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눌지왕, 자비왕, 소지왕, 선혜부인, 보도부인, 오도부인, 벽아부인, 벽화부인,
<신라 19대 눌지 마립간 = 눌지왕 (재위 417년 ~ 458년)>
삼국사기에 따르면 최초로 마립간의 칭호를 사용한 임금이다.
신라본기에서 김대문의 말을 인용하길 “마립간이란 방언으로 말뚝을 이른다. 말뚝은 함조를 말하는데 관위에 따라 배치했다.
즉 임금의 말뚝을 위주로 신하의 말뚝들을 그 아래 벌였으니 왕호를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내물 마립간이 재위 37년인 392년 실성을 고구려에 볼모를 보냈는데, 실성이 이에 한을 품고 내물의 아들 눌지를 해치고
동생 복호와 미사흔을 각각 고구려와 왜에 볼모로 보냈다.
그 뒤 고구려 사람을 시켜 눌지를 살해하려 했으나 오히려 눌지가 실성을 시해하고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복호와 미사흔은 418년 박제상을 시켜 돌아오게 했는데, 이 일화는 삼국유사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424년 음력 2월 고구려에 사신을 보냈다.
431년 음력 4월 왜가 동쪽을 침범하고 명활성을 둘러쌌으나 소득 없이 물러났다. 432년 봄에 기근이 발생했다.
433년 미사흔이 죽었는데, 임금이 서불한에 추증했다.
그해 음력 7월 백제와 화친을 맺었다(나-제 동맹). 나-제 관계가 좋아져 이듬해 434년 비유왕이 음력 2월에 말 두 필을,
음력 9월에 흰 매를 보냈고 음력 10월에 눌지가 황금과 명주를 보내 답례했다.
440년 왜가 두 차례에 걸쳐 남쪽과 동쪽 변경을 침입, 백성들을 납치했다.
444년 음력 4월에는 왜가 보다 대규모로 쳐 와, 금성을 열흘간 에워쌌으나 군량이 떨어져 도망쳤다.
임금이 기병 수천을 거느리고 추격해 독산 동쪽에서 싸웠으나, 신라군 장병 절반이 넘게 죽었다.
임금이 패해 말을 버리고 산 위에 올라, 적들이 여러 겹으로 에워싸는데, 안개가 짙게 끼어 간신히 왜군의 눈으로부터 피해
도망칠 수 있었다.
450년 음력 7월 고구려의 한 장수가 실직의 들에서 사냥을 하는데 하슬라성주 삼직이 그를 죽였다.
장수왕이 노해 군사를 일으켰으나, 마립간이 사죄하자 그대로 물렀다.
그러나 454년 음력 8월 다시 고구려가 심공했으며, 455년 음력 10월엔 고구려가 백제를 침공하는 것을
마립간이 군사를 보내 구원했다.
* 아버지=17.내물 마립간 * 모후=보반부인 김씨
* 왕비=아로부인 김씨 * 아들=20.자비 마립간 * 딸=조생부인
* 차비=치술공주 김씨 * 딸=황아공주
<신라 20대 자비 마립간 = (재위 458년 ~ 479년)>
눌지 마립간의 맏아들이며, 실성 이사금의 외손자이다.
왕비 김씨는 서불한 미사흔의 딸로, 재위 4년째인 461년 부인으로 맞았다.
459년 음력 4월 왜인들이 병선 백여 척으로 습격하고 월성을 에워쌌다.
신라군은 마립간의 지휘에 따라 성에서 지키다가 적이 퇴각하는 것을 기다려 추격, 바다 어귀로 몰아
물에 빠져 죽게 한 적병이 절반이 넘었다.
462년 음력 5월 다시 왜가 쳐들어와 활개성을 점령하고 백성 1천여를 생포했다.
이듬해인 463년 음력 2월 또다시 쳐들어와 삽량성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마립간이 벌지와 덕지에게 명해
매복해 있다가 후퇴하는 왜병을 요격, 크게 이겼다.
이 해 왜의 침입을 저지하기 위해 변경에 두 개의 성을 쌓고 음력 7월에 군을 사열하였으며, 467년에는 전함을 수리했다.
468년 봄, 고구려와 말갈이 실직을 습격하였다. 이해 음력 9월 하슬라 주민중 15세 이상 되는 자들을 징집해 이하에 성을 쌓았다.
마립간은 이후 방위체계 확립에 주력, 469년 음력 4월의 수해 복구를 위해 음력 7월에 신라 전역을 순행했으며,
470년 삼년산성을, 471년 모로성을 쌓고, 473년 명활성을 수리했으며, 474년 일모, 사시, 광석, 답달, 구례, 좌라 등의 성을 쌓았다.
475년 음력 7월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를 치자, 개로왕이 태자 문주를 보내 구원을 요청하니
마립간이 백제에 원군을 보냈으나, 신라군이 채 도착하기도 전에 백제가 무너지고 개로왕은 살해되어 있었다.
