은 그곳을 지키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고창으로 향한다.
왕건이 고창에 오자 고창 호족 김선평, 권행, 장정필 등이 군대와 식량을 지원하였고 고려군은 먼저 후백제군의
식량 보급대로 공격해 보급로를 끊었고 왕건은 대군을 이끌고 고창 병산으로 진격해 3~4일 간의 접전 끝에
고창 지역의 지방 호족들의 지지를 얻은 고려군이 후백제군 8,000명을 사살하고 대승을 거두었고 견훤은 겨우 퇴각하였다.
<삼국 통일>
이후 신라를 침략하는 후백제와 교전하며 신라를 지원하였다. 신라 경순왕은 결국 고려에 투항할 의사를 피력하고,
마의태자 등 일부의 반대에도 왕건에게 귀순한다. 경순왕의 귀순은 그에게 명분을 안겨주었는데,
일찍이 태조는 견훤과 더불어 경쟁적으로 신라 왕실을 높인다는 점을 내세웠고, 자신이 고구려의 계승자임과 동시에
신라의 계승자라는 점과 견훤을 반란자로 지목함으로서 통일전쟁의 명분을 찾으려 했다.
935년(천수 18) 후백제 왕실 내분으로 도망온 견훤의 귀순을 받아들였다. 같은 해 자진 항복해 온 경순왕을 극진하게 대우하며,
사위로 맞아들여 신라를 평화적으로 합병하였으며, 936년 10만 명에 가까운 대군을 거느리고
견훤의 맏아들인 신검이 이끄는 후백제와 홍산(=연산)에서 일대 격전을 벌인 끝에 멸망시켜 후삼국을 완전히 통일하였다.
이로써 고려는 후삼국뿐만 아니라 발해의 유민까지 포함한 민족의 재통일을 이룩하였다.
그 후 신라와 후백제의 유민들을 포섭, 융화, 결혼 정책을 쓰고 귀족은 예로서 대접하였고,
사심관, 식읍, 호장, 부호장 등을 주어 회유하였다. 한편 숭불정책을 써서 불교를 국교로 삼아 사원을 지었고 승려를 우대하였으며,
신라 문화를 그대로 받아들여 교학, 사상, 민간신앙을 적극 보호하였고, 도참을 믿어 보호하였다.
'정계', '계백료서'등을 내어 정치의 귀감으로 삼게 하고 왕권을 확립하였다. 그러나 이때 저술한 정계와 계백료서는 후에 실전되었다.
<북진 정책>
왕건은 고구려의 옛 수도 서경을 중시하여 그곳을 고구려의 전통을 이어받고 옛 땅을 되찾으려는 북진 정책의 전진 기지로 삼아
재건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러나 서경으로 천도하지 않았다. 서북면을 개척하고 발해 유민들을 받아들였으며,
여진족의 거주지를 공략하는 등 북진 정책을 추진한 결과 왕건이 사망할 무렵에는 청천강에서 영흥에 이르는
고구려 영토의 일부분을 수복하였다.
<거란과의 관계>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키자 고려는 발해의 유민을 받아들였다. 942년, 거란이 화친을 요청하는 사신을 보내어 낙타를 선물해 왔다.
하지만 왕건은 거란이 형제국인 발해와의 맹약을 어기고 멸망시킨 신의가 없는 나라라고 하여 사신을 귀양 보내고
낙타를 만부교에 메어 굶겨 죽이는 등 강경한 태도로 수교를 거부하였다. 2차로 거란이 사신을 파견했을 때도 역시 거절하였다.
또한 왕건은 유언을 통해서도 거란의 풍습을 따르지 말고 경계할 것을 명하였다.
이후 중국의 오대 십국에 꾸준히 사절을 파견, 중국의 제국들과 외교활동을 하며 거란과 여진족까지 견제하는 외교정책을 펼친다.
<사망>
943년 임종을 눈 앞에 두고 고명대신인 삼중대광 박술희에게 943년 후세의 왕들이 치국의 귀감으로 삼도록 ‘훈요 10조’를
유훈으로 내려 자신의 자손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데 원칙으로 삼는 귀감으로 남겼다고 한다.
그는 태자 무를 일찍부터 태자로 정하였으나 태자 무의 외가는 세력이 미약한 점을 염려하였다.
그는 박술희를 불러 고명 대신으로 정하고 태자 무의 앞날을 부탁하였다.
943년 음력 5월 29일 병사하였다. 임종 당시 왕건의 향년 66세였다.
서예에 뛰어났으며, 능은 개성에 위치한 현릉이다. 태조의 뒤를 이어 차비인 장화왕후에게서 난 아들 무가 왕위를 이었으니
그가 혜종이다.
