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우리나라 이야기

[고구려] 민중왕, 모본왕, 태조대왕, 차대왕, 명림답부, 신대왕, 고국천왕, 을파소

malimi 2011. 12. 2.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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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4대 민중왕 = 해색주, 해읍주 (재위 44년 ~ 48년)>

유리명왕의 아들이다. 해씨(解氏)일 가능성이 있다.

 

 

대무신왕의 아우로 대무신왕이 죽었을 때, 대무신왕의 아들인 태자 해우(5대 모본왕)의 나이가 어리므로

대신 즉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민중왕은 대무신왕의 아들이고 모본왕의 동생이라고 되어 있다.

 

 

왕위에 오른 44년 음력 11월에 대사면령을 내렸으며, 45년 음력 3월에는 신하들에게 큰 연회를 베풀었다.

음력 5월에는 나라 동쪽에서 홍수가 나서 백성들이 굶주리자 창고를 열어 진휼했다.

 

 

47년에 사냥을 나간 민중왕은 민중원에 이르러 석굴을 발견하고 그곳에 자신을 장사지낼 것을 명하였다.

음력 10월에는 잠지락부의 대가인 대승 등 1만여 가(家)가 한의 낙랑으로 투항하였다.

48년에 왕이 죽자 유언에 따라 석굴에 장사지내고 지명을 따서 왕명을 민중왕이라 하였다.

 

 

* 부왕=유리명왕     * 모후=왕후 송씨     * 왕후=미상

 

 

<고구려 5대 모본왕 = 해우, 해애루 (재위 48년 ~ 53년)>

해씨(解氏)일 가능성이 있다. 대무신왕의 원자(元子)이자 둘째 아들이다.

모본왕은 성격이 포악하고 국사를 살피지 못해 백성들이 원망했다고 한다.

 

 

49년에 후한의 요동 태수 제융이 화친을 청해와 화친하였다.

이 해에는 폭풍이 불고 서리와 우박이 내리는 등 악천후가 있어 음력 8월에 사신을 보내 굶주린 백성들을 진휼하였다.

 

 

51년에는 “왕이 날로 포악해져 앉을 때는 사람을 깔고 앉고 누울 때는 사람을 베개로 베어

사람이 혹시 움직이면 용서 없이 죽였으며, 신하 중에서 간하는 자가 있으면 활을 쏘았다.”고 하였다.

이에 53년에 신하 두로에게 살해당했다.

 

 

* 부왕=대무신왕     * 모후=?

* 왕후=?     * 아들=고익(48년에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이후의 생애는 알 수 없다.)

 

 

<고구려의 제6대 태조대왕 = 어수, 궁 (재위 53년~146년)>

고구려를 강력한 중앙집권국가 수준으로 끌어 올린 왕으로서 그 업적이 나라를 세운 것에 버금간다고 하여

태조대왕 또는 국조대왕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119살에 붕어하여 한국의 군주 중 가장 오래 산 군주 및 가장 오랫동안(93년) 군림한 군주로 기록되어 있다.

 

 

유리명왕의 아들인 고추가 재사(=모본왕 사후에 왕으로 추대되었으나 나이가 많아 사양하고 아들 태조왕에게 왕위를 잇게 했다.)

의 아들로, 어머니인 태후는 부여 사람이다.

 

 

태조대왕은 태어나면서부터 눈을 떠서 볼 수 있었고 어려서도 총명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태조대왕의 나이가 어려 태후가 수렴청정 하였다. 태후의 수렴청정 기간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서기 53년 두로가 모본왕을 살해한 후 국인이 재사를 왕위에 추대했으나 재사가 연로함을 이유로 거절하고

아들인 궁을 추대하여 태조대왕이 7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다.

 

 

55년 요서 지역에 10개 성을 쌓아 후한의 침공에 대비하였고 56년에는 동옥저를 병합하여 동으로는 창해,

남으로는 살수(=청천강)에 이르렀다.

68년에 갈사국 왕의 손자 도두가 나라를 들어 항복하니 그를 우태에 임명했고,

70년에는 관나부 패자 달가를 보내서 조나를 병합하였다.

72년에는 환나부 패자 설유를 보내 주나를 병합하고 그 왕자 을음을 고추가에 임명하였다.

또한 98년에는 책성을 순수, 102년에는 책성을 안무, 114년에는 남해를 순수하는 등

확장된 영역에 대한 중앙의 통제력을 강화하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한편 후한과의 대외관계에서는 평화적인 외교와 적극적인 공세를 함께 펼쳤다.

105년에는 요동군을 공격하여 약탈했으나, 109년과 111년에는 평화적인 외교를 펼쳤다.

118년에는 예맥과 더불어 현도군과 화려성을 공격하였다.

121년 봄에는 후한이 예맥을 공격하였고 왕은 동생인 수성을 보내 막도록 하였다.

수성은 항복을 가장하여 적군을 속인 후 요지를 장악하였으며 몰래 요동군과 현도군을 공격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음력 4월에는 요동의 선비족과 더불어 요수현을 공격하여 요동태수 채풍을 살해하였다.