476년 음력 6월 왜가 동쪽을 침범하자, 마립간이 덕지에게 명해 격퇴하게 하여 2백여를 죽이고 사로잡았다.
477년 음력 5월에 또다시 크게 군을 일으켜 다섯 갈래로 쳐 왔으나 소득 없이 돌아갔다.
* 아버지=19.눌지 마립간 * 모후=아로부인 김씨
* 비=파호부인 김씨 * 아들=21.소지 마립간 * 딸=준명공주 김씨
<신라 21대 소지 마립간 = 조지 마립간, 비처 마립간 (재위 479년 ~ 500년)>
480년 음력 11월에 말갈이 북쪽을 침범하였다.
이후 신라는 전쟁준비에 들어가 481년 음력 2월 마립간이 비열성에 행차, 군사를 정비했다.
음력 3월에 고구려와 말갈이 함께 북쪽 변경을 침입, 호명성 및 일곱 성을 빼앗고 미질부로 진군했다.
신라는 백제와 가야에 원군을 요청, 고구려와 말갈을 막아내, 퇴각하는 것을 이하 서쪽에서 쳐부수고 1천여를 베었다.
그 후 482년 음력 5월에는 왜인들이 변경을 침범했다.
소지 마립간 치세에는 자연재해가 잦았는데, 480년 음력 5월 가뭄과 10월의 기아, 482년 음력 2월의 폭풍 및 금성의 화재,
음력 4월의 폭우, 483년 음력 4월과 7월에 홍수, 음력 11월 우레와 전염병 등이 계속 기록되어 있다.
자연재해가 계속된 직후 마립간은 오함이라는 자를 새로 이벌찬으로 삼는 등 인사 개편에 나서는 듯하였으나
484년 음력 7월 고구려가 다시 북쪽을 침공, 백제군과 함께 모산성 아래에서 크게 쳐부쉈다.
485년 음력 2월에는 구벌성을 쌓아 군사를 정비하고, 486년 정월 이찬 실죽을 장군으로 임명하고
일선 지역의 장정 3천을 징발해 삼년산성과 굴산산성을 고쳐 쌓았다. 음력 4월 왜인들이 변경을 침범했고,
침입을 막아낸 음력 8월 낭산 남쪽에서 군대를 사열했다.
계속된 외침과 자연재해의 수습을 끝낸 소지마립간은 나을신궁의 건설을 시작, 497년 음력 2월 끝냈다.
나을은 시조 박혁거세 거서간이 처음 태어난 곳이라 한다. 음력 3월에는 곳곳 관부에 명해 도로를 수리하게 하고
음력 7월에 월성을 보수했다. 그러나 이해 음력 10월 또다시 우레가 있었다.
488년 정월, 마립간은 월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음력 2월 일선군에 행차해 빈민을 구제하고,
음력 3월에 돌아오면서 지나는 주군의 죄수들을 2대 사형죄를 제하고는 용서했다.
489년 정월에는 하는 일 없는 백성들을 몰아다 농사를 짓게 하였는데, 신라본기에 기록된 최초의 실업자 대책이다.
489년 음력 9월 고구려가 북쪽을 다시 침범했고, 음력 10월 호산성을 함락시켰다.
490년 음력 2월 비라성을 재건, 국방을 손보고 음력 3월에 수도에 시장을 개설, 사방의 물자를 유통시켰는데
이는 역시 신라본기에 기록된 최초의 경제진흥책이다.
493년 음력 3월 백제의 동성왕이 사신을 보내 혼인을 요청, 이벌찬 비지의 딸을 보내 결혼동맹을 맺었다.
이해 음력 7월에는 해안에 임해진과 장령진을 설치, 왜로부터의 방비를 강화했다.
495년 음력 8월에는 고구려가 백제의 치양성을 공격해 원군을 청해오자, 신라가 군사를 보내 고구려군을 무찔렀다.
이에 496년 음력 7월 고구려군이 다시 신라의 우산성을 쳤는데, 장군 실죽이 나가 맞아 싸웠다.
497년 음력 4월 왜, 음력 8월에 고구려가 다시금 잇따라 침공, 고구려군이 결국 우산성을 점령했다.
500년 마립간이 날기군에 행차해 벽화부인을 아내로 얻었다. 이해 음력 11월 죽었다.
* 아버지=자비 마립간 * 모후=자비마립간비 김씨
* 비=선혜부인 김씨 * 딸=보도부인
* 계비=벽화부인
* 후비=연제부인 박씨(22.지증왕비) * 아들=산종
* 후비=벽아부인 김씨(벽화부인의 모친) / 보혜 / 준명공주 김씨(자비마립간의 딸) / 홍수 / 보옥공주 / 묘양 / 융융공주 김씨(가야공주)
<선혜부인>
선혜부인 김씨는 신라의 제 21대 임금인 소지마립간의 정비이다.