* 아버지 : 세조 왕륭 * 어머니 : 위숙왕후 한씨
* 왕후 : 신혜왕후 (유천궁의 딸)
* 왕후 : 장화왕후 (오다련의 딸) * 아들 : 2대 혜종
* 왕후 : 신명순성왕후 (유긍달의 딸) * 아들 : 태자 왕태 / 3대 정종 / 4대 광종
* 아들 : 문원대왕 (헌의왕후의 아버지) / 아들 : 증통국사
* 딸 : 낙랑공주 (신라 경순왕의 아내. 헌숙왕후의 어머니)
* 딸 : 흥방공주 (원장태자의 아내. 경종의 제5비인 대명궁부인의 어머니)
* 왕후 : 신정왕후 (황보제공의 딸)
* 아들 : 대종 왕욱 성종의 아버지, 경종의 장인 * 딸 : 대목왕후 - 광종의 왕비이자 경종의 어머니.
* 왕후 : 신성왕후 (김억렴 의 딸) * 아들 : 안종 왕욱: 현종의 아버지
* 왕후 : 정덕왕후 (유덕영의 딸)
* 아들 : 왕위군 / 인애군 / 원장태자 (대명궁부인의 아버지) / 아들 : 조이군
* 딸 : 문혜왕후 - 문원대왕의 아내이자 헌의왕후의 어머니.
* 딸 : 선의왕후 - 대종 욱의 아내이자 성종, 헌애왕후, 헌정왕후의 어머니.
* 딸 : 공주 (의성부원대군의 처,)
* 후궁 : 헌목대부인 (평준의 딸) * 아들 : 수명태자(문덕왕후의 전남편인 흥덕원군의 아버지)
* 후궁 : 정목부인 (왕경의 딸) * 딸 : 순안대비
* 후궁 : 동양원부인 (유금필의 딸) * 아들 : 효목태자 / 효은태자 왕원
* 후궁 : 숙목부인 * 아들 : 원녕태자
* 후궁 : 천안부원부인 (임언의 딸) * 아들 : 효성태자 / 효지태자
* 후궁 : 흥복원부인 홍씨 * 아들 : 태자 직 * 딸 : 공주 (태자 태의 처)
* 후궁 : 대량원부인 (이정언의 딸) / 후대량원부인 (이원의 딸) / 대명주원부인 왕씨
* 후궁 : 광주원부인 (왕규의 딸) / 소광주원부인 (왕규의 딸) * 아들 : 광주원군
* 후궁 : 동산원부인 (박영규의 딸) / 예화부인 왕씨 / 대서원부인 김씨 / 소서원부인 김씨
* 후궁 : 서전원부인 / 후궁 : 신주원부인 (강기주의 딸) / 후궁 : 월화원부인 /
* 후궁 : 소황주원부인
* 후궁 : 성무부인 (박수경의 딸) * 아들 : 효제태자 / 효명태자 / 법등군 / 자리군 * 딸 : 신라 경순왕 부인
* 후궁 : 의성부원부인 (홍유의 딸) * 아들 : 의성부원대군
* 후궁 : 월경원부인 (박영규의 딸) / 몽량원부인 (박수경의 딸) / 해량원부인
<훈요십조>
훈요 십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1.불교를 숭상하고, 사원의 폐단을 엄단하라.
2.사원을 함부로 짓지 말라.
3.장자가 왕위 계승을 하되, 어질지 못하면, 신망있는 자에게 정통을 잇게 하라.
4.고려의 특성에 맞게 예약을 발전시켜라.
5.지맥의 근본인 서경을 중시하여, 서경에서 1년에 100일간 머물라.
6.연등(燃燈)과 팔관(八關) 등을 소홀히 하지 말라.
7.백성들의 신망을 얻고 신상필벌을 확실히 하라.
8.차령 이남 금강 밖 지방은 산세가 거꾸로 달려 역모의 기상을 품고 있으니 결코 그 지역 사람을 중히 쓰지 말라.
9.백관의 녹봉을 제도에 따라 마련했으니, 함부로 증감하지 말라.
10.경전과 역사를 널리 읽어 온고지신의 교훈으로 삼아라.
<박술희>
943년 태조가 사망하기 직전에 태조로부터 군국대사를 부탁받고, 훈요십조를 전수받았으며,
자신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혜종의 강력한 후원자가 되었다.
호족 세력과 왕권, 그리고 왕규 사이에 얽힌 복잡한 권력 투쟁은 정치가가 아니라 군인이었던 박술희에게는 버거운 것이었다.
혜종의 세력 기반은 미약하였고, 이복동생인 왕요와 왕소는 외할아버지의 세력인 충주 호족 세력과 왕식렴을 중심으로 한
서경 세력의 지원을 받아 강력한 세력을 갖고 있었다. 여기에 외척인 왕규도 왕위를 탈취하려고 하고 있었다.
태조가 아니면 유지되기 힘들었던 고려 초기의 불안한 정치 상황은 박술희에게는 불운이었다.
권력 투쟁의 과정에서 박술희는 왕요와 그를 지지하는 서경 세력에 의해 강화 갑곶으로 귀양을 가게 되어 얼마 후
조정의 밀명을 받은 자객에 의해 살해당하고, 그가 지키려 했던 혜종도 2년을 못넘기고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