음력 12월에는 마한, 예맥과 함께 현도성을 공격하여 포위하였으나 부여왕 위구태가 한나라 군과 협공을 펼쳐 크게 패하였다.

122년에도 마한, 예맥과 함께 현도성을 쳤으나 부여의 방해로 패배하였다.

 

 

121년부터 태조대왕은 수성에게 국정을 돌보도록 하였으며 123년에는 목도루와 고복장을 좌·우보로 삼아 수성을 보좌하게 하였다.

고복장은 차대왕 즉위 후 차대왕에 의해 죽임을 당했으므로, 그의 정치적 반대파였다.

따라서 태조대왕이 목도루와 고복장을 좌보와 우보로 임명한 것은 수성을 견제하고 왕권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122년에는 후한과 화친하였으나 146년에 다시 전쟁이 벌어져 요동의 신안과 거향을 약탈하고 서안평을 공격하여

대방현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생포하였다.

 

 

한편, 수성은 132년 무렵부터 왕위에 욕심을 냈다.

그러나 태조대왕이 죽지 않자 146년 측근들의 부추김을 받아 역모를 도모하였다.

이에 태조대왕은 수성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그 후 별궁에서 남은 여생을 보내다가 165년에 서거하였다.

자연사했다는 주장과 다른 설에는 차대왕 또는 신대왕에게 살해되었다는 전승이 있다.

사후 평안남도, 주로 평양 주변 지역에서 무속의 신의 한사람으로 숭배되었다.

 

 

* 아버지=재사     * 어머니=부여태후

   * 왕후=?     * 아들=고막근 / 고막덕

 

 

<고구려 7대 차대왕 = 수성 (재위 146년~165년)>

태조대왕(=삼국사기에는 차대왕의 형으로 전해지지만, 후한서에는 차대왕의 아버지로 기록.) 치세 후반부터 장군으로 활약하였다.

121년 후한의 침입에 대항하여 출전한 수성은 거짓 항복으로 적군을 속여 안심하게 하고 험한 곳을 차지하고 막았으며

몰래 현도, 요동을 공격하여 크게 승리하였다.

 

 

이 해부터 태조대왕을 대신하여 국정과 군사를 통괄하였으며 132년부터 차기 왕위를 넘보는 언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146년 수성은 측근들의 부추김을 받아 쿠데타를 모의하였으나 실행하기 전에 태조대왕이 먼저 선위하고 물러났다.

76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147년 차대왕은 자신의 왕위 계승을 반대한 우보 고복장을 처형하였으며 좌보 목도루도 은퇴하였다.

이에 차대왕은 국가의 주요 요직에 자신의 측근을 임명하였다.

 

 

148년에는 태조대왕의 맏아들 고막근을 죽였으며 둘째아들 고막덕은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자살하였다.

 

165년에 연나부 조의 명림답부에게 살해되었다.

 

 

아들 고추안은 명림답부에 의해 차대왕이 살해되고 신대왕이 왕위에 오르자, 궁궐을 빠져나가 몸을 숨겼다.

신대왕이 즉위 후, 대사면령을 내리자 신대왕을 찾아가 살려줄 것을 청하였다. 이에 신대왕은 그를 사면하고, 양국군에 봉했다.

그 이후 삶은 전해지지 않는다.

 

 

* 형 혹은 아버지=태조대왕     * 왕후=?     * 아들=고추안

 

 

<명림답부>

고구려의 차대왕, 신대왕 시대의 인물로 고구려의 초대 국상이다.

연나부 조의로 있다가 165년 쿠데타를 일으켜 차대왕을 시해하고 왕의 동생 백고를 신대왕으로 옹립했다.

166년 국상에 임명되었고, 패자 벼슬을 더해 내외 병마의 통수권과 함께 양맥부락에 대한 지배권을 받았다.

 

 

172년, 한의 현도태수 경림이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입하자 왕이 이를 요격할 것인지 아니면 농성할 것인지 의견을 물었는데,

청야전술을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결국 한의 군사들이 굶주림에 지쳐 퇴각하였고, 이에 명림답부가 수천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추격하여 좌원에서 크게 섬멸하였다.

이 공으로 좌원과 질산을 식읍으로 받았다.

179년 9월 113세의 나이로 죽자 왕이 직접 애도를 표하고 예를 갖추어 질산에 장사지냈다.

 

 

 

<고구려 8대 신대왕 = 백고, 백구 (재위 165년~179년)>

태조대왕과 차대왕의 동생이지만 태조대왕과 터울이 43살까지 나므로 동생이 아니라

태조왕의 아들 또는 차대왕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

 

 

차대왕 때에는 폭정을 피해 산골로 숨어 살았다.

165년에 명림답부가 차대왕을 시해하자 좌보 어지류가 사람을 보내 백고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이에 77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신대왕은 166년, 좌, 우보를 폐지하고 국상제를 도입하여 명림답부를 임명하였으며 대사면령을 내리고

차대왕의 아들 추안을 양국군에 봉하는 등 정치적 안정을 꾀하였다.