아버지는 이벌찬 내숙이며, 어머니는 제 19대 왕 눌지 마립간과 아로부인의 딸인 조생부인이다.
선혜는 묘심과 사통하였는데, 이를 들켜 폐출 당하였고, 묘심은 죽게 된다. 이후, 보기(보신과 황아의 아들)과 수리
(미해공과 청아의 딸)의 아들인 홍기와도 관계하여 아들 기오공을 낳았고,
기오공은 옥진궁주의 딸인 흥도와 결합하여 지도부인을 낳으니, 곧 진지왕의 비이고 김용춘의 어머니이다.
* 부친=이벌찬 내숙 * 모친=조생부인
* 남편=21.소지 마립간 * 딸=보도부인 * 외손녀=지소태후
* 남편=묘심랑 * 딸=오도부인 * 외손녀=옥진궁주
* 남편=홍기공 * 아들=기오공 * 손녀=지도부인
* 남편=호조 * 아들=비조부 혹은 비지배 * 손자=8대 풍월주 문노
* 딸=양화공주 * 외손자=대가야 도설지왕 * 외손녀=진흥왕의 후비 월화궁주
<보도부인>
보도부인은 법흥왕의 비였다. 파도부인이라고도 한다.
540년 남편 법흥왕이 붕어하고 그의 조카 진흥왕이 즉위하자 541년까지 1년간 섭정을 맡기도 하였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법흥왕과 함께 법류 혹은 묘법이라는 법호로 영흥사라고 하는 절을 짓고
법흥의 명에 따라 비구니가 되었다고 한다.
* 아버지=소지 마립간 * 어머니=선혜부인
* 자매=오도부인 (위화랑의 처) * 조카=옥진궁주(법흥왕의 후궁)
* 남편=23대 법흥왕 * 딸=지소태후 * 외손자=24대 왕 진흥왕
<오도부인>
얼굴이 매우 아름다워 법흥왕의 총애를 받았으나 위화랑과 사통한 것이 밝혀져 법흥왕은 그녀를 아시공에게로 보내고,
위화랑의 누이인 벽화부인 또한 비량공에게 재가시켰다.
* 부=묘심랑 * 모=선혜부인 * 자매=보도부인 * 남매=기오공
* 애인=위화랑 * 딸=옥진궁주 / 금진낭주
<벽아부인>
벽아부인은 '화랑세기'에만 등장하는 소지마립간의 후비이다.
백흔과 조리의 아들 섬신과의 사이에서 위화랑을, 날이군의 군인 파로와의 사이에서 벽화부인을 낳았고 한다.
위화랑은 초대 풍월주이자 소지마립간의 마복자라고 기록되어 있다.
* 남편=21.소지 마립간
* 남편=파로 * 딸=벽화부인 * 손녀=삼엽공주
* 남편=섬신공 * 아들=위화랑 * 손자=이화랑 / 손녀=옥진궁주
<벽화부인>
벽화부인은 신라 날이군 출신으로 484년에 태어났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아버지는 파로이며, ‘화랑세기’에는 어머니가 소지 마립간의 후비인 벽아부인이라고 나타난다.
500년 음력 9월에 소지 마립간이 날이군에 행차하였는데, 그때 파로가 당시 16세이던 딸 벽화를 왕에게 바쳤다.
소지 마립간은 이를 거부하고 왕궁으로 돌아왔으나, 후에 벽화가 떠올라 몇 차례 몰래 찾아가 사통하였다.
벽화를 몰래 찾아가던 어느 날 도중에 어느 노파에게 현재 왕에 대한 평가를 물었는데,
노파는 왕이 왕궁 외부의 여인과 사통하면서 변복을 하고 드나든다고 하여 성인이 아니라 비판하였다.
이에 부끄러워진 소지 마립간은 벽화를 몰래 왕궁으로 불러들여 별실에 거처하게 하였다.
벽화는 소지 마립간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두었으나 이후 기록에 등장하지 않는다.
벽화부인이 소지마립간의 총애를 받으면서, 그녀의 이부동모제인 위화랑 또한 궁을 드나들며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이후 벽화부인은 위화랑의 권유로 지증왕의 태자였던 원종(=법흥왕)을 모시게 되었고, 딸 삼엽공주를 낳았다.
그러나 법흥왕이 총애하던 오도부인이 위화랑과 사통하자 법흥왕은 노하여, 벽화를 비량공에 재가시켰다.
또한 벽화는 비량공에게 재가하기 이전에 이미 비량공과 화장실에서 사통하는 관계였으며, 그 사이에서 아들 구리지를 낳았다고 한다.
* 아버지=파로 * 어머니=벽아부인
* 남편=소지 마립간 * 아들=?
* 남편=법흥왕 * 딸=삼엽공주
* 남편=비량공 * 아들=구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