168년에 후한의 현도태수가 침공해 들어와 항복하였으며 169년에는 현도태수 공손도를 도와 부산적을 토벌하였다.

172년에 한나라가 쳐들어오자 청야전술로 대응하였다.

한군이 굶주림에 지쳐 퇴각하자 신대왕은 명림답부를 보내 좌원에서 한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176년에 왕자 남무를 왕태자로 삼았으며 179년 음력 12월에 91세로 사망하였다.

맏아들은 어리석어 태자로 책봉되지 못했고, 셋째 아들은 왕위 계승 분쟁을 일으켰다가 자살했다.

막내아들은 고국천왕과 산상왕시대의 장수로 활약했다.

 

 

* 형 혹은 아버지=태조대왕     * 형 혹은 아버지=차대왕     * 모후=?

   * 왕후=?     * 아들=고발기, 고남무(고국천왕), 고발기, 고연우(산상왕), 고계수

 

 

<고구려 9대 고국천왕 = 남무, 국양왕 (재위 179년~197년)>

176년에 태자로 책봉되었고, 179년에 즉위하였다.

신대왕의 맏아들 발기(拔奇)가 불초하였기 때문에 둘째 아들인 남무가 대신들의 추대를 받아 즉위하였다고 한다.

고국천왕은 키가 9척(尺)이고 겉모습이 크고 위엄있었다고 한다.

180년에 제나부 우소의 딸 우씨를 왕후로 삼았다.

 

 

184년에 후한의 요동 태수가 쳐들어와 동생 계수를 보내 막았으나 패배하였다.

이에 왕이 직접 출병하여 좌원에서 한군을 격퇴하였다.

190년 가을, 왕후의 친척인 중외대부 패자 어비류와 평자 좌가려가 권력을 등에 업고 전횡을 일삼자 왕이 이를 벌하려 하였다.

이에 좌가려 등이 사연나와 함께 반란을 일으켜 191년 4월에 수도를 공격하였으나 패배하여 진압되었다.

 

 

반란을 진정시킨 뒤 그해에 왕은 평민 출신의 을파소를 등용하고 국상에 임명하였다.

구신들이 신진 세력인 을파소를 참소하자 왕은 “국상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멸족할 것이다.”라고 포고하였다.

이에 을파소는 왕의 정성에 감동하여 정치에 힘써 나라가 융성하였다.

194년에는 진대법을 제정하여 백성들을 구휼하였다.

 

 

197년에 사망하였으며 고국천원에 장사지냈다.

 

 

* 부왕=신대왕     * 모후=?     * 왕후=왕후 우씨

 

 

<을파소>

을파소(?~203년)는 고구려의 재상으로 고국천왕, 산상왕을 섬겼다.

유리왕 때 신하인 을소의 4세손이며, 입관 전에는 서압록곡 좌물촌의 가난한 농부였다.

삼국사기에 열전이 남아 있다.

 

 

고국천왕 13년인 191년, 외척인 어비류와 좌가려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진압한 이후 고국천왕이 4부에 영을 내려 인재를 천거하게 하였다.

그러자 4부에서는 동부의 안류를 천거하였고, 안류가 다시 유리왕 때 재상이었던 을소의 후손인 을파소를 천거하였다.

이에 왕은 그를 중외대부와 우태로 임명하였다.

 

 

을파소는 이 관직이 자신이 뜻하는 바를 하기에 충분치 못하다고 여겨 “저로써는 감히 왕명을 감당할 수 없으니,

폐하께서는 현명하고 어진 이를 가려내 높은 관직을 주어 대업을 이루소서”라 하니, 왕이 그 뜻을 알고 국상(재상)으로 임명했다.

기존 대신들과 외척들이 을파소를 경계하자 왕은 국상에게 복종치 않는 자는 일족을 멸하겠다는 엄명을 냈다.

 

 

이후 을파소가 지극정성으로 국사에 임하니, 백성들이 편안하고 내정이 안정되었다.

같은 해 10월, 고국천왕은 안류를 불러 을파소를 천거한 공을 치하하며 대사자에 임명하였다.

 

 

3년 뒤인 194년, 7월에 서리가 내려 백성들이 굶주렸다.

이에 왕은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하는 한편, 관리들을 시켜 봄~가을의 기간 동안 곡식을 빌려 주었다가

10월에 갚게 하는 진대법을 실시하였다.

삼국사기에는 을파소와 진대법의 관계가 분명히 나오지는 않으나, 일반적으로 을파소가 진대법 실시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보고 있다.

 

 

고국천왕이 죽은 이후 산상왕 대에도 을파소는 국상의 자리를 유지하였다.

산상왕 7년인 203년, 왕이 아들을 얻지 못해 근심하자 을파소는 "하늘의 명은 헤아릴 수 없으니, 기다리십시요"라고 진언하였다.

그 해 8월 을파소가 죽자 많은 이가 슬퍼하였다. 국상직은 고우루가 계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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